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억울하게 희생된 '인혁당 8인'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09.18 13: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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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지났지만…그들은 눈을 감지 못했다

[일요시사=김민석 기자] '인혁당 사건'을 두고 박근혜 후보가 적절치 못한 발언을 해 온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빌미를 잡은 민주통합당은 총공세를 펼치고, 새누리당은 우왕좌왕 맥을 못 추고 있다. 정작 박 후보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일언반구 사과 한마디 없이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고 싶단다. 인혁당 사건은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이토록 후폭풍이 큰 걸까. 그리고 '인혁당 희생자 8인'은 도대체 무슨 죄목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걸까.

지난 10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5·16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데 이어 지난 12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인혁당 사건'을 두고 "대법원에서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같은 대답을 반복해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인혁당 사건의 당사자인 유인태 의원이 앞장서며 총공세를 폈다. 유 의원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개라니,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이 있을 수 있나"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박 후보는 아직도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아버지의 유신도 잘한 일이고,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사형 집행한 것도 잘했다고 하는 인식이 내면에 깔린 것 아니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유신체제도 잘한 일
사법살인도 잘한 일

민주당 지도부도 일제히 박 후보의 인혁당 발언을 문제 삼았다. 이해찬 대표는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한 조사 결과를 내놓았을 때, 당시 박 후보는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말했다며 "이런 역사인식을 갖고 감히 대통령이 되려고 하냐"며 힐난했다. 이종걸 최고위원도 "사법살인이 자행될 때 박 후보는 퍼스트레이디의 직무를 수행했다"며 꼬집었다.

반면 새누리당은 박 후보의 발언을 놓고 두 가지 반응을 표출했다.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박 후보를 감싸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 것. 또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두고 사과했지만 정작 박 후보 측은 사과한 적이 없다고 밝히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12일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박 후보는 유신체제의 그늘 속에 있었기에 역사 관련 발언이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친박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는데 대선캠프 한 관계자는 "5·16은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유신과 인혁당 사건은 논란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역사인식 논란에 휩싸인 당시 '퍼스트레이디'
유신 "역사적 판단에" 인혁당 "판결 두 가지"

반면 박 후보의 발언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이한구 원내대표는 오찬간담회에서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민생 때문에 난리인데"라고 말한 데 이어 "딴지를 걸려고 하는 것까진 좋은데 정정당당하게 해야지"라고 말해, 대선후보의 법과 역사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딴죽'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건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박 후보의 말 몇 마디에 이리도 큰 후폭풍이 불게 된 걸까?
문제가 된 제2차 인혁당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72년 12월 유신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973년 10월 항쟁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됐다.

1974년 4월3일 저녁,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감히 딴지를…
배가 불렀구먼!

4월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발표에서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024명이 체포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되었다.


1974년 7월1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부는 군 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고 1975년 4월8일 상고를 기각한 채 판결을 확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8명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해 버린 것. 그 외에도 복역 중 사망한 장석구,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전재권, 유진곤 등 많은 사람들이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2005년 12월에 이르러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여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시국사건 사상 최대의 배상액수인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형수 8인은 무슨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걸까?

오늘날 인혁당 희생자 8인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인혁당 사형수 8인이 수감돼 사형될 때까지 바로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이었던 전병용씨가 기록을 남겨 두어 인용하고자 한다. 전병용 교도관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성을 폭로하면서 세상을 뒤흔들었던 김지하 시인의 '고행...1974'라는 글을 감옥 밖으로 빼내기도 했다.

고문, 날조… 확정 판결 다음 날 새벽 사형 집행
박정희 정권 유지용…국가가 국민 죽인 사법살인

1975년 4월9일의 희생당한 8인의 이름과 신상은 다음과 같다.

▲서도원 : 1923년 경남 창녕 생,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

하재완 : 1932년 경남 창녕 생, 건축업, 중사 제대, 경북민족자주통일협의회 참가.

도예종 : 1924년 경북 경주 생, 삼화토건 회장, 대구대경제학과 졸,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

이수병 : 1937년 경남 의령 생, 삼락일어학원 강사, 경희대경제학과 졸, 민족통일연맹 위원장, 민족일보 기자.

김용원 : 1935년 경남 함안 생, 경기여고 교사, 서울대물리학과 졸, 민족통일연맹 참가.


우홍선 : 1930년 경남 울산 생,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이사, 육군 대위 예편,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송상진 : 1928년 경북 대구 생, 양봉업, 대구대경제학과 졸,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사무국장.

여정남 : 1944년 경북 대구 생, 경북대 학생회장, 경북대정치외교학과 졸, 3선개헌·유신헌법 반대투쟁.

당시 이들을 사형으로 몰아갔던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인혁당 중심인물인 서도원, 도예종 등은 경북대 졸업생 고 여정남에게 폭력에 의한 전부 전복을 선동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전국 대학생 조직 '민청학련'을 결성토록 지령을 내렸다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재판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는 모두 날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2003년 의문사위원회 2005년 국정원 진실위에 의해 인혁당 사건 공작의 전모가 밝혀졌고 2007년 인혁당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당시 국정원 진실위는 인혁당에 대해 '유신체제 등장을 전후해 정세인식과 통일운동에 대해 토론하는 서클 수준'으로 판단했다.

전기고문, 조서날조
…이유 없는 사형


재판 당시 경북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 이강철씨는 법정에서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다"라고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증언했으며 도예종씨는 상고이유서에서 "4월20일에서 25일까지 철야조사를 받았고 검사에게 중앙정보부 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면 즉시 중앙정보부로 또 불려 가 고문을 당하며 조서를 다시 작성했다"고 말했다.

고 하재완씨는 상고이유서와 항소이유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됐으며 폐농양이 생겨 취조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가 작성됐다"고 기술했고 고 김용원씨도 "중앙정보부에서 수사관들이 미리 진술서를 가지고 와 베껴 쓰라고 해 거부했더니 몽둥이질을 했다"고 말했다.  

고 우홍선씨는 재판장에서 "고문을 할 때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두 번만 더 (전기고문을)돌리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고 말했고 전창일씨는 "며칠간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수사관이 5, 6명씩 번갈아 드나들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온몸을 쥐어짜는 전기고문을 하여 몇 번씩 실신케 하였으며, 검찰에 넘어와서도 나는 무죄라고 주장하니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전기고문을 가했다"고 진술했다.

고문뿐만 아니라 공판조서를 날조해서 작성하기도 했다. 고 이수병씨의 공판조서 중 408쪽을 보면 "피고인 등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분명히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판기록에는 "네,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통일적 조직을 하여 대정부 투쟁에 합의하고, 4인 지도부를 조직 구성하여 활동상황을 조정하였습니다"로 되어있다. 또 "피고인 등 4인 지도부 정기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 10시로 정하고 지도위원에 도예종, 서도원을 추대하였다는데 사실인가"에 대하여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진술했는데, "네,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되어있는 것. 또 고 도예종씨가 "조국이 하루빨리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고 최후진술(유언)을 남긴 것을 두고 국정원 진실위는 최후진술조차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내 남편, 내 아들,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
빨갱이 가족으로 살아온 유족들의 피눈물

이처럼 고문으로 얻은 진술과 날조된 조서를 근거로 재판이 진행된 것이다. 이에 고 이수병씨는 사형 집행 직전 교수대 앞에서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라고 외쳤다.

다른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 역시 왜 자신이 사형당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최후진술을 해야 했다. 최후진술에서 유진곤씨는 "나는 80년대 수출목표를 달성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 젊은 기업인의 장래를 막지 마라"라고 말했고 김한덕씨는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있다면 연행되기 전날 유진곤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행되기 전 희생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물론 4·19 직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혁신계 조직인 민족민주청년동맹, 민족통일학생연맹 등과 진보적 색채의 신문이었던 '민족일보' 등에서 활약했던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고 이수병씨의 경우 4·19 당시 경희대 민족통일연맹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논문 '만적론'의 필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5·16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1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했다.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연관시키기 위한 중간다리로 끼워 넣은 고 여정남씨도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6·3 사태 당시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고 김용원씨의 경우 단지 이수병씨의 친구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로서 정치적 이유보다는 이수병씨가 고등학교 동창이었기에 여러 차례 돈을 빌려줬고 모임에도 몇차례 참가했다. 그런데 이것이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직자금으로 둔갑한 것이다.

희생자 8인 유족들
시체 확인도 못 해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75년 4월9일 아침, 서대문구치소 앞은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희생자의 가족들에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 당시 신부의 옷깃을 부여잡고 "신부님 안 죽을거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하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이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가족의 시체마저 찾지 못했다. 시체는 벽제화장터(현 서울시립 승화원)로 강제로 이송되더니 유족들의 마지막 확인도 없이 화장돼 버렸다. 그일 이후 유족들은 재심 무죄판결이 나오기까지 빨갱이의 아내이자 자식들이라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평생을 숨죽이고 살아왔다.

2012년 9월 박 후보의 짧은 생각에서 나온 몇 마디 발언은 희생자 유족들이 1975년 구치소 앞에서 외쳤던 37년 전 구호를 다시 외치게 만들고 있다. "내 남편, 내 아들 살려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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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