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사면' 이재명 손익계산서

호재? 악재? 아슬아슬 줄타기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2022년 대선에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지금 양당은 그의 사면이 서로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호재가 예상되지만, 이 후보 입장에서는 마냥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확실히 예측할 수 없는 게 정치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면받아 석방됐다. 구속된 이후 4년9개월 만의 일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수감기간 중 가장 긴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지난 2017년 3월31일 최서원(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됐다. 구속 후 건강이 악화된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22일부터 서울삼성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갑자기 턴
그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국무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을 포함한 3094명의 수감자를 이번 신년 특사에 사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3094명 중에는 박 전 대통령뿐 아니라,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이석기 전 의원도 포함됐다. 이번 사면을 두고 한 전 총리와 이 전 의원 석방을 위해 박 전 대통령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은 올해 초부터 꾸준히 거론돼왔다. 여권에서 최초로 박 전 대통령의 사면론을 꺼낸 사람은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다.

이 전 대표는 올해 초 문 대통령에게 직접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문 대통령은 “국민 정서상 아직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반대 의견을 타진했다.

그에 대한 사면론은 재보선을 막 끝마친 4월에도 이어서 불거졌다. 야권에서 강력하게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을 요구한 것.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이 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직접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직 대통령들도 박 전 대통령만큼 오래 수감생활을 하진 않았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이때도 문 대통령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처럼 완강한 문 대통령의 의중이 급변한 건 지난달 말에 이르러서다.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사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문 대통령은 지난달 중순부터 핵심 참모 몇몇과 조용히 사면을 추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은 청와대 내부에서도 극비리로 진행된 일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청와대 참모진은 사면 소식을 뉴스로 처음 들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사면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박 전 대통령의 ‘건강 악화’와 ‘대국민 통합’이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긴 수감 생활
쿠데타 세력보다 2년9개월 더 길어


그간 사면 건의를 받을 때마다 문 대통령은 “시기상조” 혹은 “국민의 뜻이 아니다”라며 거절해왔다. 그런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작년 말부터 시작된 여론 변화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여론은 그동안 반대가 50%가 넘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충격에서 국민들이 헤어 나올 시간이 4년으로는 너무 짧았던 탓이다.

시간이 점차 지나자, 여론은 서서히 움직였다. 촛불을 들던 민심 중 상당수가 박 전 대통령을 동정하기 시작했고, 이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 형성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문 대통령이 사면을 결정했을 작년 지난달 말 경에는 사면 찬성 여론이 50%가 넘을 정도로 진척된 상태였다. 문 대통령이 사면의 이유로 국민 대통합을 내세운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문 대통령이 내세운 또 다른 이유인 ‘건강 악화’는 측근들과 의료진들의 증언에 따른 것인데, 그 상태가 대중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의 치아 상태가 음식물을 씹지 못할 정도로 나빠졌으며, 오랫동안 음식물 섭취가 이루어지지 않아 소화 체계 또한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현재 박 전 대통령은 의료 장비에 의존해 영양소를 공급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진은 정신건강 문제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치아와 소화기능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불안 증세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어, 이부터 치료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사면을 하지 않는다면 치료가 매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옥 내에서의 정신 치료를 받는 건 한계가 있기에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두 후보
표정 관리

물론 사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기껏 탄핵시켜 죗값을 치르게 해놓았더니 왜 다시 풀어주냐는 의견이다. 이는 강성 민주당 지지층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면 결정이 보도된 날인 지난달 2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박근혜 사면을 반대합니다”라는 글이 곧바로 올라왔다. 

해당 글에는 “박근혜 탄핵은 대한민국 국민이 촛불로 이뤄낸 21세기 민주주의의 쾌거이자 성취”라며 “문재인정부는 그런 촛불을 받들어 탄생한 ‘촛불정부’를 자처하며 출범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런 문재인정부에서 박근혜가 형기의 절반조차 채우지 않고 사면된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자 모독, 기만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의 주장대로, 문재인정부는 시작부터 촛불혁명으로 일어난 정권이라고 스스로 인정해왔다. 문정권은 전임 대통령의 탄핵이 빚어낸 사태에 책임감을 떠안고 출발해 임기 내내 적폐 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며 ‘정의 세우기’에 집중해왔다.

그런 정권에서 스스로 사면을 결정했으니 일부 국민은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당 글은 약 4만명의 동의를 얻고 있다.

사면 보도를 접한 양당의 대선후보들은 표정관리를 하며 각기 다른 반응을 내놓고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지난달 24일 “늦었지만 환영한다”며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빨리 회복하길 바라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지난달 28일 열린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중앙지검장이 된 후 몇 가지 여죄에 대해 수사했지만 공직자로서 직분에 의한 일이었다”며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정서적으로 미안한 마음을 인간적으로 갖고 있다”고 지난 사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한편, 이 후보는 “지금 와서 찬성 반대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사법 체계의 심판은 끝났으나 역사의 심판은 계속될 것임을 알기를 바란다”고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전했다.


지난달 26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사면에 대해 전혀 몰랐다. 나는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여러 후폭풍이나 갈등 요소를 문 대통령이 혼자 짊어지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사면을 반대하는 입장과 문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러나 정계 전문가들은 양 후보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이 오히려 이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당장은 민주당 내부의 쓴소리가 연이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지지율 하락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국민의힘 지지층 분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탄핵 당시 상황이 어찌됐건, 박 전 대통령을 교도소로 보낸 주체는 윤 후보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정권에서 ‘아웃사이더’ 검사 노릇을 하던 윤 후보가 다시금 검찰의 핵심 권력으로 비상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적폐 청산의 선봉장 역할을 한 게 컸다.

길조냐 
흉조냐

박정권 밑에서 좌천돼 옷 벗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문 대통령으로부터 적폐 청산의 ‘키맨’ 역할을 부여받았다.

문 대통령의 바람을 그대로 이루어주며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문 정권의 두 번째 검찰총장으로 임명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사면되기 전에도 국민의힘 강성 지지층 일부는 윤 후보가 보수의 궤멸을 이끌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수사를 진행하며 두 대통령뿐 아니라 보수진영 인사 수십명을 감옥으로 보내 진영 약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차용해 국민의힘 경선에서 윤 후보를 공격했던 인물이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이다.

홍 의원은 지난 경선 과정에서 벌어진 TV토론회에서 윤 후보의 적폐 수사를 거론하며 “1000여명을 수사하고 200여명을 구속했다. 박 전 대통령을 수사 하면서 구속시킨 공로로 서울 중앙지검장까지 했다. 보수진영 궤멸의 선봉장”이라며 “국민의힘 입당할 때 당원이나 대국민 사과를 해야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대한 윤 후보의 입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자신이 맡은 공직에 소임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는 “법리와 증거에 기반해 일을 처리했다. 당시 검사로서 맡은 소임을 한 것”이라며 “사과한다는 건 맞지 않다”고 맞받아쳤다. 

윤 후보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든 것은 지난 2013년 있었던 국정감사에서 했던 소신발언이다. 당시 윤 후보는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며 “수사에 외압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검찰)조직을 사랑할 뿐”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에 유리하게 작용?
윤, 감옥 넣은 장본인
그래도 팔은 안으로?

이 발언은 국민들의 가슴에 와닿았고 지금 윤 후보의 최고 무기인 ‘공정’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런 그가 박 전 대통령을 수사한 것에 사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과하는 것은 당시 수사가 ‘공정’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박 전 대통령에게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지지율 하락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지금 윤 후보가 몸담고 있는 당의 뿌리는 박 전 대통령이 바닥부터 일궈놓은 한나라당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자신이 잡아넣은 전 대통령이 건강이 악화되어 사면받았는데, 찾아가지 않거나 사과 한마디 없다면 지지층 결집은 쉽지 않다. 더욱이 박 전 대통령이 건강을 회복한 후 자신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한다면 윤 후보에게는 그 자체로도 압박일 것이다.

이처럼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은 이 후보에게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작용할 구석이 많다. 여권이 주체가 돼 만들어낸 대통합 분위기는 이 후보의 중도층 확장에도 확실히 도움이 되고, 윤 후보에게는 시한폭탄을 떠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후보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도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게 아닌 탓이다.

만일 박 전 대통령과 윤 후보가 전격적으로 화해하고 서로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 후보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야권이 그야말로 대통합을 할 수 있는 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윤 후보의 패배를 예측하는 평론가들의 첫 번째 이유는 보수 유권자들의 분열이었다. 그것을 분열의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결집시켜 준다면, 윤 후보의 아킬레스건은 사라지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의 등판은 최근 있었던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이나 가족 리스크가 사소한 일로 비춰질 만큼의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이 대선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 또한 많다. 이도저도 아닌 침묵을 지킬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라는 예측이다.

박 전 대통령은 우선 건강을 빨리 회복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정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대선 전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윤에겐 
시한폭탄?

박 전 대통령이 윤 후보의 구원투수가 될지, 그의 대선 행보를 끝내버릴 마무리 투수가 될지, 아니면 그냥 관중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각 당은 자신의 유불리를 철저히 계산해 그에 대한 입장을 견지하는 중이다. 이제 9주가량 남은 대선에서 앞으로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두 후보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석기·한명숙·이명박 사면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뉴스에 묻힌 두 정치인이 있다. 이석기 전 의원과 한명숙 전 총리다.

두 인물은 여권의 풀지 못한 숙제로 남은 채 수감생활을 이어가던 사람들이다.

이 전 의원 사면은 여권 진영 내에서 강하게 요구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의원은 내란 선동죄로 구속 수감된 뒤 8년3개월을 복역하다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한 전 총리는 친노, 친문 진영의 대모 격의 인물이다.

그는 9억여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 8300만원을 확정받고 2017년 만기 출소했다.

그는 2027년까지 피선거권이 제한됐으나 이번 사면을 계기로 복권됐다.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번 대대적인 사면에서 제외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의 사면은 박 전 대통령의 사면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국민 정서와 수감 기간 등을 고려해 이번 사면을 결정했는데, 이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이번 사면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정>
 

<기사 속 기사> 윤석열이 감옥 보낸 사람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 권력 수사를 마다하지 않는 ‘강골’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권력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1999년부터다.

당시 김대중정부의 경찰청 정보국장을 맡고 있던 박희원씨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2003년에는 안희정 전 충남 지사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불법 대선 자금 협의로 구속 기소하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을 불법 비자금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2011년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후 권력의 눈 밖에 나면서 평검사로 좌천되는 등 수모를 겪다가, 2016년 최순실 사건의 ‘삼성 수사’ 담당을 맡으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 수사에서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순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냈고, 몇 년 후에는 이 전 대통령까지 감옥에 보내 ‘국민 검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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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