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사고뭉치 이루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12.27 10:16:59
  • 호수 1407호
  • 댓글 1개

피는 못 속여…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가수 이루가 지난 19일, 음주 운전으로 방송 활동을 쉬고 자숙 기간을 갖기로 약속했다. 황당한 점은 3개월 전에도 음주 운전을 했었다는 점이다. 당시 동승했던 프로 골퍼는 자신이 운전했다고 진술했다가 거짓말로 드러나면서 검찰에 송치됐다. 이루는 자신의 SNS에 사과문을 올렸지만, 여론은 여전히 냉담하다. 

1983년생 가수 이루(본명 조성현)는 가수 태진아의 아들로, 아버지의 후광을 벗고 실력파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한국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이루’라는 이름도 어머니 성에서 따온 이와 새길 루 자를 조합해 ‘가요계에 이름을 새기겠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아버지를
뛰어넘어?

이루가 가수로 정식 데뷔한 것은 2005년 9월이지만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진 못했다. 데뷔 후 곧 입대했기 때문이다. 2008년 5월1일 25세였던 이루는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면서 팬들에게 “갑작스럽게 입대하게 돼 많은 분들께 너무 죄송스럽다. 아쉽지만 대한의 건아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훈련 열심히 받고 잘 다녀오겠다”고 입대 소감을 밝혔다.

제대한 후 이루는 세 번째 앨범을 내 ‘다시 태어나도’ ‘까만 안경’ ‘흰 눈’을 히트시켰다. 특히 ‘까만 안경’은 이루의 노래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는 “‘까만 안경’이 가수로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이 됐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감정이 잘 전달될까, 깊이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해 욕심이 많고 치밀한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AB형의 소유자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성격과 음악을 향한 열정은 태진아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는 “내 성격은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악바리 근성과 뭔가에 몰입하면 푹 빠지는 집요함을 갖고 있다. 이런 성격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것이다. 평생 노력파로 살아온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며 “아버지는 나에게 따뜻하면서도 엄격하다. 아버지는 정한 생활규칙을 반드시 지킨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테면 통금시간이 밤 11시여도 친구들과 놀다보면 그 시간을 넘기는 게 쉽지 않냐.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한 번도 어긴 적 없다. 매를 들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약속을 어기거나 거짓말을 하면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야단을 치셨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루가 ‘실력파 발라드 가수’가 되기까지 그의 발목을 잡은 것 역시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후광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다. 이루에 따르면 친형이 사장인 기획사에 아버지와 함께 ‘동료 가수’로 소속돼있었으나 가수가 되기까지의 공식·비공식 절차를 모두 밟았다. 

그는 버클리 음악대학 피아노학과를 휴학하고 한국에서 정식 오디션을 보고 친형 소속사에 들어갔다. 2년 동안 녹음실 청소와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했고, 소속사 작곡가가 발성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라고 지시해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다. 이 기간이 지난 뒤 소속사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이런 과정 때문일까? 이루는 데뷔 3년 만에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났다. 그는 ‘발라드계의 귀공자’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첫 단독 콘서트도 성공적으로 끝냈다. 당시 이루는 콘서트 콘셉트를 스스로 결정할 정도로 자신만의 개성있는 공연을 만들어냈다.

아빠는 착한 운전 캠페인 홍보대사
아들은 음주 운전으로 ‘면허 정지’

이런 그의 인기는 끝나지 않았다. 곧 인도네시아로 진출했고, 인도네시아에서 상상도 못했던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시작은 ‘까만 안경’이었다. 인도네시아 영화사 측에서 영화 OST로 ‘까만 안경’을 써도 되겠냐는 제의를 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게 됐다.


이때부터 이루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시작됐다. 태진아는 아들을 위해 이루의 얼굴이 새겨진 전단지를 음악 방송 객석마다 직접 나눠줬다. 사람들이 버린 전단지는 다시 주워서 화장실에서 씻었다. 이루는 인도네시아 지상파 방송 토크쇼 <Late Night Show>에서 ‘이루 특집 방송’으로 2시간가량 토크쇼를 진행했다.

오직 이루만을 위한 토크쇼였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또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태진아와 이루 부자의 사진이 걸렸다. 단독 콘서트는 2만여석이 매진됐고, 이루는 현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눈부신 성과도 잠시였다. 지난 20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루는 도로교통법 위반(음주 운전) 혐의로 이날 입건됐다. 지난 19일 오후 11시25분 강변북로 구리 방향 한남대교-동호대교 부근에서 음주 운전 중 사고를 낸 혐의를 받고 있다. 

이루가 탄 차량은 우측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도됐으며, 동승한 남성은 경미한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 수준(0.03% 이상 0.08% 미만)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루는 지난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음주 운전 사고를 낸 것을 인정하고 사과 글을 올렸다. 그는 “저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사죄드린다. 지난 20일 보도된 음주 운전 사실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현재 준비 중인 드라마의 제작사 및 방송사 관계자에게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연예활동을 중단하고 자숙하는 시간을 갖겠다. 깊이 반성하고 뉘우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저를 되돌아보겠다”고 밝혔다.

두 번의
음주 운전

이루는 내년에 방영될 예정이었던 KBS2 새 일일드라마 <비밀의 여자>에 캐스팅됐던 상황이다. 이에 <비밀의 여자> 측은 이루를 하차시키기로 결정했다. 지난 20일 비밀의 여자 측은 공식 입장을 통해 “<비밀의 여자>에 출연 예정이었던 이루가 하차하게 됐음을 알려드린다. 제작진은 시청자분께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처럼 직접 음주 운전 사과문을 올리고 방송 활동을 접었지만, 여전히 여론은 냉랭하다. 이루의 음주 운전 사고 당시 모습으로 추정되는 영상이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채널 ‘UN Village Seoul CAM’은 지난 21일 ‘22.12.19 강변북로 사고’라는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서울 한남동 UN 빌리지 부근에 설치된 CCTV에 찍힌 강변북로 모습이 담겨있다.

영상에는 당시의 아찔한 교통사고 장면이 나온다. 지난 19일 오후 11시27분 찍힌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는 강변북로 구리 방향 한남대교-동호대교 부근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방향을 잃는다. 그 후 비틀거리던 차량은 우측 가드레일에 부딪히며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져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고 전도됐다.

직후 뒤따르는 차들이 멈춰 섰고 다행히 사고 발생 순간 다른 차량과의 추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상에 담긴 사고 상황이 이루의 음주 운전 사고 현장인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에 담긴 날짜와 시간, 장소가 이루의 음주 운전 사고 당시 시각과 일치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사고로 추정된다. 또 사고 직후 차량에서 운전자와 동승자로 보이는 사람까지 2명이 내리는 모습도 영상에 찍혔다. 

황당한 점은 이루의 음주 운전 사고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루는 지난 9월에도 음주 운전 혐의로 입건됐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루 대신 본인이 운전했다고 진술한 여성 프로골퍼가 검찰에 송치됐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달 18일 범인 도피 혐의로 여성 프로골퍼 A씨를 서울서부지검에 송치했다.

끝없는
구설수

A씨는 지난 9월5일 이루의 음주 운전 혐의 관련 경찰 조사에서 “내가 직접 운전했다”고 진술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이루는 음주 측정 결과 처벌할 정도의 수치가 나오진 않았다. 이루는 “동승자 A씨가 운전했다”고 혐의를 부인했으며, A씨도 본인이 운전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경찰이 CCTV 등을 확인한 결과 이루가 용산구 한남동의 한 술집에서 나와 운전석에 타는 모습이 확인됐다. 하지만 ‘위드마크’에서도 유의미한 수치가 나오지 않았고 범인 도피를 교사한 증거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불송치 결정했다.


반면 자신이 운전했다고 진술한 A씨에 대해서는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검찰에 송치했다. 한편 태진아는 이루의 음주 운전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1일 유튜브 채널 <백은영의 골든타임>에서 백은영은 “태진아가 이루의 음주 운전으로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도저히 면을 들고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앞서 2020년 태진아는 충북경찰청의 착한 운전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한 바 있다.

12년 전에는 이루가 전 여자친구였던 작사가 최모씨와의 이별 과정에서 구설에 휘말린 적 있다. 이 사건은 2010년 8월27일 최씨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루와 결별 과정에서 태진아로부터 폭언을 듣고 모욕을 당했다”고 공개 사과를 요구하면서 발단이 됐다. 당시 최씨는 이루의 아이를 유산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태진아는 법무법인 ‘원’을 통해 보도자료에서 “최씨를 모욕한 사실이 없으며 오히려 1억원의 돈을 요구받았다”고 최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루의 1집 곡 ‘미안해’를 작사한 최씨는 ‘조씨 부자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보여라’는 제목의 미니홈피 글에서 “나이 차가 많지만 이루와 사귀게 됐다. 이루가 종로구청에서 대체 군복무할 당시에도 내 오피스텔을 자주 찾았다”고 주장했다.

3개월 전엔 ‘운전자 바꿔치기’ 의혹
드라마 <비밀의 여자> 캐스팅 취소

이어 “나와 이루가 헤어지는 과정을 리드한 태진아가 폭언을 일삼았다. 내 어머니를 만나 헤어지는 대가로 돈을 건넸다. 공개적인 사과를 요청해도 나를 매도하고 협박한다면 이루의 비인간적인 태도를 밝히겠다. 녹취 및 CCTV 자료, 증인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법무법인 원은 “이루와 최씨는 2년 전 잠시 남녀로 만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만날 당시 태진아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헤어지라고 압력을 가하거나 모욕한 사실이 없다”며 “최씨는 올해 초 편지를 보내 태진아에게 돈 1억원을 요구했다. 태진아는 법무법인을 통해 그런 행위가 계속될 경우 법률적인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으며 최씨와 가족이 용서를 구해 참았다”고 덧붙였다.

이어 “최씨가 이달 태진아에게 ‘다음 달 초 제가 쓴 책이 나옵니다.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덕담 한마디 들으려 전화드렸다’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며 “책 출간 과정에서 일종의 홍보를 위해 문제를 일으킨 것 아닌가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더 이상의 행동이 계속된다면 명예훼손과 협박 행위에 대해 법률적인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특히 최씨는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루의 아이를 유산했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럼에도 태진아 측은 여전히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2010년 9월7일 태진아 측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최씨가 그동안의 주장을 모두 철회하는 각서를 작성하고 용서를 구했다. 좋지 않은 일로 대중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최씨는 이루와 오래전 잠시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루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거나 유산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태진아가 최씨를 모욕했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한 사실도 전혀 없었다. 최씨는 각서를 통해 “태진아와 이루의 명예를 훼손한 것을 깊이 반성하며 다시는 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치부만
드러나

결국 최씨는 2010년 9월10일 ‘거짓말했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했다. 이루의 아이를 가진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나팔관 유착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충격적인 고백도 써놓았다. 

최씨는 “태진아 선생님이 내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부분은 있지만 협박은 없었다. 돈으로 이루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한 것도 사실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렇게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며 파국으로 치달은 폭로전은 결국 최씨의 거짓말로 종결됐다.


<alswn@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