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여야 1위’ 박영선 VS 나경원 맞짱 인터뷰

‘여풍당당’ 수도 서울 수장은 누구?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김정수 기자 = 수도 서울에 ‘여풍’이 불고 있다. 오는 4월 보궐선거에서 각 정당의 여야 최초 여성 원내사령탑 출신인 박영선 전 장관과 나경원 전 의원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면서, 두 후보의 행보에 눈길이 쏠린다. <일요시사>는 설을 맞이해 두 예비후보의 맞짱 인터뷰를 진행했다.
 

▲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영선·나경원 여야 후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이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나 전 의원은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박 전 장관은 민주당 예비후보로 뽑혔다. 이후 박 전 장관은 당내 경선에서 박원순 전 시장에게 패배, 나 전 의원은 본선에서 패배했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고인이 된 박 전 시장의 빈자리를 채우는 선거인만큼 이들의 상징성은 여러모로 커 보인다. 그래서일까. 두 후보 모두 ‘미니 대선’으로 불리는 서울시장 선거에 임하는 각오가 남다르다.

‘저격수’로 불렸던 강인한 이미지의 박 전 장관은 “봄날 같은 서울시장”이 되겠다며 푸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 반면 나 전 의원은 연일 문재인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독하게 섬세하게”를 선거구호로 내세웠다. 강단 있고 똑 부러지는 모습으로 서울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코로나19, 부동산 집값 급등 등 여러 난제가 산적한 서울을 살리겠다는 이들의 공약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다음은 두 후보와의 일문일답.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박) 문명사적으로 보면, 코로나19 이후의 대한민국은 대전환의 시기를 맞게 된다. 오는 4월에 어디 좌표를 찍느냐에 따라 서울시의 100년 후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미래를 잘 설계하면 대한민국 서울이 뉴욕과 같은 세계 도시, 세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디지털 경제 수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도시의 표준은 21분 내에 주거·먹거리·여가·의료 등 모든 것이 자족 가능한 그린 다핵분산도시가 될 것이다. 서울을 G7국가로서의 품격과 위상을 지켜줄 글로벌 디지털 경제수도로 만들겠다.


▲(나)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단순히 서울시장을 뽑는 것을 넘어 문재인정부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1년3개월의 임기 동안 코로나19로 인한 민생 위기를 돌파해야 하고, 부동산 대란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 그리고 구석구석을 꼼꼼히 챙기는 세밀함이 필요하다. 이번에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면서 “독하게 섬세하게”라는 슬로건을 세웠다.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독한 의지, 그리고 전문성 있는 정책을 만들겠다는 섬세한 실천력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이자 오랜 경험의 정치인인 제가 그런 두 가지 자질을 모두 갖추지 않았나 생각한다.

-박 후보가 제시한 ‘21분 컴팩트 도시’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있다.

▲(박) 21분 컴팩트 도시의 핵심은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도시 표준은 21분 내에 삶의 모든 것이 해결되고, 자족이 가능한 다핵분화도시가 될 것이다. ‘9분 도시 바르셀로나’, ‘15분 도시 파리’, ‘20분 도시 멜버른’ 등 이미 도시의 진화는 세계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는 추세다. 빅데이터상에서도 이미 도심의 쇠퇴가 진행 중이다. 도심 상권의 매출은 50% 감소한 반면 주거지 근처 상권의 매출은 상승하는 등 상권의 변화도 이미 시작됐다.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제가 서울시장이 되는 그 순간부터 서울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확신한다.

봄날 같은 서울시장, 부드러움 강조한 ‘박’
‘독하게 섬세하게’ 강하게 다시 돌아온 ‘나’

-나 후보가 제시한 재건축 추진 및 분양가 상한제 폐지 공약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나) 재개발-재건축의 경우에는 용적률, 용도지구, 건폐율, 층고 제한 등 각종 규제를 풀어서 충분히 활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이른바 ‘직주공존’, 즉 집과 일자리가 함께 들어서는 융복합 도시 개발이 가능하다. 재개발-재건축 심의를 ‘원스톱’으로 간소화해서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분양가상한제 폐지나 공시가격 인상 저지 등 중요한 정치적 과제들이 있다. 그래서 서울시장은 ‘행정가’이면서 동시에 ‘정치가’여야 한다. 4선 국회의원이자 야당 원내대표로서 협상과 투쟁을 모두 해본 제가 민주당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파이팅 외치는 나경원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

-(부동산 정책 외에) 이것만큼은 꼭 지키겠다하는 공약이 있다면?

▲(박) 서울시 대전환 시리즈의 일환인 ‘소상공인 구독경제 구축’을 발표했다. 이 공약을 통해 소상공인의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수입과 고객 확보를 위해 구독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구독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고자 한다. 가정에 우유나 요구르트를 월 단위로 정기 배달하듯이 전통시장에서 판매하는 음식, 꽃, 세탁물 등도 월정액을 정해 구독경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울시 산하 구독경제 추진단을 설치하겠다. 아울러 소상공인 매출 증대와 안정적 수입 보장을 위한 디지털 서울화폐 ‘서울사랑상품권’ 1조원 발행을 연계하겠다.

▲(나) 서울 교육 대혁명이 시급하다. 교육 불균형이 서울의 전체적인 불균형을 낳는다. 우수 학군을 찾아 이사 다니는 일이 없어야 한다. 25개구에 25개 우수 학군을 조성해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도 아이들을 얼마든지 좋은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있도록 해드릴 것이다. 또 하나, 요즘 학부모들의 영어 교육 부담이 크다고 한다. 어렸을 때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하나 걱정들 하신다. 각 구별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설립하고, 월 2~3만원의 저렴한 비용으로도 원어민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드릴 것이다.

-1년 안에 서울 집값과 공약을 다 해결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 있는데, 입장은?

▲(박) 공약은 당연히 5년을 생각하고 낸 것이다. 5년 안에 서울시 대전환의 청사진이 구체화될 것을 확신한다. 먼저, 여의도를 시범지구로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컴팩트 도시 모델을 구체화할 것이다. 컴팩트 도시는 시민의 삶을 대전환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미래도시의 표준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을 확신한다. 관련 구체적인 계획은 추후에 공개할 예정이다.

▲(나) 시장에 정확한 시그널을 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이다. “앞으로 주택 공급이 늘어날 것”이라는 시그널만으로도 사람들이 더 이상 앞다퉈 집을 사야 된다는 조바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주택시장에는 국민 심리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 문재인정부와 박원순 전 시장은 “서울에서 더 이상 신축 공급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심어줬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이 더 과열됐고, 특히 재건축-재개발 투기수요가 몰린 것이다. 앞으로 충분히 장기적으로 집이 지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면 누가 ‘영끌’을 해서 집을 사겠나? 공급 확대의 정확한 청사진을 제공해서 시장불안을 해소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

-서울의 코로나19 취약 계층을 위해 고려해둔 지원책이 있다면.

▲(박)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은 한계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들을 위한 지원책으로 G7 경제수도를 지향하는 디지털 경제로의 대전환을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공약 중 하나인 ‘스마트슈퍼’는 무인점포 운영에 필요한 보안 결제 시설 등을 갖추고 낮에는 사람이, 심야에는 무인으로 운영이 가능한 혼합형 24시간 무인점포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분들의 매출이 10~20% 상승하는 등 만족도가 아주 높은 정책이다. 스마트 상점, 스마트 공방 지원 확대, 구독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등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21분 컴팩트 도시 VS 문정부 심판
공무원 성비위 엄단 '한 목소리'

▲(나) 아무래도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방역수칙으로 사실상 폐업 수준의 휴업을 하고 있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영업에 지대한 타격을 입은 분들이 많다. 저는 ‘숨통 트임론’을 공약했다. 1인당 최대 5000만원까지 1%의 초저금리로 3년 거치, 5년 상환 장기 대출을 해드린다. 지금 이 정권은 재난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몇 십에서 몇 백을 쥐어주는데 이것은 한 달 월세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으로는 장기전인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목돈을 초저리로 장기대출 해드려 유동성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다.

-오늘날 서울의 가장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박) 서울시민의 수준은 한참 올라가 있는데, 주거 형태는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서울은 6·25전쟁 이후 재건됐지만 서울시민과의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 주거형태는 1, 2차 산업혁명 시대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3,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인구수는 줄지만 1인 가구 증가로 가구 수는 늘어나는 대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를 반영한 공급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 도시가 멈췄다. 시민의 삶과 사고는 10년간 엄청나게 변화했는데, 서울시는 그 자리에 머물러버렸다. 도시 인프라는 너무나 노후화됐고, 그 사이 양질의 일자리가 주변 경기도와 해외로 많이 빠져나갔다. 정체된 서울이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주택·교통·교육·환경·문화 인프라를 전면 교체해야 한다. 이른바 ‘건강한 서울’이다. 도시가 건강해야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시민들도 건강할 수 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박원순 성추행 사건으로 발생했는데, 생각하고 있는 공약이 있다면?

▲(박) 우리 여성들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자 외로움이다. 이들이 행복한 서울을 만드는 첫 여성시장이 되고자 한다. 성인지감수성 향상과 성폭력 근절을 위해 기존 제도를 정비·보완하겠다.

또 피해 발생을 예방하고, 피해자가 시와 제도를 신뢰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특히 지위고하의 예외 없이 위력에 의한 성비위에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적용하겠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리더를 키우는 일에 매진해 ‘가능성의 서울’을 만들겠다.
 

▲ ▲▲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더불어민주당)

▲(나) 광역단체장이 ‘절대권력화’된 것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시도지사의 성추행을 주변에서 견제하고 감시하지 못했다. 폐쇄적인 시정·도정 운영에서 비롯된 결과다. 서울 시민과 가장 가까운 곳, 가장 투명한 곳에서 일할 것이다. 일단 6층 시장실을 쓰지 않겠다.


대신 서울시 성폭력 대책 담당 부서실로 사용하겠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을 영원히 잊지 않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의미다. 또한 ‘시정업무 실명제(사적 연락, 부당한 업무지시 방지)’와 ‘원스트라이크제(무관용 엄단)’를 도입할 계획이다.

-세 번째 서울시장에 도전한다. 왜 ‘박영선’이어야 하는가? 

▲(박) 대학에서 도시지리학을 전공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민주당 도시재생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시민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따뜻한 도시에 대해 고민했다. 2011년, 2018년 서울시장 경선 당시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과 ‘수소경제’를 제시했다. 오늘날 두 정책은 모두 실시되고 있다. 제시한 서울의 정책적 방향이 시대의 요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나에게는 서울에 대한 고민의 깊이와 넓이에서 축적한 힘이 있다. ‘서울시 대전환, 21분 도시 서울’로 서울을 대전환시켜 세계의 표준도시로 만들 것이다.

- 2011년 이후 10년 만에 재도전이다. 왜 ‘나경원’이어야 하는가?

▲(나)경험, 연륜, 네트워크다. 나경원은 준비된 서울시장 후보다. 지난 4선 국회의원, 야당 원내대표를 지내며 국정의 맥을 충분히 익혔다. 저를 당장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와 기업인도 다수 있다. 제가 시장이 되면 서울은 곧바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나경원만이 정권교체의 밀알이 될 수 있다. 문재인정권의 오만과 무능을 이번 보궐선거로 막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정말 위태로워질 수 있다. 불의에 맞서 물러서지 않은 정치인인 제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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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