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줄 타는’ 박범계 민주당 의원 속사정

끈 떨어지고 허둥지둥 헛발질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교체되며, 당내 의원들의 입지도 대부분 달라졌다. 과거 입지를 공고히 해놨던 ‘친문’ 의원들은 본인 자리를 새로운 주류인 ‘친명’계 의원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중에는 현실을 깨닫고 흔쾌히 양보하는 의원들이 있는 반면, 상황이 달라진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욕심을 부리는 의원들도 있다.

아무리 정치가 생물이라지만, 요즘 한국 정치는 심할 정도로 급격히 바뀐다. 한 달 전에 죽일 듯이 싸우던 둘이 어느 날 만나 웃으며 악수하는 일은 예삿일이고, 불과 일주일 전에 당 대표였던 인물이 징계를 받아 하루아침에 당 밖으로 쫓겨나기도 한다. 또 당내 권력 이동에 따라 ‘실세’였던 의원이 비주류로 전락하는 일도 다반사다.

화려한 데뷔
시작된 시련

실세에서 비주류로 전락한 의원이 본인의 위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실세였던 기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그렇다. 비주류가 된 의원이 과거에 ‘쉽게’ 했던 일들이 어려워지는 경우를 여러 차례 겪게 되면, 그제서야 본인의 위치를 깨닫는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은 박범계 의원이 요즘에서야 본인의 위치를 깨달아가는 중이라고 전한다. 과거 친문(친  문재인)계 핵심으로 활동했던 박 의원은 정계 데뷔 후 줄곧 굵직한 활약을 펼쳤다.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그는 판사로 부임해 약 10년간 일했다. 사법연수생 시절 자치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사법연수>라는 잡지의 편집장 자리를 맡기도 했다. 박 의원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정계 데뷔가 이때 정해졌다고들 일컫는다.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초 사법연수생원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뽑힌 노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때의 인터뷰가 박 의원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형편, 평탄치 않았던 사회생활에 박 의원은 동질감을 느꼈고, 이후 노 전 대통령에게 매료돼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을 잊지 않았다.

그 존경심은 2002년 정계 진출로 이어졌다. 2002년 당시 김민석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을 배신하고 정몽준 후보 진영에 합류하자 박 의원은 매우 분개하며 법원에 사표를 제출한 후,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에게 노 전 대통령을 도울 뜻을 전했다.

‘노무현 후보 대선캠프’에 전격적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박범계 정치’의 시작이었다. 이후 2002년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이 기적적으로 승리하며 박 의원도 자연스럽게 승승장구하게 됐다.

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참여정부 초기 민정 제2비서관, 법무비서관 등으로 등용되며 청와대의 알토란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그는 여·야당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약 2년간 청와대에서 일한 박 의원은 여의도 정치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그러나 여의도 입성은 청와대 입성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 나가기 위해 청와대에서 나와 열린우리당 공천 경선에 참여했으나 당시 지역에서 잔뼈가 굵던 고 구논회 전 의원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06년, 구 전 의원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해당 지역구가 공석이 됐다. 이 자리에 박 의원은 다시 공천받고자 했으나 이마저도 금방 포기해야 했다.

여의도 입성 후 승승장구 장관까지 
친문 입지 줄자 덩달아 비주류로

당시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후보를 위해 그가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시련을 겪은 박 의원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통합민주당 인기 부진 등의 이유로 낙선했다.

또 다시 4년이 흐른 2012년, 박 의원은 제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이재선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며 드디어 여의도에 입성하게 된다. 

4수 끝에 여의도 데뷔에 성공한 박 의원은 이후 맹활약하며 ‘역대급 초선 의원’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민주당 법률위원장,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간사 등 굵직한 자리들을 꿰차며 ‘실세’로 거듭나더니, 2014년 배우 송혜교의 탈세 사건을 밝혀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스타덤에 오른 박 의원은 재선이라는 시험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인지도와 인기 면에서 상대당 후보였던 이재선 후보를 크게 압도하고 있었고, 선거에서 15%p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여유 있게 국회에 재입성했다.

이때 그는 친노(친 노무현)에서 친문으로 계파 이동을 완료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친노 인사들이 친문으로 분류되던 흐름에 박 의원 또한 탑승한 것이다.

당시 친문 세력은 친노 세력보다 더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당내에서조차 제대로 입지를 세우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친문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국회 내 의석 수도 크게 증가했는데 민주당은 제20대 총선에서 123석을 차지하며 원내 1당으로 발돋움했다. 당의 영향력이 커지자 ‘실세’인 박 의원의 영향력도 덩달아 커졌다. 박 의원은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모든 의원이 원하는 법사위원회에 들어가 간사 자리를 차지했다.

보통 법사위 간사는 중진 의원들 맡는 중책이었지만, 친문계에서 입지가 두터웠던 박 의원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재선 때 박 의원의 활약은 더 빛이 났다. 태광그룹의 황제 보석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것도, 국정 농단 사태 당시 최고위원으로서 민주당 의원들의 전략을 진두지휘했던 것도 그의 재선 시절이었다.


제7회 지방선거 당시, 당 안팎에서 대전시장 출마설이 돌았지만, 그는 당을 지키겠다며 스스로 출마를 포기했다. 당시 분위기상 충분히 대전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음에도 여의도 정치를 계속 이어나간 것이다.

잊지 못하는
과거의 영광

민주당이 여당으로 바뀐 후인 제21대 총선에 앞서 그는 3선 도전을 선언했다. 이때 박 의원은 단수공천을 받으며 무경선으로 무난하게 3선에 성공했다.

제21대 국회에선 민주당이 원내 1당이자 여당으로 바뀐 만큼, 그가 맡을 수 있는 역할도 늘었다. 국회 전반기부터 박 의원은 조용히 활동하며 민주당 의원들의 활동을 측면해서 지원하다가 문 전 대통령이 검찰개혁에 시동을 걸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측면 공격수로 등장했다.

그는 이른바 추-윤 갈등이 시작됐던 때 국정감사에서 연일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며 그의 실수를 유도했고, 추 전 장관의 입장을 국회 차원에서 전달하며 검찰 조직을 견제했다.

검찰개혁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박 의원은 이후 추 전 장관의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며 직접 칼자루를 쥐었다. 박 의원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 대립각을 세웠다.


갈등은 주로 검찰 인사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초, 박 의원은 검찰인사를 검찰총장 측이 모르게 기습적으로 처리했다. 인사에 앞서 검찰총장과 검사 인사 논의 차 만난 박 의원은 경청하는 자세를 국민들에게 보여줬으나 정작 정기 검찰인사는 검찰총장 측을 건너뛰었다.

사실상 검찰총장을 패싱하고 문정부에 유리한 검찰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이성윤·심재철 등 ‘추미애 라인’이라고 불리는 인사는 모두 살아남았고, 이들은 인사 후 자연스레 ‘박범계 라인’이 됐다.

그는 인사 단행 후 처음으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며 ‘한명숙 구하기’에 뛰어들었다. 그가 한명숙 전 총리 불법 정치자금 수수사건에 관련한 의혹에 대해 대검 부장회의서 심의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 검찰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박범계표 한명숙 구하기’는 수포로 돌아갔다. 박 의원은 임기 내내 문정부의 검찰개혁 의지를 이어나가려 애쓰다가 올해 5월 퇴임해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이처럼 박 의원은 여의도 데뷔 이래 꾸준히 정치력을 늘려나갔고 친노·친문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으면서 승승장구했다. 12년 동안 굵직한 일들을 밝혀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권력의 요직에 서며 국정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지난 3월 20대 대선에서 정권이 국민의힘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거대 여당 의원이었던 박 의원은 이제 야당 의원이 됐다. 바뀐 것은 정권만이 아니다. 그의 영향력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뛰었던 이재명 대표가 당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친문서
친명으로

지난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이 대표는 친문계 후보로 나왔던 이낙연 전 총리를 큰 표차로 따돌리며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발돋움했다. 이때부터 민주당 내부의 분위기는 과거와 매우 달라졌다. 친노·친문이 주류를 차지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신흥 세력인 ‘친명계’와 젊은 의원들이 민주당의 주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대선에서 윤 대통령에게 패배했음에도 이 기류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친명계가 더 공고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당 내부 투표 결과가 그 기류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 투표는 대선 직후 치러진 민주당 원내대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는 친명계 박홍근 의원이 당선됐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박 원내대표가 친문계 박광온 의원을 제치고 당선되자 내부 분위기가 친명쪽으로 확실히 넘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대선 패배의 책임을 후보 본인에게 있다기보다 문재인정권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전당대회까지 영향을 미쳤다. 전당대회에서 이 대표는 70%가 넘는 득표를 하며 당선됐고 선출직 최고위원 대부분은 친명계가 밀었던 인물들로 당선됐다. 친명계가 민주당을 완전히 장악한 셈이다.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자 친노·친문계였던 인물들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다. 당초 이낙연 후보를 밀었던 강성 친문계 의원들은 당내에서 입지를 전혀 세우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주류가 비주류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비주류가 된 의원들 사이에는 박 의원도 포함돼있었다. 친문 핵심으로 활동한 세월이 긴 박 의원이 최근 이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에 지속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지만, 당 내부에선 이미 그가 ‘끈 떨어진’ 상태로 평가하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박 의원과 친명계 사이는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면서도 “그러나 전 정권에 몸담았던 인물인 만큼 이쪽(친명계) 사람들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이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그가 만든 논란들이 그래서 아닐까 싶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국회로 돌아온 박 의원이 장관 임명 전의 국회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고 함께 전했다. 박 의원이 당내 권력, 더 나아가 다음 총선에서의 입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한동훈 스타 만들기 일등공신? 
감사원 앞 1인 시위 중 굴욕도

그런 걱정 때문일까. 박 의원은 요즘 과거에 하지 않았던 ‘헛발질’을 매일 하는 중이다. 이것이 관계자가 말한 ‘논란’이다.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헛발질은 지난 7월 있었던 한동훈 장관과의 설전이다. 박 의원은 법사위원으로서 국회 대정부질문에 법무부 장관에게 질의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박 의원은 과한 흥분을 여과 없이 나타내며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대중과 언론은 그의 흥분된 어투를 차분히 받아치는 한 장관을 높이 평가하며 한 장관의 손을 들어줬다.

박 의원은 한 장관에게 “이완규 법제처장에게 검수를 받았느냐”며 “한 장관 마음에 들면 검증하지 않고 한 장관 마음에 안들면 검증하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한 장관은 “과거 박 의원께서 근무했던 민정수석실에선 어떤 근거로 검증했느냐”며 “이 업무는 새로 생긴 업무가 아니라 과거 민정수석실에서 해오던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본인의 인사검증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면 문재인정부의 인사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며 역공을 펼친 것이다. 해당 발언이 나오자 여당 의원들 중심으로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박 의원은 흥분해 “틀린 말이고 거짓말”이라고 소리쳤다.

이날 대정부질문은 한 장관의 역량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됐고, 박 의원은 여당의 차기 대권후보를 다시 한번 도와줬다는 당내 비판을 들어야 했다.

헛발질은 최근에도 계속됐다. 박 의원은 최근 감사원이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서면조사를 실시하자 이에 반발해 지속적으로 감사원을 비판했다.

그는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이렇게 예의 없이 바로 시작한다는 게 맞지 않다는 것”이라며 “강제 조사할 근거가 없는데 그렇게 할 만큼 하신 분들이 왜 자꾸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직격했다.

문제는 그가 1인 시위를 단행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본인의 입장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감사원 앞으로 나가 직접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현장에 해당 사건의 ‘서해 피살 공무원’ 가족인 이래진씨가 함께 등장해 소란이 일었다. 

이씨는 박 의원을 향해 “당신들. 국가가 공무원이 적대 국가에 무참히 총살당하고 살해당했을 때 뭐했어?”라며 시위 피켓을 빼앗아들었다. 당황한 박 의원은 몇 차례 언쟁을 주고받다 분위기가 급격히 격앙되자 서둘러 자리를 뜬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사건을 두고 박 의원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유족들이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는데도, 현직 의원이 이 시점에 1인 시위에 나가는 것은 도의상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빗발친 것이다.

당내 입지도
휘청휘청∼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 어떤 영광을 누렸든 정치인은 미래를 그려나가야만 한다. 최근 이 대표에 대한 검찰수사를 강하게 비판하며 ‘반전’을 도모하는 노력을 하는 중이지만 쉽지 않아보인다. 그가 헛발질을 반복한다면 그에 대한 당 내부의 시각도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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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