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예능 늦둥이’ 허재의 인생 3막

방송가 접수한 웃기는 아저씨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성격이 불 같다.” 다혈질의 아이콘이었던 살아있는 농구 전설 슈퍼스타 허재. 이제는 예능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됐다. 첫 고정 예능 <뭉쳐야 찬다>에서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고, 실제 알려진 성격과는 다른 허당미를 뿜어내더니 예능에 없어서는 안 될 섭외 1순위가 됐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에 대해 살펴봤다. 
 

▲ 허재 ⓒJTBC

“한국 농구 사상 최고의 테크니션.” 농구 대통령 허재를 두고 팬들이 한 말이다. 경기장 밖에서는 사생활 논란과 비판이 많았지만, 농구 코트에서 보여준 그의 플레이에 대한 열정과 실력으로 누구보다 찬사받은 선수다. 팬들은 그가 다른 선수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농구선수였다고 기억한다.

슈퍼스타
농구 대통령

허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농구를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과 끈질긴 성격으로, 어렸을 적부터 농구 골대 그물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했다고 전해진다. 일찍부터 농구에 두각을 보인 허재의 승부사 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전국 초등학교 농구대회 결승전에서는 종료 2초를 남기고 역전 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허재가 주축이 된 팀은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 전승을 거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그가 주목을 받은 시기는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이다. 특급 가드로 불리던 1학년 때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팀의 첫 우승을 이뤄냈다.

압도적 재능을 펼치던 2학년 때는 지난 1982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졸업을 앞둔 대회 결승전에서 독보적인 어시스트와 득점력을 앞세워 팀을 정상에 올렸다. 전국 대학팀은 스타가 된 허재 모시기에 나섰는데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경쟁이 유독 치열했다.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중앙대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 시절 완성형 선수라 불리던 허재는 대학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슈퍼스타의 싹을 보인 그는 신인상, 어시스트상 등 상이라는 상은 전부 휩쓸며, 대학 선수 이상의 능력을 보였다. 1986년 열린 농구대잔치에 참가한 중앙대학교는 허재를 앞세워 실업팀을 격파하고 결승까지 올라가는 이변을 일으켰다. 비록 그의 팀은 결승전에서 졌지만 허재의 활약은 눈부셨다.

1987년 중앙대학교에 강동희가 입학하며 한국 농구 전설의 트리오라 불린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이 한 팀으로 함께 뛰었다. 이들은 출전한 경기마다 많은 업적을 쌓았다. 심지어 중앙대학교는 많은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4학년 농구대잔치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팬들은 허재의 불참을 두고 “허재 없는 올해 농구대회의 관중이 줄었다”며 아쉬워했다.

이는 경기에 참여하지 않아도 허재의 슈퍼스타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그는 ‘대학 선수 중 단연 최고’라는 수식어로 실업팀으로 갈 준비를 끝냈다.

불 같은 성격 접고 푸근하게
“방송이 시드는 날 살려줬다”

대학 최고 스타의 졸업은 실업팀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실업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의 계약금을 제시하고, 허재가 오기만을 바랐다. 그가 선택한 팀은 기아자동차(이하 기아)였다. 기아를 선택한 이유는 한기범과 허동택 트리오 중 다른 한 명인 김유택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재가 합류한 지 1년 뒤, 후배 강동희 합류로 다시 뭉친 허동택 트리오는 농구대잔치 7회 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기아의 시대를 아무도 끝낼 수 없었다. 

선수로서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것과 대조적으로, 내내 그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과 논란 역시 선수 생활 내내 끊이지 않았다. 팬들은 허재의 성격과 개인기,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보냈다. 

더불어 허재가 약한 팀과의 경기 전날이면 과음을 하고 나타나 눈에 힘이 없고, 플레이할 때 힘겨운 모습을 보여 농구 팬들의 원성을 샀다. 실제로 그는 선수로서 최고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크고 작은 논란이 많았다. 위태로운 최고였다.

심판이 상대팀 선수의 반칙을 인정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항의해 논란도 많았다.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 때문에 경기 중 상대편 선수의 폭행에 대해 분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화냈던 상황이 문제였다.
 

팀의 내부 문제까지 생겼다. 몇몇 선수들이 은퇴하자, 팀은 제대로 된 선수를 기용할 수 없어 전력이 점차 쇠퇴했다. 이 문제는 주전선수들의 체력 부담으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유택과 한기범의 부상이 잦아졌고, 선수들의 기량이 하락했다는 지적들이 많았다. 당시 실업 농구계에선 한국 나이 30세는 노장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끊임없는 논란과 악재 속에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허재의 팀은 모교 후배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선수 은퇴 후 허재는 이를 두고 “커리어 중 대망신”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최고의 자리에서 추락하자 그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선수로서의 가치를 다시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1995년 농구대잔치에서 심기일전한 허재가 맹활약해 MVP를 수상했고, 기아는 우승을 차지했다. 비로소 허동택 트리오 이름에 걸맞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다음 시즌 농구팬들은 “곧 기아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주협 등이 이끌던 고려대학교가 무서운 기세로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예측과 이상민을 필두로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이뤄진 상무의 기량이 최고로 만개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빵빵 터지는
유쾌한 입담

다시 최고가 되기 위해 허동택 트리오와 새로 입단한 김영만은 최선을 다했다. 선수들의 부상과 체력 저하 등의 악조건 속에서 기아는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위기 중 기회였을까.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 2차전에서 SBS를 상대로 50득점을 기록해 여전히 그가 왕임을 과시했다. 기아는 그해 결승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기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은 허재도 “이 이상의 최악은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더욱 열악한 상황이었다. KBL이 새로 출범했지만, 그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넘을 수 없었다. 1998년 현대와의 결승전에서 그는 팬들이 눈물을 흘릴 만큼 맹활약한다.

오른손의 손등 뼈가 부러지고, 피가 나도 개의치 않고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비판했던 팬들은 결국 침묵했다. 7차전까지 이어진 명승부에서 아쉽게 패배했지만, 허재는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팀 최초 MVP를 받았다. 현재까지도 준우승팀 선수 중 MVP를 받은 사례는 그가 유일하다. 
 

▲ 예능 프로그램 &lt;뭉쳐야 쏜다&gt; ⓒJTBC

허재가 농구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유를 모두가 확실히 알게 된 순간이다. 당시 허재의 나이는 은퇴의 갈림길에 선 34세였다. 당시 한 매체는 그를 “상처 입은 사자가 다른 맹수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이 연상됐다”고 평가했다. 

기아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고 선수로서의 마지막 생활을 위해 나래 블루버드로 팀을 옮겼다. 선수로서 능력이 전성기 시절보다 하락했지만 새로 이적한 팀에서 자신의 능력 저하를 인정하고 후배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해,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 시즌 마지막 우승을 달성한 허재는 1년 정도 선수생활을 이어가다가 2004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은퇴하며 “지도자를 준비하기 위해 코트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농구 대통령은 잠시 농구공을 내려놨다. 농구 대통령의 선수 인생이 화려하게 막을 내린 순간이다. 

인생 1막이 끝나고 2막을 시작하기 위해 그가 날아간 곳은 미국이었다. 2년 동안 객원 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그러던 중 감독직을 제안받고 귀국해 2005년 KCC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허재는 KBL 출범 후 최초의 농구선수 출신 감독이 됐다. 큰 우려와 달리 첫 해에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으며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감독을 맡은 두 번째 시즌은 베테랑 선수의 은퇴와 악재가 겹쳐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에 대한 의문이 계속 수면 위로 떠올랐다. 


허재는 자신의 역량에 의문을 갖는 팬들의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 팀을 이끌고 다음 시즌을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KCC는 2008년 정규리그 2위 업적을 달성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팀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09년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시작으로 KCC를 챔피언 자리에 앉혔다. 이로써 허재는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감독이 됐다. 

“그거슨 아니지”
 허당미 발산

수장으로서 선수 트레이드 및 영입을 활용해 팀의 컬러를 압박과 속공으로 바꿔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논란 속에서 KCC를 과감하게 변신시킨 후 팀을 우승시키고, 승승장구하며 감독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감독이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누구보다 뜨거웠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 열정으로 비쳤던 것일까. 무조건 화내며 심판 판정에 대해 많은 항의를 했지만, 선수 시절의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팬들은 더 이상 이를 논란거리로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허재의 팀이 모비스와 붙은 경기에서 모비스 선수가 KCC 선수의 손을 친 적 있었다. 반칙으로 인정되지 않자 흥분한 나머지 화를 내며 ‘Block’이라는 단어를 ‘불낙’이라고 어눌하게 발음해 많은 패러디를 탄생시켰다.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을 때는 중국과 경기 후 인터뷰 중 중국 기자가 “중국 국가가 나오는데 한국 선수들이 움직인 이유”에 대해 질문 하자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 하고 있어, 짜증나게”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허재의 답변이 큰 이슈가 돼 여론은 “잘 대처했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중은 그가 할 말은 해야 하는 다혈질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불같은 성격은 농구에 대한 사랑으로 비쳤다. 은퇴 후 허재는 한 방송에서 자신의 성격에 대해 “화낼 때만 카메라에 담기고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은 거의 중계되지 않았다”고 뒷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허재의 성격에 대해 선수들은 “감독님은 화낼 때 정말 무섭지만 슬럼프에 빠지거나 무명인 선수도 자신 있게 경기 하라며 독려한다. 선수들의 활약을 끌어 낸 사람”이라고 말했다. 허재는 감독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 그의 팀 성적은 점점 하락했다.

결국 10년 동안 이끌던 KCC를 떠나게 된 허재는 “팀의 성적이 좋지 않으니 책임지고 자진해서 사퇴한다”는 말을 남기고 농구계를 두 번째로 떠났다. 성적 하락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지휘봉을 내려놨다.

이후 2016년 한국 농구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지만 아들 허웅·허훈을 발탁해 논란이 발생했고, 성적 부진을 남긴 채 국가대표 감독에서 하차했다. 선수로서의 화려한 마무리와는 다르게 다소 씁쓸한 농구 인생 2막이 끝났다.

팬들 기억과 다른 인간적인 면모
예능계 이끌 새로운 스타로 우뚝

1년의 정비 시간을 가진 허재는 농구가 아닌 방송으로 자신의 복귀를 알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농구 전설의 첫 고정 예능 출연이었다. JTBC <뭉쳐야 찬다>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만한 스포츠계 전설들이 뭉쳐 함께 축구 경기를 하는 스포츠 예능이다. 

허재는 처음에 농구가 아닌 축구라서 출연을 고민했다. 제작진과 출연에 대해 상의하며 고량주 6병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는 출연 이유로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PD가 나를 설득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고, 추억이 될 것 같아 출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수, 감독 때 쉽게 화내던 모습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모습과 불평과 불만은 많지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어딘가 어리숙한 행동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너털웃음 짓는 코 큰 50대 후반 아저씨 캐릭터에 모두가 손뼉을 친다. 

팀이 찬 공을 손으로 잡거나, 헛발질하는 허당의 모습을 보여준 허재는 화려한 애드리브로 “그거슨 아니지”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내는 등 빠르게 예능을 섭렵하고 있다. <뭉쳐야 찬다>를 시작으로 농구 대통령에서 예능 대통령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팬들을 사로잡았다. 
 

▲ 절친 사이로 알려진 허재(사진 오른쪽)와 박중훈

수많은 토크 예능은 발 빠르게 그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그가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는 <뭉쳐야 찬다>에 나오는 것 이상은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허재라는 사람 자체를 보여준 것으로 왕년 스타의 인간적인 모습을 대중은 두 팔 벌려 환영한다.

허당끼 있는 동네 아저씨 캐릭터는 대중에게 정확히 먹혔고, 이번 방송을 통해 스타에 대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때는 허재가 최고였지”라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뭉쳐야 찬다>에 이어 농구에 도전하는 <뭉쳐야 쏜다>에서 허재는 감독을 맡았다. <뭉쳐야 쏜다>는 첫 방송부터 시청률 7%라는 기록을 세우며 시청자들을 안방으로 불러 모았다. 안정환은 선수로, 허재는 감독으로 출연해 뒤바뀐 입장에서 티격태격하는 케미가 부각되자 대중의 반응은 뜨겁다. 

이제는 
스포테이너

과거에는 무거운 왕관을 지고 힘들게 버텨온 감독의 자리였지만 지금은 예능인으로서 허당 감독 캐릭터로 도전하고 있다. 농구 레전드의 농구 특급 과외와 허당이라는 숨겨진 면모가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지 많은 사람이 주목한다.

허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방송은 시들어가는 나를 다시 살려줬다. 계속 기회가 주어진다면 처음 농구하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안정환, 서장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만능 스포테이너로 변신하는 중이다. 

앞으로 그가 가진 허당 캐릭터와 과거 농구선수 시절 보여주었던 열정적인 행보를 보인다면, 예능 캐릭터의 발굴이 쉽지 않은 예능가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또 과거 농구 전설은 머지않아 예능 전설로 방송계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는 기대가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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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