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다시 보게 되는 김민재

유럽에 세워진 K-통곡의 벽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는 차범근과 박지성, 손흥민 등이다. 박지성을 제외하면 모두 공격수다. 이영표와 설기현, 기성용, 이청용 등의 프리미어리거들도 있지만 앞서 말한 세 사람을 뛰어넘지 못했다. 최근에는 손흥민에 이어 ‘월드 클래스’라고 평가받는 선수가 있다. 바로 수비수인 김민재다. 그는 ‘아시아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며 유럽에서 맹활약 중이다.

‘KIM KONG’. 김민재가 소속된 이탈리아 세리에A SSC 나폴리 선수들이 그를 부르는 별명이다. 키 190cm에 몸무게 90kg에 육박하는 ‘탈 아시아급’ 피지컬로 대한민국에서 나오기 힘든 유형의 선수라고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축구 전문매체 <442>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센터백 10위에 올랐다.

실력 검증
이탈리아로

어릴 적 김민재의 축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명은 삼촌이다. 나이 차이가 14세에 불과한 삼촌은 선수 출신의 축구 코치였다. 김민재는 고향 통영에서 삼촌을 따라다니며 조기 축구회, 축구 강습 등 공이 있는 곳을 자연스럽게 찾아다녔다.

자주 만날 때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삼촌과 동행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삼촌이 던져준 공으로 볼 리프팅 등 축구 기술을 연습했다. 그런 경험이 5학년 때 축구부에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중학교 시절엔 김민재가 다니던 학교로 삼촌이 부임하면서 은사와 제자 사이가 됐다. 아직 구타가 남아있던 시절이었고, 조카만 특별대우하기 힘들었던 삼촌은 김민재를 오히려 더 엄하게 대했다.


김민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힘들긴 했지만 그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카였지만 많은 자극을 주셨다. 넌 아직 멀었다는 말씀도 많이 해 주셨는데 실제로 그땐 축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촌과 사제관계를 맺고 나자 전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기 힘들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삼촌과 거리감이 생겼다. 그 거리를 확 좁힌 계기가 프로 데뷔였다. “프로 데뷔를 하고 삼촌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래서 데뷔 이후 많이 친근해졌다. 예전엔 구박만 하셨는데 이젠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고 말했다.

삼촌은 김민재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중 하나다. 국가대표 데뷔전이었던 이란전을 보기 위해 통영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자랑스러운 조카를 보여주기 위해 친구들까지 대동했다. 조카의 ‘선수 입장’을 보며 삼촌이 유독 자랑스러워했다고 김민재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김민재는 “형보다 더 친한 사람은 없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 살 터울인 형은 명지대 주전 골키퍼 김경민이다. 나이는 김민재가 어리지만 축구를 시작한 것도, 프로에 올라온 것도 김민재가 더 빨랐다.

어린 시절 성격은 반대였다. 김민재는 말썽을 많이 피우고, 친구들과 주먹다짐도 많이 하는 초등학생이었다. 태권도는 노란띠에서 멈췄고, 유도는 선수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조금 배운 것이 전부였다. 김민재의 무기이자 문제점은 일단 덤비고 보는 성미였다.

반면 형의 성격은, 김민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형이 맞고 올 때 한 학년 위 교실에 올라가서 괴롭힌 사람을 찾으면 일단 때리고 나서 말을 걸었다고 한다.

김민재는 받아쓰기도 20점을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소년이었다. 대신 밖에서 뛰어노는 게 좋았다. 축구선수가 될 기회가 보이자 냉큼 잡은 것도 그래서였다. 반면 형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차분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먼저 선수생활을 시작하자 형도 몇 년 후 자연스럽게 축구화를 신기 시작했다. 김민재가 형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초등생 때 선수 출신 삼촌이 기본기 알려줘
한국서 나오기 힘든 190cm 90kg 괴물 피지컬

김민재는 과거 전형적인 ‘파이터형 수비수’로 컷팅 능력과 슬라이딩 태클 능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유럽 진출 이후 성장하면서 공격적으로 오버래핑하거나 뒤쪽에서 기다리면서 커버하는 롤도 수행하는 등 팀과 전술에 맞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인 말로는 대부분 감독의 주문을 많이 따르려고 하며, 그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한다.

수비수 본연의 임무인 수비적인 부분에서는 다방면에 우수한 모습을 보여준다. 패스 차단, 스탠딩 태클, 슬라이딩 태클, 헤딩을 비롯한 수비수라면 갖춰야 하는 필수적 능력들로 직접적인 수비 모두에 뛰어난 편이다. 육중한 체격에 비해 발도 순간 최고 34.3km/h로 굉장히 빠르고 최고 시속에 도달하는 가속도도 빠르다.

거기에 순발력도 좋으며 프로 데뷔 이후 2kg 정도 벌크업에 성공해 튼튼한 어깨와 견갑골, 상체 근육과 함께 전반적인 피지컬과 몸싸움 능력이 매우 좋아졌다. 그래서 2020년 이후로는 피지컬이 좋은 선수들과의 경합에서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SSC 나폴리로 이적해서는 안드레아 페타냐, 치로 임모빌레,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등 건장한 체격을 가진 선수들을 말 그대로 찍어 눌러버리는 등 세리에A에서도 톱 클래스의 피지컬을 과시하는 중이다.

거기가 주발은 오른발이지만, 왼발 또한 수준급으로 잘 다뤄 수비 라인 어디에나 설 수도 있다. 4백에선 양쪽을 번갈아 뛰기도 하며, 3백에서도 중앙은 물론 양 측면 스토퍼 모두를 뛸 수 있다.

현대 축구에서 왼발 센터백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생각하면 오른발잡이지만 양쪽 센터백 위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김민재의 특징은 좋은 강점이 될 수 있다.

최대 강점이 적극성을 앞세운 수비력이다. 하지만 김민재는 넓은 시야를 활용한 긴 패스와 빌드업도 주저하지 않으며, 모험적인 로빙 패스도 자주 시도한다. 잘 먹히는 날에는 패스로 공격 전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탄탄한 피지컬
파이터형 수비수

혹은 과감하게 자신이 기습적으로 공을 몰고 전진하기도 하며, 공이 끊기면 스피드를 활용해 빠르게 수비에 복귀해 공격을 끊기도 하는 등 괴물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플레이를 자주 보여주곤 한다.


프로 초창기에는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투박한 수비를 했으며, 그로 인해 오프사이드 라인을 잘 맞추지 못하는 등 라인 관리 능력이 미숙해 실수가 자주 나왔다. 그러나 김민재를 눈여겨본 파울루 벤투 국가대표 감독의 개인 강습을 받으면서 현재는 많이 개선된 상태다.

하지만 체력이 저하되면 패스 미스가 많아지고, 경기에 따라 패스에서 잔실수를 범한다는 단점은 아직 남아있다.

또 전보다 라인을 잘 맞추고 무작정 뛰쳐나가는 일은 줄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활동 범위가 넓은데다 라인을 비우고 마킹을 하기에 필연적으로 뒷공간 노출의 위험이 수반된다. 그렇기에 옆에서 적절하게 조율하고 공격 전개를 해줄 수 있는 커맨더형 수비수+수비형 미드필더와의 역할 분배가 이뤄져야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김민재에 대해 세밀한 패스나 패스 선택지를 선정하는 과정 등에서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경험 많은 김영권의 약점이던 수비 라인 조절이나 빌드업 능력이 좀 더 발전한 모습을 보면 김민재도 프로 경험을 통해 나아지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국대에서는 기회가 생기면 직접 드리블하며 올라가 경우에 따라서 중앙선까지 넘어가서 패스를 뿌려주는 오버래핑을 자주 시도하는데, 거구에 속도도 빠르고 발 밑도 준수한 데다가 패스 성공률도 높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우며, 아군 입장에서는 침체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요소다.

페네르바체 이적 후에는 통곡의 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대에서 보여주던 드리블을 통한 오버래핑과 정확한 롱패스로 공을 공격진에게 배달하고, 웬만한 윙어보다 빠른 속도로 복귀하거나 공을 가진 선수를 뒤에서 따라잡아서 커팅을 해내는 것은 물론, 기본적인 수비력마저 뛰어나서 사실상 완전체 센터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튀르키예 내에서도 반응이 굉장히 좋고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바이아웃(소속 구단 동의 없이 선수와 직접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최소 이적료)이 낮아서 팬들은 6개월 만에 이적해버리는 게 아니냐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이적 초부터 팀의 핵심선수가 됐다. 특히 튀르키예에서 한 시즌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주간 베스트 수비수에 여러 번 선정될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검증된 실력
저돌적 플레이

튀르키예에서의 활약으로 빅리그에서도 김민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스타드 렌 FC, SSC 나폴리 간의 치열한 영입 경쟁이 펼쳐졌다. 그 외에 PL에서도 여러 팀이 관심이 있다는 소식도 나오는 등 몸값이 크게 상승했다.

SSC 나폴리로 이적한 김민재는 팀을 떠난 레전드 수비수 칼리두 쿨리발리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쿨리발리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프리 시즌과 리그 초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리그 시작 이후 곧바로 이달의 선수상까지 받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쿨리발리의 빈자리를 꽉 채웠다.

현재 이탈리아 현지 언론에서는 김민재가 쿨리발리보다 유벤투스의 레전드 수비수인 키엘리니에 더 가깝다고 평가한다. 풋볼리스트에서도 쿨리발리가 깔끔한 태클에 우아한 드리블을 펼치는 데 비해, 키엘리니는 어깨를 이용한 몸싸움 수비에 능하며 기세 좋게 밀고 올라가는 드리블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에 동의하는 듯한 의견을 냈다.

나폴리가 김민재를 데려가기 위해 전 소속 팀 페네르바체(튀르키예)에 지불한 이적료는 2000만유로(약 286억원)다. 7월 기준 여름 이적 시장에서 나폴리가 선수 영입에 쓴 최고 금액이다.

1년 전 베이징에서 페네르바체로 옮길 당시 이적료(300만유로)에서 6배 이상 가치가 상승했다. 나폴리가 설정한 바이아웃은 여기서 두 배 이상 더 뛴다. 4500만유로(약 591억원)로, 2023년 여름부터 해외 팀으로 이적할 경우 발동된다.

한국 중앙 수비수의 유럽 도전은 김민재 이전에도 있었다. 심재원(2001~2002년, 프랑크푸르트)과 홍정호(2013~2016년, 아우크스부르크)가 각각 당대 월드컵을 앞두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그러나 빅리그 클럽들의 러브콜을 집중적으로 받는 수비수로 성장한 사례는 김민재가 처음이다.

김민재의 가치는 2022 여름 이적 시장에서 확인됐다. 김민재에 대한 빅리그 클럽들의 수요가 늘었다. 관심을 보인 팀명만 나열해도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다. 종착지가 된 나폴리 외에 인터 밀란, 유벤투스, AC 밀란(이상 이탈리아 세리에A), 토트넘, 에버턴(이상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타드 렌, 마르세유(프랑스 리그1) 등이다.

당초 김민재의 행선지로 알려졌던 곳은 렌이다. 베이징 시절 김민재와 함께했던 브루노 제네시오 감독이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뒤늦게 나폴리가 바이아웃에 해당하는 2000만유로를 제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폴리서 역대급 활약 “월드 클래스”
세계적 전·현직 선수들 모두 ‘엄지 척’

나폴리는 칼리두 쿨리발리의 대체자를 확보해야 했다. 지난 시즌까지 나폴리 수비 주축으로 활약하던 쿨리발리는 이번 여름 첼시로 이적했다. “쿨리발리가 떠나면 감독직을 사임하겠다”고 공언했던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이 그 대체자로 김민재를 콕 집어 “나폴리 수준의 선수”라고 언급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나폴리는 2021-2022시즌 세리에A에서 AC 밀란과 함께 최소 실점(38경기 31실점)의 수비력을 유지한 팀이다. 단순히 수비 자원 확보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김민재를 주축 센터백으로 활용하겠다는 심중이 드러난다.

이쯤에서 김민재의 능력을 점검해보자. 축구에서 센터백은 흔히 ‘욕받이’로 통한다. 상대의 자극과 도발이 있어야 반응하는, 태생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라서 그렇다. 시대 불문 센터백의 최고 미덕은 ‘실수 줄이기’로 통하는데 김민재에 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국내 축구인 열이면 열, 동일하게 평가한다. “수비수에게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췄다.” 한국 축구 수비 레전드인 홍명보(울산 감독)도, 이영표(강원 단장)도 같은 목소리다.

국가대표 수비수 출신 오범석 ‘Sky Sports’ 해설위원은 이렇게 평한다. “수비 능력을 모두 갖췄는데, 심지어 그 능력이 다 압도적이다.”

일단 피지컬이 월등하다. 190㎝, 87㎏ 신체조건을 활용한 다툼 능력을 갖고 있다. 제공권 싸움에도 능하다. 키 큰 선수들은 느리다는 통념과 달리 김민재는 발 빠른 수비수다. 볼을 다루는 기술이나 패스의 정확성도 높다. 경기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는 빈틈이 없다.

김민재라는 후방 조율사 덕에 벤투호의 ‘빌드업’ 기조가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큰 강점은 역시 수비 능력이다.

나폴리가 베테랑 쿨리발리의 대체자로 김민재를 낙점한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년 계약과 바이아웃으로 선수의 잠재력을 인정했다. 당장은 나폴리 적응과 세리에A에서의 활약이 우선이지만 길게 보면 선수의 시장가치가 상승할 거라는 기대다.

리그에서의 활약상을 기반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 상위 클래스로 올라서기 수월해진다. 현역 최고 수비수로 평가받는 버질 판 다이크(리버풀)는 셀틱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와 AC 밀란을 상대하며 프리미어리그의 선택을 받았다.

박지성과 이영표도 챔피언스리그에서 통한 덕분에 네덜란드에서 잉글랜드로 무대를 옮겼다. 챔피언스리그 외에 도약을 노릴 수 있는 또 다른 무대가 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이다.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들은 그 입지와 위상이 급격히 달라진다.

압박감 속에서도 무언가를 성취하는 선수들은 팀 전체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손흥민이 그런 선수였고, 이제는 김민재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전설들의
연이은 극찬

파비오 칸나바로 전 광저우 헝다 감독은 지난 8월8일(현지시각) 나폴리 지역 매체 <일마티노>와 인터뷰에서 김민재를 두고 “빠르고 신체조건도 좋다”며 칭찬했다. 칸나바로 전 감독은 나폴리의 전설적 수비수로, 현역 시절 수비수로는 역대 3번째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이탈리아의 축구 영웅이다. 김민재 역시 입단 기자회견에서 칸나바로를 ‘롤모델’로 꼽았다.

한국 선수가 나폴리의 수비를 맡게 되는 생각을 해본 적 있냐는 취재진 질의에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축구는 성장 중이고, 내가 감독 생활을 하던 중국 리그에서도 김민재가 뛰었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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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코로나19 장례비 토사구팽 소송전 후일담

[단독] 코로나19 장례비 토사구팽 소송전 후일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전 세계를 패닉 상태로 만든 감염병이 우리나라를 덮쳤을 때 최전선에서 일한 사람들이 있다. 방진복을 입고 사망자의 유해를 수습해 화장장까지 옮긴 장례지도사들은 감염의 공포를 무릅쓰고 수천 명의 고인을 모셨다. 하지만 대유행의 시기를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은 감염병에 대한 ‘정산’을 끝마치지 못했다.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감염병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대부분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이라는 이름의 감염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20년 1월20일 30대 남성의 감염으로 우리나라에도 상륙했다. 전 세계 덮친 감염병 공포 코로나19는 기침, 재채기 등에서 발생하는 비말(침방울)을 매개 삼아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감염자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이동을 통제했다. 집합시설의 이용 시간이 정해졌고 인원도 제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수는 빠른 속도로 늘었다. 코로나19는 2020년부터 2023년 5월 윤석열정부가 사실상의 엔데믹(풍토병으로 굳어진 감염병) 선언을 할 때까지 3년여 동안 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각계각층은 코로나19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경제는 침체기에 빠졌고 문화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희비가 엇갈렸다. 2020년 4월11일 권준욱 당시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은 정례 브리핑에서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말했다. 권 부본부장의 말처럼 코로나19는 전 세계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경제 회복을 위해 시중에 엄청난 양의 돈이 풀렸다. 영화계, 공연계 등 관객 친화형 문화 콘텐츠는 나락에 빠졌다.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현재, 사회는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로 접어들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바뀐 소비 패턴이나 생활 방식은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오히려 코로나19 시기에 일어난 변화로 드러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사회든 개인이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코로나19라는 ‘암흑기’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코로나19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자와 사망자 수가 최고조에 이르면서 당시 최전선에서 정부와 발맞췄던 장례지도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병원, 집 등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감염자를 화장장으로 옮겨 화장한 후 유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시신 수습·화장장 운구 업무 방진복 입고 2년 동안 일해 코로나19 사망자의 유해는 화장장의 마지막 타임인 오후 6시 이후에 화장됐다. 지자체 등의 의뢰를 받은 장례지도사들은 주말도 없이 매일 같이 약 2년 동안 코로나19 사망자를 운구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방진복을 꼼꼼히 챙겨 입었어도 감염에 대한 공포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 최근 <일요시사> 취재 결과 전국의 장례지도사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A 단체가 서울, 경기, 충청 등의 일부 지자체와 코로나19 사망자 장례비 관련 민사소송을 벌이고 있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회장 B씨에 따르면 아직 소송으로 가지 않은 곳까지 따지면 서른 개가 넘는 지자체가 A 단체에 채무가 있는 상황이다. 2020년 2월 보건복지부는 코로나19 사망자에 대한 신속하고 원활한 시신 처리 및 장례 지원으로 감염 확산을 방지하고 사회 불안 요인을 차단한다는 취지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망자 장례관리 지침>을 내놨다. 화장을 원칙으로 하고 유가족의 동의하에 ‘선 화장, 후 장례’를 진행한다는 게 골자다. 지침에 따르면 의료기관은 코로나19 감염자의 사망이 임박하면 가족에게 알리고 장례식장에 장례지도사가 대기하도록 요청한다. 감염자가 사망하면 중앙사고수습본부와 보건소 등에 상황을 통보한다. 보건소는 장례지도사에게 개인 보호구를 지원하고 사망자가 머물던 장소를 방역·소독한다. 이후 사망자는 화장장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에 장례지도사들이 투입된다. 장례지도사들은 사망자의 유해를 비닐로 감싸고 보디백에 넣은 뒤 관에 담아 화장장으로 운구한다. 감염 위험 때문에 염을 하거나 수의를 입히는 등 통상적인 절차는 할 수 없다. 화장장에 도착해서는 유가족의 동의를 얻은 후 화장한다. 유가족은 유골을 가지고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완전 바뀐 사회 상황 B 회장은 “매일 아침 지자체에서 모셔야 할 고인이 몇 분인지, 어디에서 돌아가셨는지 등의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면 오후 6시 전까지 장례지도사들에게 연락해 고인을 모실 준비를 하는 것”이라며 “어디로 몇 명을 보낼지, 운구차는 어떻게 할지 등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는 셈이다. 이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덥거나 2년 동안 매일 반복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망자가 많은 날에는 하루에 20명도 모셔봤다. 방진복을 챙겨 입었지만 다들 감염될까 무섭지 않았겠나. 그래도 최대한 예우를 다해 한 분, 한 분 잘 보내드리려고 노력했다. 그게 장례지도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그에 따르면 A 단체가 2년여 동안 모신 사망자 수는 수천 여명에 이른다. 그로부터 2년여 뒤 A 단체가 직면한 상황은 법정 공방이다. 단체는 코로나19가 한창 퍼질 무렵 서울시로부터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 처리에 대한 협조 요청을 받았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지침에 따라 시신 수습과 화장장까지의 운구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B 회장은 “서울시의 지침에 따라 사망자를 수습하는 경우 우리 단체의 장례지도사들이 투입됐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부분은 비용이다. 당시 정부는 ‘전파 방지 비용’이라고 해서 코로나19에 감염돼 격리 중이던 환자가 사망해 장례를 치를 경우 감염 예방 및 관리 조치에 소용되는 비용을 300만원 한도로 지원했다. 2022년 6월19일 이전까지 사망자에게 지급된 비용으로, 코로나19 사망자 유가족에게 주던 1000만원가량의 위로금과는 별개였다. 시신 수습, 안치, 입관 등 장례 절차 관련 비용과 관, 보디백 등 장례 물품, 운구 등 기타 전파 방지 관련 비용 등을 300만원 한도 내에서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주먹구구 일 처리 B 회장은 “당시 우리 단체가 먼저 용역을 제공하고 지자체가 질병관리청에 청구해 돈을 받아 다시 우리에게 지급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초과 비용이 문제로 떠올랐다. 그는 “장례 관련 모든 절차를 300만원 한도 내에서 진행해야 했기에 비용 지급 과정에서 우리 단체가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장례 과정에 많은 인력이 동원되다 보니 말 그대로 먼저 (비용을) 청구하는 쪽이 우선이었다. 늦어지면 말 그대로 돈을 못 받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렇게 32개 지자체에서 받지 못한 비용이 4700여만원에 이른다. A 단체가 서울시의 협조 요청을 받아 일을 진행했지만, 전파 방지 비용은 사망자의 주소지 관할 지자체에서 지급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천안시에 주소지를 둔 감염자가 서울의 병원에서 사망하면 서울에서 화장 절차를 진행하지만 비용 지급은 천안시에서 하는 식이다. A 단체는 받지 못한 돈이 큰 지자체를 상대로 ‘용역비’ 지급 명목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 지역 8곳, 경기 1곳, 충청 1곳 등 총 10개 지역 지자체에 2500여만원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나머지 지자체에 대해서는 판결을 근거로 내용증명을 보낸 후 여의치 않으면 소송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A 단체는 “지자체는 이 비용에 관해 질병관리청에 질의한다는 이유 등으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자체와 질병관리청의 관계는 우리 단체와는 별개다. 지자체가 추경 예산을 사용하거나 질병관리청으로부터 교부받는 등의 문제는 우리와 무관하다. 우리가 비용 수령을 포기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지자체는 우리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자체 상대로 초과 비용 달라 법원마다 판결 천차만별 ‘분통’ B 회장이 분통을 터트리는 대목은 또 있었다. 지자체마다 같은 내용으로 소를 제기했는데 법원의 판결이 제멋대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도 법을 공부했다. 아무리 민사소송이라지만 법원 판결이 판사의 재량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오는 게 말이 되는 건가”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실제 A 단체가 제기한 소송은 대부분 ‘화해권고결정’으로 이어졌다. 지자체가 A 단체에 비용의 일부를 지급하고 특정 날짜 이후에는 지연손해금이 붙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떤 지자체는 전액, 어떤 지자체는 반액, 또 다른 지자체는 ‘줄 수 있는 만큼’ 지급하는 방향으로 법정 공방이 마무리됐다. A 단체에 따르면 10개 지자체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중 7건의 판결이 나왔다. 비용 전액을 준 지자체는 두 곳에 불과했고 대부분 절반, 일부 지자체는 1/3 수준의 비용을 지급하는 데 그쳤다. 총 1800여만원을 청구해 1200만원가량을 받은 셈으로 전체 비용의 70% 정도다. B 회장은 “우리 단체가 초과 비용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면 이 돈은 그냥 없어지는 거였다. 지자체 공무원들은 판결이 나온 직후 바로 비용을 지급했다. 거꾸로 말하면 소송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직무유기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방식에도 우려를 표했다. 지침 등 안내서를 주먹구구식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망자 장례 관련 비용 지원> 안내서는 8판까지 나왔다. 그는 “일을 진행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다음 안내서에 그 내용을 포함하는 식이다. 문제는 사안이 다 끝나고 나면 그 안내서도 휴짓조각이 된다는 점이다. 초과 비용 청구 문제도 초기 안내서에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일어나면 그땐 누가? B 회장은 “우리 단체는 메르스(중동호흡기 증후군) 때도 장례 관련 업무를 맡아 일했다. 사망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때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들어 놨다면 이번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요청에 따라 목숨 걸고 일했는데 그 대가가 이것이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지자체마다 받지 못한 돈이 몇십 만원 단위인 곳도 있고 많아야 수백만원 수준인데 민사소송까지 제기한 것은 정부의 태도가 너무 괘씸했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중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단체가 발 벗고 나서겠느냐”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