<이슈&인물> 비운의 농구스타 김영희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2.06 12:16:02
  • 호수 14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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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가…비참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한국화장품의 장신 센터 김영희가 점보시리즈 개막 이래 최고의 스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5㎝에 98㎏의 거구 김영희는 점보 1차 시리즈서 센터답게 1게임에서 한국 여자농구 사상 최고 기록인 52점을 올렸으며 리바운드도 17개나 뽑아내 공수 양면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경향신문>, 공포의 최장신 김영희, 1983)

지난 1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충북 청주체육관에서 열린 청주 KB와 부천 하나원큐 경기 시작에 앞서 추모하는 묵념을 15초간 진행했다. 추모의 대상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LA)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리스트 김영희다. 김영희는 지난달 31일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영희의 별세 소식에 농구계가 슬픔에 잠겼다.

대한민국
최장신

김영희는 대한민국 역대 최장신 여자농구선수다. 205㎝ 키로 한국 여성 중에서도 최장신으로 알려졌다. 김영희가 아기 때부터 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작게 태어나 할머니가 백일기도를 할 정도였다. 김영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165㎝ 정도로 크지 않았다.

장신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는 맨 뒤에 설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5학년 때는 175㎝가 넘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 큰 키는 그 자체로 좋은 자질이 될 수 있지만, 운동선수가 아닌 사람에게는 콤플렉스가 될 수 있다. 김영희는 “어려서부터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장군감’이라고 말하던 동네 어른들을 피해 멀리 돌아다녔다.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 갔을 때 아이들이 집 앞에 몰려와 ‘거인 나와라’고 외쳐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키가 커서 운동을 시작한 것은 맞다. 중학생 때 감독님이 ‘너는 서서 그물망에 공만 집어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큰 키 때문에 고등학교 때는 러브콜을 많이 받기도 했다”고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학교에서는 김영희 때문에 배구팀을 만들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공부를 중단하고 서울로 상경해 1년 동안 실업 배구팀 생활을 했다. 당시 아버지는 결핵으로 요양 중이었고, 어머니는 생선 행상을 했다. 가난한 집에서 밥 구경도 못하다 서울 실업 배구팀으로 간 후 키는 187㎝까지 컸다.

결국 그가 운동을 선택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 1년 간 국수만 먹은 적도 있었다.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어 시작한 운동이었다. 어린 나이에 제안받은 월급은 김영희에게 큰돈이었다.

김영희가 처음부터 농구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농구와 배구선수를 전전하던 그는 동주여자중학교 농구부 시절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 키는 축복이었다. 하지만 축복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1981년 한국화장품 여자농구단에 입단한 김영희는 대회 엠블럼에 코끼리 그림이 들어간 점보시리즈가 출범하면서 주목받았다. 1983년 12월11일 한국화장품 대 조흥은행 경기에서 최다인 52점을 넣으며 개인 타이틀 5관왕을 차지했다. 득점상, 리바운드상, 야투투사율상, 최우수상, 인기상이었다. 

큰 키로 고등학교 때부터 러브콜
84년 올림픽 은메달 쾌거 주인공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의 쾌거를 이룬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 공로로 이후 체육훈장 백마장과 맹호장 등을 받기도 했다.


언론은 김영희를 두고 “물찬 코끼리가 나르는 코끼리로 변했다”고 비유했다. 이때가 최전성기로 힘들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면도 존재했다. 김영희는 성적 지상주의로 인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았다. 특별히 컸던 키는 뇌하수체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성장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과잉 분비되면서 발현된 결과였다. ‘거인증’이라고도 불리는 말단비대증은 초기에는 증상이 없고, 증상도 점진적으로 진행돼 최종 진단을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김영희는 고교 시절부터 병마에 시달렸다. 극심한 두통에 밤새 눈물을 흘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감독에게 훈련 및 경기를 빼달라고 사정하면 어린 선수의 꾀병으로 받아들였다. 아프다고 말하면 사우나에 들어가 몇 시간씩 러닝을 해야 했다. 

통증은 진통제로 해소했다. 경기에 나서기 전에는 독한 진통제를 먹어야 했고, 경기에 뛸 때는 고통을 잊었지만, 밤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힘든 선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 스피드가 느리다는 지적을 받았다. 3점슛 제도 도입으로 농구 전술이 바뀐 것도 악재였다. 김영희는 “경기에 지면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대표팀에서도 벤치에 자주 앉아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체중이 120㎏까지 불어났다.

훈련받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거워지자, 소속팀에선 체중감량을 요청해 물 한 방울조차 먹을 수 없었다.

1987년 11월 말단비대증 진단을 받았고 운동을 그만둬야 했다. 뼈 성장으로 손발과 얼굴 등은 물론 혀와 같은 연부 조직까지 커졌다. 저혈당 및 갑상선 질환, 장폐색 등 합병증도 김영희를 괴롭혔다. 

1987년 11월은 두통이 극심해졌다. 샤워할 때 머리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다. 이때가 스물다섯살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뇌종양 판정을 받아 꿈을 접어야 했다.

거인병
뭐길래…

김영희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수술실에 들어가려는데 간호사가 기쁜 소식이 왔다고 전했다. 신문에 ‘김영희, 점보시리즈 1000득점 돌파’라고 보도됐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농구공을 손에 놓지 않으며 재기 의지를 이어갔지만 끝내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렇다고 농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수술 직후 훈련을 시작했지만 다시 쓰러졌다. 병원에선 ‘생명이 위독하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김영희의 선수 생활이 막을 내렸다.

불행은 파도처럼 찾아왔다. 아버지가 방광암 판정을 받았고, 그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뇌출혈로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이어 2000년 세 차례의 암 수술 끝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김영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7개월 가까이 곡기를 끊었다. 130㎏ 나가던 체중이 70㎏까지 빠졌다. 목숨을 끊으려 한 적도 있다. 남동생의 간곡한 설득 때문에 다시 살기로 했다”며 “말단비대증으로 매달 150만원 넘게 드는 성장호르몬 억제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한다. 나를 왜 이렇게 크게 만들어 힘들게 하는지. 하늘을 수도 없이 원망했다”고 회상했다.

김영희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은메달리스트로 체육 연금 20만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돈으로 한 달을 연명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부산의 8평 남짓한 아파트서 홀로 거주하며 계속되는 생활고를 겪었다. 어떤 때는 보름도 안 지났는데 7000원만 남은 적도 있었다. 

한 번 입원하면 2개월 넘게 했다. 안 좋은 일이 겹치면서 불안증, 우울증이 심해져 3~4년간 집 밖을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에 난방을 틀지 않고 울기도 했다. 

2002년 KBS <추적 60분> 방송팀이 김영희를 찾아왔다. 국가대표였던 김영희의 어려운 삶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것이었다. 방송팀과 함께 병원에 간 김영희는 자신이 거인병에 걸렸단 사실을 몰랐다. 은퇴 당시까지도 뇌하수체 종양으로 몸이 불편한 줄만 알았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은 김영희를 좌절시켰다.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었다.

지독한 병마
나눔의 시작


김영희는 “당시 국가대표 선수 연금으로 매달 받는 2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당연히 수술비도 없었고, 간병해줄 사람도 없었다. 너무 서러워서 주저앉아 울었다. 병원에선 3일 동안 수술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했다. 3일 뒤 그냥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당시 그는 “밖에 나가도 사람들이 다 저를 피한다. 너무 큰 몸 때문에. 지금 제 모습이 너무 싫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희는 “그랬더니 병원에서 저와 비슷한 거인증을 앓던 남성이 약물치료로 나은 사례가 있다면서 수술 말고 치료를 권했다. 매달 주사 한 번 맞고 약 타는 데 300만원씩 들었다”며 “감사하게도 병원에서 ‘10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국위 선양한 만큼 도움을 주자’고 결론내렸다. 이분들의 나눔으로 생명이 연장된 것”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도움의 손길은 또 이어졌다. 한 택시기사는 10년 넘게 몸이 불편한 김영희의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고, 집주인은 “평생 전세금을 올리지 않을 테니 이곳에서 편하게 오래오래 살라”고 배려했다.

쌀과 음료 등 식재료가 떨어질 때마다 몰래 채워주기도 했다. 제주도서 겨울마다 한라봉을 보내주는 따뜻한 이웃도 있었다. 선수 시절 혼자 경기를 보러 왔던 한 장애인은 김영희의 소식을 들은 뒤 매달 5만원의 성금을 보냈다. 

이런 김영희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있다. 바로 어머니의 유언이다.

모친은 “엄마, 아빠 다 죽고 너 혼자 되면 남에게 먼저 베푸는 삶을 살아라. 너가 나중에 늙어 걷기도 힘들 때 누가 널 도와주지 않는다”며 “힘들어도 누군가를 부축하고 일으켜야 너도 살 수 있다. 너가 먼저 고개 숙이고 베풀어야만 다른 사람들도 너를 돌봐주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기초연금과 메달 포상연금 등으로 생활한 김영희는 면도날 끼우기, 양말 실밥 제거, 전자제품 조립 등 가내 부업으로 장애인과 소년소녀 가장 등을 도왔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쌀 같은 구호품 등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줬다. 그렇게 하루 버는 돈은 1만원도 되지 않았지만, 김영희는 행복했다.

장애인 자원봉사는 김영희를 부끄럽게 했다. 불편한 몸으로 양말을 신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홀몸 노인에게 팥죽을 끓여주기도 하고 자신을 놀리던 꼬마들에게는 과자와 사탕을 건네기도 했다.

승합차에 과자, 음료수, 떡, 양말을 가득 싣고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중증장애인 시설을 찾았다. 김영희가 문에 들어서자 50명의 장애 아이들이 겁을 내며 달아났다. 처음엔 쭈뼛거리며 다가오지 않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져 결국 친구가 됐다.

말단비대증 합병증으로 선수 생활 중단
“장애인 봉사 시작으로 우울증 치료해”

김영희는 아이들이 신고 있던 낡은 덧버선을 예쁜 수면양말로 바꿔 신겼다. 다리와 발가락이 휘어져 양말을 신기조차 어려운 친구를 만났을 땐 눈물이 흘렀다. 

이런 경험은 그의 삶을 바꿨다. 자신이 가진 아픔으로 끙끙 앓던 과거 모습을 부끄럽게 느꼈다. 헤어질 때면 손을 꼭 잡고 가지 말라고 외치던 아이들의 모습이 항상 눈에 아른거렸다.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시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양손 가득 물품을 들고 찾아갔다. 그렇게 김영희가 다녀간 장애인 시설 및 보육원만 4곳이다.

김영희의 모습을 본 동네 주민들도 나눔에 동참했다. 인근 중국집 사장은 “혼자 좋은 일 하지 말고 같이하자”며 70인분 자장면을 들고 장애인 시설을 방문했다.

성금을 걷어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증상이 악화된 이후부터는 독거노인을 위한 나눔을 시작했다.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기엔 걷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동네에는 혼자 사는 노인이 많았다. 김영희는 보름을 굶었다는 할아버지를 위해 갈비탕을 사 드렸다. 동네 노인이 김영희의 집에 오면 호박죽도 만들고 가락국수도 만들어 대접했다. 남은 음식은 용기에 담아 싸드리기도 했다.

먼저 다가가니 사람들도 그에게 다가왔다. 이때부터 김영희의 별명은 ‘거인 아줌마’에서 ‘이쁜이’로 바뀌었고,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됐다. 이웃은 “아픈 데 없냐” “밥은 먹었냐”며 매일 찾아와 음식을 나눠줬다. 김영희는 혼자 사는 어른과 한 가족처럼 의지하며 지냈다. 덕분에 심각했던 외로움과 우울증을 떨쳐낼 수 있었다.

평생을 미혼으로 살아온 김영희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아래층에서 조부모와 함께 사는 어린 자매에게 김영희는 또 다른 엄마였다. 성금이 들어올 때마다 생활비, 병원비는 물론 컴퓨터 등 필요한 학용품도 사줬다.

그렇게 8년간 아이들을 키웠고 고민 상담도 했다. 김영희는 “학교서 친구들이 계속 돈을 가져오라고 한다고 울었다. 안 그러면 엄청나게 맞는다면서 우는데, 나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학교 교장 선생님께 전화해 학교폭력을 해결해 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며 “담임 선생님이 찾아와서 아이 이야길 천천히 듣고는 해결을 약속했다.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됐고, 지금도 ‘이모 보고 싶다’며 연락이 온다”고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따뜻하게
기억되길

김영희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따뜻함은 여전하다. “제가 좋아하는 시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하늘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그렇게 살라 하네.’ 저도 그렇게 살고 싶다.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 키가 큰 여자가 있었는데, 마음은 솜사탕이더라’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덩치에 마음이 좋으면 안 된다.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이야말로 나눔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절망 속에 있던 제가 일어선 것처럼.”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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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