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1년' 국가수사본부의 초라한 성적표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2.01.03 12:53:51
  • 호수 13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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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만 터는 ‘한국형 FBI’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국가수사본부가 출범한지 벌써 1년이 됐다. 경찰개혁의 일환으로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기대했다. 1년이 지났지만 국민이 체감할만한 뚜렷한 성과는 없다.

검경 수사권 조정의 일환으로 국가수사본부(이하 국수본)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다. 국수본은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길 기대했지만 굵직한 사건을 총괄하는 데 결과가 미흡했다는 평가가 많다.

뚜렷한 
성과 없다

남구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국수본 출범 1년을 맞아 지난해 성과를 되짚고 2022년 계획을 설명했다. 이날 남 본부장은 “2년 차에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올 한 해 새롭게 출범한 국수본이 책임 수사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총력을 다했다”면서 “LH 부동산 투기 때 수사본부를 편성해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전화 금융 사기를 막기 위해서도 많이 집중했다”고 전했다. 

최근 사건 처리 기간이 늘어났다는 논란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고소와 고발이 급격하게 늘어나 책임 수사 체제가 되면서 책임성 강화 및 수사 완결성을 높이는 바람에 사건 처리 기한이 늘어났다고 남 본부장은 분석했다. 


향후 국수본은 연초부터 전국 관서에 집중 수사기간을 설정해 신속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국수본은 출범 전부터 높은 국민적 기대를 받았다. 한국형 연방수사국(FBI)이라는 거대한 호칭이 붙으면서 국가 수사의 중추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전망됐다. 1차 수사기구 역할을 맡게된 국수본은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사의 수사 지휘도 받지 않는다.

다만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긴급하고 중요한 사건의 수사’에 대해서는 지휘·감독당할 수 있다. 가령 재난·테러·집단사태 등에는 경찰청장이 개입할 수 있다. 국수본은 형·수사 기능은 물론 보안·외사 수사 관련 분야까지 포괄해 담당한다.

나아가 국내 유일한 대공 수사 기관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불송치 결정 등 주요 권한 행사는 주로 국수본 소관에서 이뤄줬다.

국수본이 출범한 한 달에 경찰 신뢰도를 하락시킨 일이 발생해 수사에 들어갔다.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당시 변호사)의 택시 기사 폭행 사건이다. 경찰 수사 담당자가 당시 이용구 변호사가 법무부 간부 출신의 변호사라는 점을 알고 윗선에 보고해 ‘봐주기’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남 본부장은 지난해 5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확인된 바로는 서울 서초경찰서 생활안전계 직원이 서울경찰청 생활안전과 실무자에게 (이 차관 신분을)통보한 것 외에, 정식 보고나 수사라인 보고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서초경찰서 간부들 사이에서 이 차관이 공수처장 후보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공유됐다는 것을 파악했다. 서초서 생활안전계 직원이 이 차관의 신분을 파악하고 상급 기관인 서울청에 세 차례 관련 보고를 한 사실도 인정했다. 


이 전 차관 폭행 사건 부실 대응
LH 부동산은 혐의도 입증 못 해

그러면서도 해당 보고가 서초서와 서울청 실무 직원들 사이의 대화였을 뿐 정식 보고는 아니었고 경찰청 본청 역시 이 차관 관련 보고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국민은 ‘경찰이 권력을 의식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경찰은 앞으로 일선 경찰서에서 취급하는 중요 인물들의 내사 사건은 수사 사건처럼 시도 경찰청 및 경찰청 국수본으로 보고해 지휘를 받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2월 국수본은 대규모 수사를 통해 신뢰도 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국수본이 한국토지주택공사(이하 LH) 임직원의 신도시 투기 의혹 사건을 총괄 수사 지휘하면서 경찰의 수사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정부 부동산 정책의 신뢰도가 뿌리부터 흔들릴 정도로 국민의 분노가 커지면서 경찰로서는 부담을 안게 됐다.

국수본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가 LH 직원들이 신규 공공택지로 발표된 광명·시흥 신도시 토지 7000평가량을 약 100억원에 먼저 사들였다는 의혹을 제기한 지 사흘 뒤 5일 ‘부동산 투기 사범 특별수사단’을 편성했다.

당초 국수본은 민변과 참여연대의 폭로 이후 시민단체가 고발한 이 사건을 논란이 된 개발 예정지 관할인 경기남부경찰청으로 이첩했다.

하지만 국민의 비난이 LH를 넘어 정부를 향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철저한 조사를 거듭 지시하면서, 국수본이 특별수사단을 구성해 사건을 총괄 지휘하기로 했다.

국수본을 중심으로 정부 합동 특별수사본부(특수본)가 꾸려져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검찰, 경찰, 국세청, 금융위 등 관계기관 합동으로 3개월에 걸쳐 2800여명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 34명이 구속됐고 908억원의 재산이 몰수·추징 보전 조치됐다.

아쉬운
용두사미

전직 차관급 기관장을 비롯해 기초자치단체장 등 공직자들의 불법 행위도 확인됐다. 

당시 수사 대상에 오른 주요 공직자는 국회의원 16명, 지방자치단체장 14명, 고위공직자 8명, 지방의회 의원 55명, 국가공무원 85명, 지방공무원 176명, 기타 공공기관 47명 등이다. 다만 수사 규모에 비해 고위공직자에 대한 수사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국회의원 5명 가운데 국민의힘 강기윤 의원 1명만 강제수사를 받았다. 나머지 4명 중 2명은 불입건됐고 남은 2명 또한 무혐의 처분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불입건이란 범죄 혐의나 공소권이 없을 때 또는 사건이 성립하지 않을 때 관련자를 입건하지 않고 내사 종결하는 절차를 의미한다.


투기 의혹이 제기된 국회의원의 범죄 혐의가 애초 뚜렷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경찰의 부동산 투기 수사가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유력 인사의 의혹을 규명하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우선 국토교통부 등 고위공직자 구속자가 전무했는데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전 보좌관을 구속기소한 게 최대 성과로 꼽힐 정도다. 

LH 부동산 투기 의혹을 수사하는 경찰이 투기 의혹이 제기됐던 국회의원 중 4명에 대해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경기북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LH에 근무하면서 인터넷에서 토지경매 강의를 하며 ‘경매 1타 강사’로 활동한 A씨에 대해 내부정보이용 혐의 등을 수사했지만, ‘혐의 없음’ 결론을 내리고 불송치로 사건을 종결했다.

3월 사법시험 준비생 모임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누린 것으로 추정된다”며 A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경찰은 A씨와 친·인척이 매입한 부동산과 주변 개발 계획 등에 대해 수사를 진행했지만, 부동산 매입 이전에 이미 개발계획이 발표돼 비밀성이 상실된 것으로 판단했다.

국수본 고위 관계자는 “국회의원과 고위직 공무원에 대한 수사는 물론 중요하지만, 말단부터 고위직을 가리지 않고 공직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부동산 부패를 근절하는 것이 이번 수사의 의의이자 최대 과제”라고 강조했다.


고위공직자 
구속자 전무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국수본은 지난해 4월 금융정보분석원(FIU)로부터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받는 화천대유자산관리의 자금 흐름 내역을 넘겨받았지만 5개월간 사건을 방치해 뭉개기 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약 5개월 뒤 국수본으로부터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무소속 곽상도 의원 아들 화천대유로부터 ‘퇴직금 50억원 수수 의혹’, 화천대유 관련 수상한 자금흐름 관련 내사 등 3건을 이송받아 수사에 착수했다.

국수본 집중 지휘 사건으로 관련 사안을 이송받은 경찰은 처음엔 수사에 속도를 내는 듯 했다. 경찰은 경기남부청 반부패수사대 수사관 27명과 서울청 지원 수사관 11명 등 38명 규모의 전담수사팀을 꾸렸다. 사흘 만인 10월1일 수사팀 규모를 62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키맨으로 불린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의 휴대전화를 찾는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의 엇박자가 드러나면서 진실 규명 작업을 두고 중복수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자아냈다. 이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과 경찰의 적극적인 협력 수사’를 직접 주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경찰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곽 의원 아들의 50억 퇴직금 수수 사건은 검찰에 송치됐고, 다른 핵심 인물들에 대한 수사는 검찰과 중복 지적을 받으며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10월 진행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찰청 국정감사에서는 시작부터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관련해 경찰 수사가 5개월 넘게 진척없이 지지부진했다는 여야 행안위원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위원들은 약 5개월 동안 입건 전 조사(내사)만 진행하는 등 수사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5개월 동안 참고인 조사를 제외하고 수사를 진행하지 않은 건 외압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 지적에 “최초 배당이 경제팀으로 되다 보니 다른 사건과 함께 수사를 해 시간이 걸렸다”며 “경찰은 자료를 분석해 혐의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국수본이 다각적인 방안으로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찰이 FIU 자료 분석 등 초기 적극적이지 못했던 부분은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앞으로 진행되는 수사는 국가수사본부장이 직접 장악해 책임 수사를 지휘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 본부장은 ‘대장동 의혹’ 사건을 서울경찰청이 수사하지 않고 일선 용산서로 배당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경제범죄 수사 의뢰 개념으로 봤고 통상 절차대로 관계자 1명 주소지를 고려해 관할인 용산서로 배당했다”고 답했다.

대장동 특혜 의혹 뭉개기 비판
검찰과 엇박자…중복 수사 우려

또 국수본은 정계·법조계·언론인 등이 연루된 ‘가짜 수산업자’ 수사 역시 로비 의혹을 밝혀내려 했다. 가짜 수산업자 사건이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 출신 김태우씨가 수산업자라고 사칭한 뒤 포항에서 오징어 사업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현혹해 백억원대 사기를 친 사건이다.

그는 정치권과 검찰·경찰·언론·교육·연예·의료계 인사들과 어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은 그동안 김씨가 정치인과 검경 간부, 언론인 등 최소 27명에게 선물을 보냈고 특히 박영수 전 특별검사와 이모 검사·이모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에게는 고급 차량을 무상으로 빌려주거나 골프채 등을 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씨가 116억원 규모의 대형 사기 행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들에게 로비를 벌인 것으로 밝혀질 경우 대형 게이트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멈췄다.

경찰은 김씨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7명을 검찰에 넘기면서 모두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만 적용했다. 대가성이 있다고 인정됐다면 금품을 받을 당시 현직이던 박 전 특검, 김무성 전 의원, 이 검사는 뇌물죄로 처벌될 수도 있었다.

뇌물죄는 액수가 적더라도 5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게 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청탁금지법 위반보다 형량이 무겁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가 금품을 뿌린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를 끝낸 것이다.

이처럼 국수본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굵직한 사건에 대해 늑장수사와 부실 대응이 이어지며 제 역할을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수본은 출범 2년 차에 접어드는 올해는 지난해보다 가시적인 성과를 더 내겠단 입장이다. 남 본부장은 “수사의 완결성과 신속성 두 가지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대응할 예정”이라면서 “연초부터 집중 수사 기간을 설정해 그동안 지연된 사건들에 대한 신속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활약은 
여기까지?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국민 입장에서는 경찰이 한 지붕 세 가족이 된 것뿐이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서 “독립된 수사기관으로서 국수본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한층 강화된 수사역량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9do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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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