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 1조 옵티머스 수사 총정리

문고리만 잡고 게이트 닫혔다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검찰의 부실 수사 의혹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옵티머스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몸통은 숨기고 ‘꼬리만 잘랐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검찰이 옵티머스 자산 운용(이하 옵티머스)의 펀드 사기 사건 수사를 ‘실체 없는 로비’로 마무리했다. 문건 속에 등장하는 고문단과 정·관계 인사들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1년2개월 동안 진행된 수사가 ‘용두사미’로 끝났다는 지적이다.

대놓고 사기
헛발질 수사

검찰은 지난해 6월부터 현재까지 옵티머스의 펀드 운용 비리, 펀드 로비 비리 등 4개 분야에 걸쳐 수사한 결과를 내놓았다. 관련 인물 15명을 구속하고 16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모두 32명(1명 기소 중지)의 처분을 마쳤다. 더불어 추징보전 결정을 통해 펀드자금이 투입된 61개 사업장의 재산 약 4200억원을 동결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은 로비 의혹을 받는 옵티머스 고문단 4명은 불기소 처분했다고 지난 8일 밝혔다.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고문단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양호 전 나라은행장, 김진훈 전 군인공제회 이사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다.

이들은 옵티머스 내부 문건에 등장한다. 고문료를 받으며 정·관계 로비를 했다고 언급된 인물들이다. 검찰이 이들을 불기소한 이유는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가 작성한 문건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다.


김 대표가 고문단의 역할을 부풀려 작성했다는 게 그에 대한 설명이다. 채 전 총장과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은 참고인 신분으로 한 차례 조사만 받았고, 입건하지 않았다. 

채 전 총장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청탁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당사자들이 부인했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리됐다. 선거 캠프 복합기 사용료 지원 의혹을 받은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이 1년여간 수사한 결과에 대한 평가는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이다. 수사 초기만 해도 이 사건은 단순 사기사건으로 여겨졌다. 옵티머스 사기 사건의 발단은 2017년 김 대표가 옵티머스에 취임 후 투자자를 모으면서다.

덮이는 정관계 연루 의혹
수사 초기부터 부실 흔적

취임 직후 김 대표는 공공기관 매출채권(기업이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채권)에 투자해 연간 3%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며 투자자를 모집했다. 고객에게는 상품을 판매하며 안정성을 강조해왔다. 은행 예·적금의 금리가 낮은 상황에서 안전 지향적 성향의 고객들이 주로 상품을 샀다. 

옵티머스는 펀드 판매를 통해 투자자를 2900명까지 모았다. 판매금액은 1조5700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옵티머스가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하겠다는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투자금을 비상장 페이퍼컴퍼니 등 부실채권인수와 펀드 돌려막기에 활용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공공기관 매출채권을 판매하는 국내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옵티머스의 사기 행위는 대범했다. 사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사모펀드의 사각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보통 사모펀드의 운용과 관리, 판매는 자산운용사, 수탁기관, 판매사 등이 역할을 나눠 맡는다. 


자산운용사가 자산 등을 설계한 뒤 수탁기관을 통해 자산을 매입해 관리한다. 이를 통해 판매사는 투자자에게 펀드를 판매한다.

옵티머스는 기관끼리 서로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했다. 수탁기관과 판매사가 분리돼있어 관리 허점을 악용한 범죄다. 또 옵티머스는 펀드 관련 서류들도 함께 위조한 혐의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옵티머스는 돌려막기에 한계가 오자 지난해 6월 환매중단을 선언했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과 판매사는 환매중단 직후 경영진에 대한 수사를 서울중앙지검에 의뢰했다. 

‘수확 제로’
검의 봐주기?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고, 주요 경영진을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재판 결과 김 대표는 1심에서 징역 25년, 이 대표는 징역 8년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경영진이 구속되고,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수사 과정에 의혹이 제기됐다. 의혹의 시작은 검찰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펀드 하자 치유 관련’이라는 문건을 발견하면서부터다. 문건의 발견은 단순 사기 사건에서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수사 방향이 전환된 계기가 됐다.

검찰은 지난해 옵티머스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문건을 입수했다. 문건은 김 대표가 환매중단 한 달 전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금감원 조사에 대비하기 위해 작성했다는 말도 나온다. 

문건에는 이 전 총리, 채 전 총장 등을 고문으로 언급하며, 옵티머스 사건이 이슈화될 경우 ‘게이트 사건화 우려’가 있다고 돼있다. 이어 “이 전 경제부총리, 양 전 은행장, 김 전 공제회 이사장, 채 전 총장 등이 옵티머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또 청와대 실장, 민주당 인사 등 총 20명이 거론된다. 언급되는 정‧관계자가 옵티머스 분쟁에 관여하거나 펀드 수익자로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김 대표의 컴퓨터에서는 정·관계 인사들의 이름과 연락처 파일까지 나오면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의혹은 더 짙어졌다. 동시에 검찰은 옵티머스가 투자받은 1조2000억원 중 500억원가량을 페이퍼컴퍼니인 셉틸리언에 모아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금액 중 일부를 정치권 로비자금으로 활용한 계좌 내역을 입수한다. 이 과정에서 채 전 총장은 이 지사를 만나 옵티머스 자금이 들어간 경기도 봉현물류단지 사업에 도움을 부탁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받았다.

증거 진짜 없었나 없앴나
결과 내놓고 변명만 잔뜩


그러나 검찰은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물류단지 사업과 관련해 청탁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민주당 이 전 대표의 경우 선거캠프 부실장이 사망하면서 수사가 불가능해졌다. 검찰은 4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지원한 브로커 등을 기소하는 선에서 이 전 대표 수사를 끝마쳤다.

또 고문단 중 한 명인 양 전 행장은 2017년 옵티머스 주식 15%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 당시 김 대표에게 금융권 인맥을 소개하고 로비활동 등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다. 

같은 해 양 전 행장은 이 전 부총리를 통해 금감원에 민원을 넣으려 했다는 의혹에도 연루됐다. 검찰은 양 전 행장을 수사 개시 9개월 만에 소환 조사했다. 옵티머스 정·관계 연관 수사는 지난해 10월에서야 이뤄졌다. 옵티머스 사태 수사가 같은 해 6월 시작됐다는 점에서 늦게 착수한 셈이다. 

10개월 동안 이뤄진 수사를 통해 검찰이 기소한 정·관계 인사는 윤모 전 금융감독원이 유일하다. 수사팀이 정·관계 로비에 대한 김 대표 진술을 확보하고도 이를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일었다. 수사는 이성윤 고검장(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지휘한 바 있다. 

특히 옵티머스 로비 수사를 지휘했던 서울중앙지검장은 친정부 성향인 이 고검장에서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고등학교 후배 이정수로 바뀌었다. 검찰이 부실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혹시나∼
역시나!

옵티머스 사건은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에 내린 적극적인 수사 지시를 토대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해왔다. 그러나 당시 이 고검장이 수사를 미온적으로 진행했다는 말이 나왔다. 수사가 끝나가는 시점에는 검찰이 로비 의혹을 뒷받침할 진술과 문건을 확보했지만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윤 전 총장을 겨냥했다. 부실 수사로 이어진 원인이 당시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이하 전파진흥원)이 서울중앙지검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무혐의 처분한 데 있으며 결국 피해 확산의 진원지가 됐다는 게 이유다.

이와 관련해 윤 전 총장은 부실 수사 의혹으로 고위공직자수사처(이하 공수처)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공수처는 최근 이 사건을 대검찰청에 이첩한 상태다. 윤 전 총장은 “당시 부장검사 전결이라 사건 처분 결과를 알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전파진흥원이 옵티머스에 투자한 돈은 방송통신발전기금과 국책 사업 등에 쓰이는 정보통신진흥기금이다. 공적 자금이 사모펀드에 투자된 뒤 용도와 다르게 옵티머스가 성지건설을 무자본 M&A(인수·합병)하는 데 흘러가는 등 다른 용도로 쓰인 것. 

금융업계에선 “전파진흥원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투자의 규모”며 “유력 인사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윤 전 총장을 겨냥해 부실 수사 지적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검찰은 옵티머스 경영진이 1조원대 사기 범행을 벌일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을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문건이 발견됐을 당시만 해도 청와대, 여권 관련설 등이 불거지며 권력형 비리 게이트로 이어질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연결고리를 찾진 못한 셈이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은 혐의 사실을 입증 가능한 증거를 수집하고 입증 범위 내에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며 “배경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으나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갖고 진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현직 청와대 행정관들이 옵티머스 측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은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검찰은 이진아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이 옵티머스 2대 주주인 이동열씨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은 계속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전 행정관은 윤석호 옵티머스 이사의 아내이자 옵티머스 지분 9.8%를 보유한 인물이다. 그는 청와대 입성 후 월급이 크게 증가했다는 의혹 등이 불거졌으나 수사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검찰은 “사건 책임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아울러 피해자들의 피해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옵티머스 펀드 사기 진상규명을 통해 피해 확산을 조기에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사과했다. 

꼭꼭 숨어라
핑계와 변명

법조계 안팎으로는 봐주기 수사, 부실 수사라고 지적한다. 또 검찰이 정·관계 로비와 관련한 제대로 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민의힘은 “검찰은 20명 가까운 검사를 투입해 1년 넘게 수사를 벌였지만 민주당 여권인사 모두를 ‘무혐의’ 처리했다”며 “정권 필요의 검찰개혁이 아니라 진정한 검찰개혁의 시점에 직면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금감원 옵티머스 책임론
그들도 한패?

옵티머스자산운용(이하 옵티머스) 펀드 사기 사건과 관련해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양호 전 나라은행장이 올해 초 옵티머스 측과 업무차 만난 정황이 드러났다. 옵티머스와 접촉한 시기가 핵심 사업 추진 및 금융감독원 감시·감독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 의혹의 핵심이다.

공공기관 채권 투자 인지
“왜 판매중단 하지 않았나”

양 전 행장이 김재현 대표의 비서로 추정되는 인물과 한 통화에서는 “김 대표 차량번호를 좀 찍어서 보내달라”며 “금감원에 가는데 거기서 VIP 대접을 해 준다고 차량 번호를 알려달라더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유의동 의원은 “금감원은 이때 운용 중인 46개 펀드가 모두 사모사채에 투자하고 있고 공공기관 채권에 투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며 “그런데 왜 판매중단 등 적기 조치를 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이어 “감독원이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질책했다.

야당은 라임·옵티머스 두 회사 관계자들이 여권 인사들과 친분을 맺고 있어 금융당국이 봐주기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은 “이렇게 우호적인 금감원은 처음 봤다”고 지적했다. <차>
 

<기사 속 기사> 라임·옵티머스 이후…
더 느는 사모펀드

라임과 옵티머스 사태를 겪은 사모펀드업계가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사모펀드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우려와 달리 신규 사모펀드 운용사가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등록을 기다리고 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올해에만 총 15곳이 금감원에 설립 등록을 했다.

올해 운용사 15곳 등록
공모주 시장 활성화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쳤지만 신규 사모펀드 운용사 설립은 증가 추세다. 주식 시장에 돈이 모이면서 공모주 시장이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공모주만으로 본전을 뽑을 수 있다’는 소식이 업계에 퍼지자 너도나도 사모펀드 운용사를 차리기 시작한 것. 공모주는 개인으로 청약하기보다 기관으로 수요예측에 참여하면 물량확보가 수월한 측면이 있다. 또 사모펀드는 시장 감시를 피하기도 쉽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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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