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태원 대참사 ‘열었더라면…’ 해밀톤 지하통로의 비밀

사상자 줄일 대피로 있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일어나지 말아야 할 참사가 발생했다. 지난달 29일 이태원에서 핼러윈 데이를 즐기기 위해 나온 청년 156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수많은 인파가 몰린 이태원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밤 10시가 지나면서 웃음소리는 비명으로 변했고 상황은 아비규환이 됐다. 대다수의 사망 원인은 압사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골목길. 근처에 있던 이들이 대피를 도왔다면 사상자가 줄지 않았을까? <일요시사>는 해당 골목길 근처에 대피로로 쓰일 수 있던 해밀톤 호텔의 통로에 대해 알아봤다.

이태원 유명 술집인 ‘프로스트’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골목길 대각선에 위치한다. 프로스트 맨 오른쪽에는 한 문이 있다. 이 문과 골목길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해당 문은 해밀톤 호텔 1층인 로비와 연결된다. 그러나 이 통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존자들은 이 통로를 알았다면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웃음이
비명으로

지난달 29일은 토요일이었다. 핼러윈 데이를 미리 즐기기 위해 나온 인파는 10만명이 넘었다. 사고는 프로스트와 또 다른 술집인 ‘와이키키 비치펍’ 사이 골목길에서 발생했다. 수십명이 원활하게 다니기도 힘든 비좁고 경사진 골목길이었다. 희생자 상당수가 20대였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와 목격자 진술 및 소방당국과 경찰 발표를 종합하면 압사사고는 지난달 29일 오후 10시15분쯤 이태원동 해밀톤 호텔 건물 옆 너비 3.2m, 길이 40m 경사진 골목에서 발생했다. 해밀톤 호텔 뒤편 클럽 골목에서 내려오는 인파와 호텔 앞쪽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 쪽 도로변에서 올라오는 인파가 좁은 골목에서 마주치며 물러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일요시사>와 인터뷰를 진행한 한 생존자는 “100명이 왔다 갔다 하기도 힘든 좁은 골목이다. 한두 사람씩 넘어지자 위험을 직감한 사람들이 ‘뒤로! 뒤로!’ 소리를 질렀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프로스트와 와이키키 외에도 유명 라운지 바와 술집이 모여있어 해당 골목길 위는 이른바 ‘이태원 핫플레이스’라고 불린다. 이곳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골목은 세 군데가 더 있다. 이들 골목은 모두 내리막길이고, 한 골목은 사고가 난 골목만큼 좁다.

사고가 발생한 골목 바로 옆에는 와이키키 비치펍이 있다. 와이키키 비치펍은 1층 (124.36㎡)과 2층(129.94㎡)을 합쳐 총 254.3㎡다. 몇 발자국 옆에는 해밀톤 호텔 별관으로 알려진 이태원 최대 규모 라운지클럽 프로스트와 ‘글램 라운지’가 있다.

별관 1층은 프로스트가 사용하고 2층은 글램 라운지가 사용한다. 둘을 합쳐 825.6㎡로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서 가장 큰 라운지클럽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 골목이 끝나는 정면에는 ‘아틀리에(220.88㎡)’가, 좌측에는 ‘파운틴(257.91㎡)’이 위치한다.

유명 술집이 사실상 한곳에 모여있다고 할 수 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기에 한 곳에만 머물러 술을 마시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부분의 청년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놀기 좋은 곳과 분위기가 괜찮은 술집을 찾는다.

이태원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한 인사는 “핼러윈 데이가 아닌 불금·불토인 날에도 세계음식거리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라운지 바와 클럽 가드들이 줄 서는 사람이 많을 때면 강하게 통제하진 않지만 ‘가드라인’을 칠 정도”라고 말했다.

와이키키·프로스트·파운틴 등 라운지 바 밀집 지역
통행하는 사람에 줄서기 수백명 정체로 급포화상태

그러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일부 라운지 바와 술집은 불금과 불토보다 사람이 많은 핼러윈 데이임에도 불구하고 ‘가드라인’을 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통제를 하지 않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한 곳에 몰려있는 술집과 라운지 바에 사람들이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는 줄이 길어진 것도 문제라고 분석한다.

익명을 요구한 소방방재학과 A 교수는 “한 곳에 몰려있는 술집과 라운지 바에 대기하는 사람이 수백명이었고 대기 줄이 길어지면서 인구가 이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정체현상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다른 교수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동하기도 어려운데 더 많은 사람이 한 곳으로 집중돼서 터진 사건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참사 당일 이태원에 있던 사람들은 세계음식거리가 사실상 포화상태가 된 것이 밤 9시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9시30분이 넘어가자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거리에서 119에 신고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사상자가 속출한 골목길 외에도 세계음식거리에서부터 숨이 막혀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때문에 특정 인물들 5~6명이 “밀어!”라고 언급한 것 외에 또 다른 참사의 원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A 교수는 “여러 사람이 거리에서부터 숨이 막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면 경사진 골목길에 있던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깔리는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의식을 잃은 사람 수십명과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부상자들끼리 엉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참사 생존자와 목격자들은 부상자들이 와이키키와 프로스트 등에 들어갈 수 없었고 라운지 바와 술집 직원으로 추정되는 가드들이 오히려 밀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손님을 받았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들을 외면했다.

실제 <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사진을 보면 와이키키 내부에는 부상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한 생존자는 “11시쯤이었다. 다들 패닉 상태였고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와이키키뿐만 아니라 여러 술집과 식당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일부 술집은 가드가 밀쳤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출하려 애쓰는 가드나 직원도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주장했다.

밤 9시부터
지옥의 시간

라운지 바와 술집 직원 및 가드들이 부상자와 사람들에게 포화상태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피로를 안내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대피로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프로스트 맨 오른쪽 끝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해밀톤 호텔 1층 로비로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그러나 이 통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취재 결과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한 밤 10시부터 11시30분까지 해당 문 안에는 사람이 많았으나 해밀톤 호텔 로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프로스트 직원들이 해당 통로로 대피하라는 안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해밀톤 호텔 관계자도 “언제나 열려있는 문이고 핼러윈 데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는 사람만 다니는 통로다. 참사 당시에 그 통로로 대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B씨도 “직원들이 경찰이나 소방당국 관계자들에게 길만 비켜줬지, 어디로 가면 더 빨리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프로스트 직원들과 가드들이 경찰과 소방당국 관계자들을 도우면서 심폐소생술(CPR)에 나섰다는 주장도 많았으나 이들은 대형참사를 피할 수 있는 적극적인 조치에 나서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큰 음악 소리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몰랐거나 비명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 패닉 상태였다고 가정하면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렇다 해도 이들이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해당 통로를 통해 대피시킨 이후 부상자들을 적극적으로 안으로 들였다면 많은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해밀톤 호텔 관계자들도 해당 통로를 사람들에게 안내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을 안내해야 하는 법과 규정은 없다. 하지만 경찰과 소방당국의 조치 이전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않은 점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해밀톤 호텔 관계자는 “현재 경찰 수사에 협조하는 단계는 아니다. 자체 조사가 진행 중이고 조사가 끝나면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며 “지금은 공식적으로 어떤 걸 언급하거나 확인해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참사와의
인과관계

‘늑장 대응’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경찰은 사고의 법적 책임을 두고 고심에 빠졌다. 사상자가 속출한 골목길 위에 있던 일부 시민이나 와이키키 일부 직원이 참사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형사처벌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지난 2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 수사본부는 사고 당시 일부 시민이 앞 사람을 고의로 밀었다는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다. SNS에서는 사고가 난 골목길에서 오르막 쪽에 있던 일부 시민이 ‘밀어 밀어’라고 외치며 앞 사람을 고의로 밀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경찰은 현재까지 감식한 것과 인근 CCTV, 사고 기록 영상 등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 중이다.

앞 사람을 밀어 대열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뒤엉키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면 과실치사상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사람들이 뒤엉켜 인명피해까지 나는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사고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사람을 미는 행위 자체가 법적으로 폭행으로 볼 수 있기에 폭행치사상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민 사람과 ‘밀어’라고 외친 사람을 특정하기 어렵고 참사와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힘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피 안내를 하지 않거나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막은 술집 직원과 가드들, 이른바 ‘방관자’에 대한 처벌도 어려울 전망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남을 구조하지 않았을 때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국회에서 몇 차례 도입이 논의됐지만 모두 무산됐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 ‘응급상황에서 사람을 구조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응급처치를 했는데 처치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나 폴란드 독일 스위스 등에서는 이 법을 시행 중이다.

호텔 술집, 안내 안 하고 방관했나
손님 받기에 몰두? 부상자 안 들여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가드들이 잘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법적으로 잘못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영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막았다면 처벌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서초동 한 변호사는 “부작위에 의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보증인 지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호텔과 술집 직원들이 압사사고 발생을 예견하고 대피시켜야 할만한 보증인 지위에 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현직 판사도 “과실치사·폭행치사상 등의 혐의를 적용한다 해도 참사와 피의자 행위의 인과관계가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지가 중요하다”며 “수사기관이 수집한 증거와 법리적 검토를 종합한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지만 이번 사건 같은 경우 무혐의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한편 참사 당시 용산소방서 구조대는 오후 10시17분에 출발했으나 수만명의 인파를 뚫고 들어가기 버거워 현장에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어렵게 접근한 이후 구조대와 시민들이 깔린 사람들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수십명이 엉켜있어 구조가 어려웠다.

한 생존자는 “사람들이 넘어지고 층을 이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상황이 12시(자정) 전까지 지속됐다. 10시 반이 넘어가면서 사람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사고 현장에서 곧바로 사망 판정을 받은 이들만 45명이었다.

이번 참사를 두고 기본적 안전 관리에 손을 놓고 있었던 지방자치단체와 경찰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 당국은 안전 인력 증원 등 추가 조처를 하지 않았다. 특히 경찰은 마약사건·성범죄 대비 명목으로 137명을 배치했고, 용산구청도 안전관리계획을 세우거나 도로 통제 등을 요청하지 않았다.

안전담당 인력 배치와 교통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했다. 소방청에 따르면 사고 현장에 투입된 구급 차량은 143대다. 서울에서 지원된 54대를 제외하고도 경기남부 24대, 경기북부 25대, 인천 10대, 강원 10대, 충북 10대, 충남 10대가 지원됐다.

소방당국은 최초 신고를 받은 후 3분 만에 경찰에 공동 대응을 요청했지만 경찰이 교통통제 등을 위한 대규모 인력 투입을 서두르지 않았다. 구급차들이 1시간가량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하자 소방당국은 경찰청에 교통통제를 참사 당일 밤 11시에 요청했다. 관할서인 용산경찰서가 아닌 서울청 차원의 기동대 일부가 투입돼 현장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자정이 가까워서다.

방관자 처벌
사실상 불가

경찰이 상황을 안일하게 봤다는 정황은 이날 공개된 112 신고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 사고 당일 오후 6시30분께부터 119에 사고 발생 신고가 접수되기 직전인 10시11분까지 경찰은 “압사할 것 같아 통제가 필요하다”는 신고를 11차례 받고도 4차례만 현장 출동했다. 특히 사고 한 시간 전인 9시부터 접수된 신고에는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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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