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그라운드 떠나는 ‘조선 4번타자’ 이대호

‘홈런 쾅! 쾅!’
세계기록 보유도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영원할 것 같았던 ‘조선의 4번 타자’ 선수 생활에도 끝이 다가왔다. 20년 넘게 프로야구 무대를 누빈 이대호는 ‘박수 칠 때 떠나는’ 길을 택했다. 그는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유일하게 이뤄보지 못한 꿈,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 불씨를 살리려 구슬땀을 흘린다. 

스타 플레이어에겐 수많은 별명이 붙는다. 이대호 역시 많은 별명을 가졌지만 ‘조선의 4번 타자’만큼 이대호를 잘 설명하는 별명은 없다. 그는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KBO(한국야구위원회)리그와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로 군림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이대호의 타고난 신체조건과 출중한 기량을 보면 그가 탄탄대로의 엘리트 야구인 코스를 밟았을 것으로 넘겨짚기 쉽다. 하지만 이대호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야구를 접한 선수는 손에 꼽는다. 그는 형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가했다. 할머니는 시장 좌판에서 김치와 된장 등을 팔며 형제를 어렵게 키웠다. 

이대호가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건 지금도 절친한 추신수(SSG 랜더스)의 손에 이끌려서다. 롯데 박정태 코치(당시 선수)의 조카인 추신수는 야구를 하기 위해 부산 수영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그때부터 유난히 덩치가 컸던 이대호는 추신수 눈에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추신수는 감독에게 이대호를 추천했고, 이대호에겐 같이 야구하자고 설득했다.

당시 부산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야구란 종교와 같았다. 하지만 이대호는 ‘스카우트’ 제의에도 선뜻 야구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매달 몇 십만원에 달하는 회비는 곤궁했던 그에게 ‘오를 수 없는 나무’와 같았다.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대호는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야구가 이대호의 운명이었다. 그의 삼촌들은 고민 끝에 그가 야구를 할 수 있게 힘을 합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이대호는 천신만고 끝에 야구계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은 여전했고, 지원은 넉넉지 못했다. 이대호는 자신을 스카우트한 중학교 감독의 집에서 2년 반 동안 더부살이하며 야구 경력을 이어갔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대호는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 결과 부산 지역의 ‘야구 명문’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대호를 야구계로 이끈 추신수는 라이벌 학교인 부산고등학교로 향했다. 이대호와 추신수는 고교 시절 촉망받는 투수로 발돋움했다. 

이대호는 하루빨리 프로야구에 입성해 할머니를 호강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구슬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대호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할머니가 고등학생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할머니에게 제대로 된 효도를 하지 못한 게 영원한 한으로 남았다”고 자주 언급한다.

이대호의 뒷바라지는 일찍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형이 이어받았다.


이대호는 추신수·정근우·김태균 등과 함께 2000년 애드먼턴에서 열린 U-18 야구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이끈 주역이 됐다. 당초 지역 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재회할 것이 유력했던 이대호와 추신수는 또 다른 갈림길에 섰다.

추신수가 롯데 자이언츠의 1차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체결하면서다.

어려운 가정환경 딛고 국대 야구 선수로
타고난 신체조건과 유연한 동작으로 평정

반면 이대호는 추신수에 이어 롯데 자이언츠의 2차 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입단 직후 어깨 부상을 당한 이대호는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우용득 2군 감독이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자 전향을 추진했다. 

입단 첫해 이대호는 타자 전향 훈련을 받으며 2군에 주로 머물렀다. 그러다 시즌 막바지 용병 펠릭스 호세의 출장 정지 처분을 계기로 1군 무대를 밟았다. 이대호는 입단 첫해인 2001년 1군 6경기에 출장해 8타수 4안타 1타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2002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군 감독으로 승격한 우용득이 이대호를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롯데 전력이 비교적 약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1군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에게 4번 타자를 맡긴다는 상황 자체가 이대호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대호는 개막전부터 4번 타자 출전했다. 시즌 개막 후 한 달간 홈런은 1개에 그쳤지만, 타율은 3할대 중반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신인들이 으레 그렇듯, 이대호는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며 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2군행을 통보받았다.

그러던 중 이대호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다. 후임 백인천 감독은 “이대호가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이를 위해 백 감독은 이대호에게 쪼그려 뛰기와 오리걸음 훈련을 지시했다.

거구인 이대호가 무릎 부상에 시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이대호는 무릎 부상 때문에 2002년과 2003년 시즌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은 양상문 감독이 취임한 2004년부터다. 이대호는 이때부터 전 시즌 주전을 꿰차고 성장세를 그렸다. 이때 이대호는 타율은 낮아도 높은 파괴력을 자랑했다. 2004년 2할4푼8리 20홈런 68타점을, 2005년엔 2할6푼6리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조금씩 가능성을 보였다.

문제는 병살타가 너무 많아 항상 의문부호가 따라붙었다는 점이다.

만개한 기량
압도적 성적


하지만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타자 장효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2004년 한 기자와의 대화에서 이대호의 성공을 일찌감치 확신했다. 장효조는 이대호가 194cm라는 거구임에도 뛰어난 유연성을 가졌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는 “(이대호가) 머지않아 터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장효조의 말대로 이대호의 기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개했다. 2006년 이대호는 타율, 타점, 홈런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4년 이만수(삼성 라이온즈)가 기록한 이후 22년 만의 트리플 크라운이었다. 이대호는 이를 통해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우뚝 섰다. 

이대호는 2007년 1루수 골든글러브 2연패,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등의 기록을 남기며 국내외에서 맹활약했다. 이후 2010년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대호의 2010년은 역대 모든 타자들의 이력 중에서도 손꼽히는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이대호는 그해 도루를 제외한 모든 타자 기록 1위 자리를 휩쓸며 사상 최초의 타격 7관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여전히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대호는 시즌 MVP까지 수상하면서 시상식에서 상 8개를 독식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아울러 9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면서 이 부문 세계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 시즌 이대호가 기록한 홈런 수는 총 44개. 종전 롯데의 팀 최고기록 37개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국내 리그를 평정한 이대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본 프로야구(NPB) 오릭스 버펄로스 유니폼을 입은 이대호는 정규 시즌 144경기에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했다. 그는 91타점과 24홈런을 만들어내며 각 부문 1·2위에 올랐다. 


이후 오릭스에서 2년간 뛴 이대호는 2014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해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대호는 우승 반지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 시리즈 MVP 선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16년 이대호는 소프트뱅크의 파격적인 제안을 뒤로한 채 또 다른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연봉과 출전 보장 등의 조건을 크게 낮추면서, 정말 꿈 하나만 바라보고 감행한 모험이었다.

그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고정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14홈런과 49타점을 생산했다. 

2017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대호는 어느덧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노장이 돼있었다. 복귀 후 잠시 부침을 겪으며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결국 2017년과 2018년 모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가장 큰 부침은 2019년 찾아왔다.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는 15년 만에 최하위를 기록했고, 개인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그나마 개인 통산 300홈런을 달성한 것을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었다. 

이대호는 2020년과 지난해 시즌을 거치면서 4번 타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한결 덜어낸 셈이다. 타율은 3할을 살짝 밑도는 등 기대치는 채웠지만 특출나진 않았다. 김태균‧정근우 등 오랜 시간 함께 뛰어온 동갑내기 선수는 하나둘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이대호도 지난해 시즌이 끝나고 은퇴 시기를 공식적으로 못 박았다. 2년 계약이 끝나는 올해가 이대호의 마지막 시즌이다. 그 사이 유한준‧이성우 등이 은퇴하면서 이대호는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됐다. 처음 ‘은퇴 투어’가 논의됐을 때는 리그 안팎의 상황이 좋지 못해 이견이 갈렸다.

헤어질 결심
뜨거운 안녕

이에 부담을 느낀 이대호 본인도 고사하면서 무산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이후 10개 구단의 논의 끝에, 그의 공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은퇴 투어 시행이 확정됐다. ‘국민타자’ 이승엽에 이은 두 번째 공식 은퇴 투어다. 등번호 ‘10번’의 영구결번도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다. 현재 롯데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은 대투수 최동원의 ‘11번’ 뿐이다.

이대호는 지난 3월 자신의 마지막 KBO 미디어데이에 참석해 “마지막 전지훈련과 시범경기가 모두 끝났다. 후배들에게 마지막 시범경기라고 얘기했는데, 뭔가 울컥하는 게 있었다”고 심경을 전했다. 아울러 ‘친구’인 추신수와 오승환(삼성 라이온즈)을 두고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기 때문에 오래 더 좋은 성적을 가지고 그라운드에서 뛰었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다.

이들은 모두 1982년생 동갑이지만, 이 중 이대호가 가장 생일이 빨라 최고령 타이틀을 떠맡았다.

추신수는 “대호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자라면서 많은 시련을 겪으며 이 자리까지 왔다. 부산에서 야구대회를 하면서 라이벌로 성장해오면서 (대호가)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국까지 가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아직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나도 겪어야 할 일이다. 당장 내년, 내후년이 될 수도 있다”며 “이렇게 박수를 받고 떠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야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떠나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대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은퇴를 앞뒀다는 사실이 무색하도록 연일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팬과 리그에 전하는 마지막 ‘뜨거운 안녕’이다.

불혹을 넘긴 이대호는 롯데가 치른 경기 대부분에 나섰다. 그가 결장한 경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타율 3할3푼3리, 18홈런 83타점 46득점 152안타 등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앞선 몇 년간의 시즌보다도 높은 성적이다.

베테랑의 투혼은 리그 전체 타격 지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타율 3위, 홈런 8위이고, 타점과 안타 각각 7위와 4위에 올라있다(지난 6일 기준). 또, 장타율과 출루율을 합친 OPS 역시 7위를 기록 중이다.

그와 경쟁을 중인 선수 면면을 살펴보면 이대호의 위상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신할 수 있다. 리그를 통틀어 타율에서 이대호보다 앞선 선수는 외국인 용병 호세 피렐라(삼성 라이온즈)와 이정후(키움 히어로즈)뿐이다. 여타 기록에선 박병호(kt 위즈)와 김현수(LG 트윈스) 나성범(기아 타이거즈) 김혜성(키움 히어로즈) 등과 경쟁 중이다.

‘박수 칠 때 떠난다’ 현역 생활 마무리
‘이대호는 이대호다’ 마지막 목표 우승

이대호는 적게는 3살부터 많게는 16살까지 차이나는 후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다.

팀 내부적으로도 도드라지는 지표다.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 타격 지표에서 도루를 제외한 사실상 모든 부분을 이끌고 있다. 현재 이대호는 롯데 자이언츠 안에서 타율 2위, 홈런 1위, 타점 1위, 득점 4위, 안타 1위, 장타율 2위, 출루율 2위, OPS 2위를 기록 중이다. 

올 시즌 후반기 영입돼 표본이 적은 잭 렉스를 빼고 보면 이대호는 타율과 장타율, 출루율, OPS 등에서도 사실상 선두다. 은퇴가 목전인 선수가 무려 6개 부문에서 팀 내 1위를 싹쓸이하고 있는 셈이다.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은 마지막까지 이대호 몫이었다. 이대호는 지난 7월1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10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소진하기도 전에 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당당히 우승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이번 우승으로 이대호는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특히 3번 우승한 선수는 더러 있어도,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에 모두 우승해본 선수는 이대호가 유일하다.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이대호. 그만큼 은퇴에 대한 아쉬움은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대호가 은퇴를 번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미 은퇴 투어를 진행하며 전국을 돌고 있는 데다, 지속적으로 은퇴를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이대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지난해까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올해에는 야구에 재미를 붙였다. 내가 TV에 나오면 좋아하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나보고 ‘아빠, 야구 더 해’라고 한다. 작년에 이랬으면 올해 은퇴를 안 했을 것 같은데 남자가 한 번 말을 뱉으면 지켜야지 않나”라고 난감한 표정과 함께 농을 던졌다.

타들어 가는 롯데 팬들의 마음과는 반대로, 이대호의 은퇴 투어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마음을 비운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욕심이란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롯데는 6위에 올라 있다(지난 6일 기준). 가을야구 마지노선인 5위 자리의 기아 타이거즈와는 네 경기 차이다. 우승까지 갈 길은 멀지만, 가을야구라도 할 수 있다면 나름의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이 역시 잔여 경기 수를 감안하면 쉽진 않겠지만, 아직 포기할 수준은 아니다.

끝까지
최선을

특히 최근 기아가 3연패 수렁에 빠지면서 롯데가 순위 공략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이대호 역시 “시즌 초반에 많이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열심히 이기고 있다. 나도 선수들도 포기하지 않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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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6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서영교 의원을 누르고 22대 더불어민주당 2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김 원내대표는 내란 종식과 헌정 질서 회복, 권력기관 개혁을 외쳤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청래 신임 당 대표가 선출됐다. 이재명정부 첫 여당 지도부가 제모습을 갖추면서 안정 궤도에 접어드는 듯했다. 약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정청래 대표의 첫 갈등이 불거졌다. 정 대표가 지난 9월11일 여야 원내 지도부가 합의한 3대 특검법 합의안에 대해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고, 지도부 뜻과 달라 재협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다. 불안불안 이인삼각 특검법 개정안의 핵심인 기간 연장을 제외한 채 합의해 특검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게 정 대표의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곧바로 반박했다. 원내 지도부와의 긴급회의를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취재진을 향해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그래!”라며 소리쳤다. 이후 당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지자 김 원내대표는 오히려 취재진을 향해 “왜 자꾸 합의라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는 “(합의가 아니라) 1차로 논의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며 “수사 기간과 규모에 다른 의견에 있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제 총론만 (발표)하고 나갔는데 원내수석들이 각론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마치 합의가 된 것처럼 보도됐다”며 합의문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사흘 만인 13일 봉합됐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의 SNS에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 내란 종식과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이렇게 냉전은 끝났지만 지지층의 비난은 거셌다. 김 원내대표를 향해 ‘수박’ ‘변절자’ 등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당 대표를 지냈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행보와 비교하는가 하면 ‘역시 서영교 의원을 뽑아야 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지지층의 미묘한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검사 징계안을 놓고 두 번째 갈등이 터졌다. 법사위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장 18명을 고발한다고 밝힌 데 대해 “협의가 없었다”고 선을 그으면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지난달 19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무소속 등 범여권 의원들은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검사장 18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당 간사인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조직 기강과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검사장 18명의 집단 항명 행위에 대해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당심’이 뽑은 정, ‘의심’이 뽑은 김 연일 삐거덕…벌써 이재명 리더십 부재? 김 원내대표는 고발 소식이 알려진 뒤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봤다”며 “그렇게 민감한 것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해야 한다. 협의를 좀 해야 했다”고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 “뒷감당은 거기서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발장을 제출한 법사위 쪽에 책임을 물었다. 법사위의 검사장 고발은 원내 지도부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용민 의원은 검사장 고발 문제에 대해 “당의 기조와 흐름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고발장을 그날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뿐, (원내 지도부와) 소통이 없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원내(지도부)와 소통할 때 이 문제를 법사위는 고발할 예정이라는 걸 얘기했다”며 “원내가 많은 사안을 다루다 보니까 (고발 문제를) 진지하게 듣거나 기억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일이라면 원내대표는 말 그대로 원내 상황을 조율하고 총괄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으니 (민주당) 의원들도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조금씩 노출되면서 지지층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과 원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민주당의 배경에는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의 선출 방식이 거론된다. 강경 지지층이 밀어 올린 정 대표와 달리 김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당시 원내에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수 포진했던 만큼 김 원내대표 의중은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에 가깝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개혁을 외치는 정 대표의 지지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강성 지지층에게 김 원내대표는 이미 ‘투아웃’이다. 여기에 정 대표의 공약이었던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 반영 비율을 ‘1대 1’로 변경하는 당헌·당규 개정이 부결되면서 지지층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밑서 치솟고 위서 누르고 그동안 민주당은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규정해 왔다. ‘동등한 1인1표제’는 정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정책 중 하나로 “나라의 선거에서 국민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하듯 당의 선거에서도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 두 사람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정 대표 쪽에선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때부터 추진됐던 개혁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 ‘시기’와 ‘방법’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권리당원의 힘으로 대표직에 오른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1인1표제를 추진하자 친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와 일부 당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1인1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최고위원은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절차의 정당성·민주성 확보, 그리고 취약 지역(영남 등)에 대한 전략적 규제와 과소 대표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친명계인 윤종군 의원도 SNS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 방향에 동의한다”면서도 “전 지역 권리당원 표를 1인1표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TK(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당원 자긍심 저하, 당세 확장 장애 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과 관련해서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 대표는 당 컨트롤이 안 되고, 원내대표는 의원들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난 지도부(이재명 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가 워낙 합이 좋았고 당 대표 리더십도 강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중심축이 없으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반 발자국만 앞서도 자기 정치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정 대표의 1인1표제는 중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일 치러진 투표 결과 중앙위원 총 593명 중 373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77표, 반대 102표로 과반이 찬성하지 않아 부결된 것이다. 남은 고비 얼마나? 원내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인 ‘정청래발 개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의 고충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조차 몇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 대표는 ‘개혁 골든 타임’을 필두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그런 김 원내대표가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을 못 박으면서 ‘쓰리아웃’은 겨우 면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내란전담재판부는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치한다”며 “여기에 대해 더는 설왕설래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 제한’ 조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내란 사범이 사면돼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적극 관철하겠다”며 “내란 사범을 사면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만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 내란 주요 피의자에 대한 내란죄가 확정될 경우 사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로부터 약 일주일 뒤인 지난 4일 범여권의 주도로 ‘내란전담재판부(내란특별재판부)’ 설치법이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는 해당 법안을 이달 중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며 속도를 냈다. 해당 재판부는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내란 사건 전담을 골자로 한다.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및 영장전담법관 추천위원회는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법무부 장관과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총 9명으로 구성된다. 내란전담재판부로 성난 지지층 달래도… 위헌 폭탄 껴안고 걸어가는 ‘불’꽃길 구성을 마친 추천위원회는 2주 안에 영장전담법관과 전담재판부를 맡을 판사 후보자를 각각 정원의 2배수로 추천해야 하며 최종 임명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구속기간은 최대 6개월이지만 특별법에서는 내란·외환 관련 범죄에 대해 구속기간을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힘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한마디로 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 쓰겠다는 ‘지귀연 판사 바꾸자는 법’”이라며 “사법부의 무작위 배당 원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미 재판하는 사건도 뺏어서 다른 판사한테 맡기겠다는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날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역시 “1987년 헌법 아래 누렸던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법에 여러 가지 위헌 요소가 있다”고 반대했다. 천 처장은 “헌법재판소가 결국 이 법안에 대해 위헌 심판을 맡게 될 텐데 헌재소장이 추천권에 관여한다면 심판이 선수 역할을 하게 돼 룰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며 “헌법재판소장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위헌심판)을 맡을 수 없게 된다면 ‘내란특별헌법재판부’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이 예정하고 있는 바”라고 설명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으로 개혁 동력을 얻었지만 후폭풍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헌 가능성을 지닌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건 위험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원내대표로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중도층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출신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민주당은 집단 의존 증상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만 대거 유입되다 보니 여당이 된 지금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라며 “2차 종합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내란전담재판부를 어떻게 꾸릴 것인지,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서 국민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종합적인 전략을 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175석 버거웠나 그러면서 “내란전담재판부가 설치되면 국민의힘이 위헌을 걸 것이고, 법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려면 민심을 우리 편으로 끌고 와야 하는, 법률 싸움이 아닌 고도의 민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팀’ 원내대표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때아닌 ‘내 편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 문진석 당 원내운영 수석 부대표가 인사청탁 의혹에 휩싸였지만 ‘엄중 경고’에 그치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2일 문 수석이 본회의장에서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문자로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내가 추천하면 강훈식 실장이 반대할 거니까 아우가 추천해줘”라고 보냈고, 이에 김 비서관이 “제가 (강)훈식이 형이랑 (김)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인사 청탁 논란이 불거지자 문 수석은 “부적절한 처신에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의힘은 ‘김현지 실세’ 프레임을 다시 띄우며 이재명정부를 압박했다. 김 원내대표의 엄중 경고로 논란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강성 지지층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며 더 강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