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대선주자 7인 현미경 검증 ⑨학력& 학창시절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2.08.03 17:16:53
  • 댓글 0개

배움은 미래 위한 가장 큰 준비 "준비 된 후보 없나요?"

[일요시사=김명일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주자들이 치열한 대권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와 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정세균)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세세히 검증하기로 했다. 앞서 출생과 정치입문·병역·정치권 지지기반·배우자·재산·화법까지 살펴본데 이어 아홉번 번째로 그들의 '학력'과 '학창시절'을 살펴봤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라고 했고,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이라면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준비가 철저하고, 유능한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대선주자 7인의 학력과 학창시절을 살펴본다면 유권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대권에 적합한 인재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박근혜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대통령의 딸 "공부만 열심히!"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1964년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 정몽준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박 후보가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1963년 부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다음 해 박 후보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성심여중에 들어갔다. 한 학년에 두 반뿐이고, 한 반에 30명 정도의 학생이 공부를 했던 일종의 '귀족학교'였다는 후문이다. 1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2학년 때부터는 청와대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그는 불어를 잘 했고 성적이 항상 1등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심여중을 수석 졸업하고 성심여고를 수석 입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심여고에서도 박 후보는 줄곧 1등이었다.

1970년 3월 박 후보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박 후보는 대학시절 어머니를 대신해 해외 무대에 나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외국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다. 물론 다른 성적도 우수했다. 전 학년 C학점은 1개뿐이었고 대부분 A학점을 받았다. 평점은 4.0을 기준으로 할 때 3.82, 대학 역시 수석졸업을 했다.


박 후보는 1974년 서강대 졸업 후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평소 불어를 잘했고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급거 귀국했다. 어머니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고 박 후보는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다.

한편 박 후보가 여자임에도 전자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추천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원래 박 후보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학을 전공하려 했다. 박 전 대통령이 박 후보에게 전자공학과를 추천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박 후보가 사회·정치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박 후보는 동기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할 때 말없이 책만 봤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시위에 딸로서 차마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대학시절은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실험실과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다 대학시절 그 흔한 미팅 한 번 못해봤다고 하니 20대 청춘을 경호원들의 경호 속에 날려버린 셈이다.

김문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학생운동 투신, 25년만의 졸업

김문수 새누리당 대선경선후보는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매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7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서울대 경영학과 70학번)에 진학했지만 순탄한 인생은 결코 아니었다.

김 후보는 경북 영천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대구로 유학하여 경북중학교를 거쳐 1967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으로는 삼성전자 CEO를 역임하고 제4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었던 진대제가 있다.

그는 고3 때 3선 개헌 반대운동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학업의 뜻을 포기하진 않았다. 김 후보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고학으로 1970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학시절의 낭만은 없었다.


대학 입학 후 그는 대학 내 모임인 후진국 사회연구원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그의 대학시절은 학생운동으로 점철됐다. 김 후보는 1974년에는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돼 대학에서 제적됐다.

김 후보의 부모는 그에게 "대학은 졸업하고 데모할 수 없겠느냐"고 읍소했지만 그는 "다시 대학생이 되더라도 반독재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학 제적 후 그는 노동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울 청계천 재단보조공부터 시작해 전국금속노조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인천 5·3사태와 서노련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투옥돼 2년6개월간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 이처럼 노동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생활을 반복하던 그는 1994년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문재인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치열한 반독재투쟁에도 사법연수원 차석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53년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문 후보의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내려왔다. 문 후보는 부산남항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72학번으로 입학했다.

문 후보는 경상남도에서 학력고사 전체 수석으로 경남고에 수석입학 했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방황을 하다 고교 말기에는 성적이 떨어져 끝내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다.

당시 경희대 총장이었던 조영식(경희대 창립자)은 그런 문 후보를 알아보고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적극적으로 입학을 권유했다. 문 후보는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문 후보는 경희대 입학 후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치열한 반독재투쟁을 벌인다. 1975년에는 결국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그 해 8월 문 후보는 강제 징집돼 특전사령부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문 후보는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해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문 후보는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붙잡혀 있었다. 때문에 마지막 관문인 3차 면접시험에 응시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조영식 경희대 총장은 문 후보를 위해 직접 신원보증을 서는 등 학교차원에서 당국에 간곡하게 사정을 했다.

문 후보는 우여곡절 끝에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 직전 안기부 직원이 문 후보에게 "과거 학생운동을 반성하느냐"고 물었지만 문 후보는 "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끝내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한 문 후보는 감옥에서 풀려나 사법연수원에 들어간다. 문 후보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도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 하나로 법무부에서 아무런 임용도 되지 못한 채 고향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문 후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함으로써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김두관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가난 때문에 가고 싶은 대학도 못 가고…"

김두관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58년 11월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민등록상 생일은 59년 4월10일로 돼 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후 5∼6개월이 지나 출생 신고를 하던 관습 때문이다.

5남 1녀의 다섯째인 김 후보는 초등학교 4학년 11살 때 농민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때 학생회비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 늘 선생님 앞에 불려나가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 어문계열에 합격했지만 등록금 23만8000원이 없어 입학을 포기했다. 이후 2년간 고향 마을에서 마늘 농사를 짓다가 1979년 경북 영주에 있는 경상전문대학(현 경북전문대)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경북 영주와 경남 남해가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81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 군에 입대해 경기 의정부 2군수지원사령부 16보급대대에서 30개월을 복무했다. 군 제대 후에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1986년 4월 재야 운동세력의 연합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활동했다. 개헌추진본부 충북지부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일로 김 후보는 민주화운동 유공자 인정을 받는다. 출소 후 김 후보는 1987년 대학을 졸업한다. 

손학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약간 놀았지만(?) 불의는 못 참아!"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1947년 11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태어났다. 손 후보의 부모는 교사였다. 손 후보는 10남매 중 막내다. 손 후보는 1953년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해 4년을 공부한 뒤 서울 매동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59년 경기중학교에 입학, 밴드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맡았다. 그래서 트럼펫 실력이 상당한 수준급이다. 그러나 1962년 경기고에 입학해서는 연극부에 가입했다. 그가 요즘도 자주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것은 연극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손 후보는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약간 불량기가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 아이들에게 주눅이 많이 들었으나 고등학교 때 밴드반을 하고 연극반에 합숙하면서 선배들과 술도 한 잔 하고 어울리면서 생각을 외향적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3 때 대학생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무기정학 중 데모를 해서 또 무기정학을 받아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춘천에서 칩거한 것도 이 때 강원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학교로 돌아온 손학규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또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1969년 군대에 입대한 손 후보는 1972년 만기제대 한 후 1973년 대학을 졸업했다.

정세균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우리 학교 '빵돌이'가 고려대를?"

정세균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는 전북 진안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환경과 오지의 환경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검정고시를 치르고서야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얻을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장을 얻고 전주공고 입학한 그는 대학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주 신흥고로 전학한다. 신흥고 시절 그는 워낙 생활이 어려워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빵돌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과 대학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법학과였던 정 후보는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입주과외를 하면서 고시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돼 헌법을 가르치던 한동섭 교수가 유신헌법을 작성하라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불응해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실에 충격을 받아 법관의 길을 포기했다.

정 후보는 대신 교내 신문인 '고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유신 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과는 다르게 구속된 전력은 없다. 1974년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 입사를 지원하지만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에 실망하고 쌍용그룹에 지원했다.

1978년 쌍용에 입사해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그룹의 종합상사 주재원으로 일했다. 그런 가운데 뉴욕 주재원 시절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LA 주재원 시절 페퍼다인 대학교에서 MBA를 취득했다.

안철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학창시절 성적은 그럭저럭 중간"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 원장은 1962년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에 그는 60명 중 30등을 할 정도로 평범했으며 운동 등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독서는 매우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매일 몇 권씩 읽어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게 됐다. 도서관 사서는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을 치는 걸로 오해해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안철수는 "당시 책의 페이지수, 발행 연월일, 저자까지 모두 다 읽고, 바닥에 종이가 떨어져 있으면 그것마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활자 중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교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과학책과 소설책을 좋아해 주로 읽었는데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던 안 원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안 원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에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이후 컴퓨터에 흥미를 갖게 됐다.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안 원장은 동 대학원에서 의학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의대 교수가 됐다. 하지만 의사생활을 뒤로하고, 컴퓨터바이러스 백신 연구를 시작, 안티바이러스(백신)를 개발했다. 이후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백신프로그램 연구소인 안철수 연구소를 설립해 10여 년간 경영했다. CEO를 그만두고나서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MBA 2년 과정을 밟았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후폭풍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과 검찰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면서 서로를 향해 날을 겨누는 형국이다. 검찰청은 내년 9월 폐지될 시한부 운명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필두로 이참에 검찰의 뿌리를 뽑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을 등에 업고 버티기에 나선 검찰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아 당분간 양측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검이 대장동 사건에 대한 항소 시한을 넘기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중앙지검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을 비롯해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등 대장동 일당에 대한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은 것이다. 꺾이거나 되치거나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게 됐다. 대장동 개발 비리로 발생한 범죄수익의 국고 환수 규모가 축소될 것이란 해석에도 힘이 실린다. 화살은 곧바로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사건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 등을 받는데, 이미 대장동 민간업자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 만큼 항소 포기로 인해 추가로 다툴 여지를 차단했다는 게 국민의힘의 설명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이 항소 포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재명 면죄부’라고도 주장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대변인은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비서관 4명 중 3명, 법무부 장관 정책보좌관, 법제처장, 국정원 기조실장까지 모두 이 대통령의 변호인 출신”이라며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사건 주요 피고인 정진상, 김용, 이화영 등을 특별 면회하면서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발언으로 회유를 시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역시 “국가의 유례없는 사법 정의 포기 사태는 이재명정부의 책임”이라며 “공소 사실의 핵심에 무죄 선고가 난 사건에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통령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부 출범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한 노만석 검찰총장을 겨냥해서는 책임론이 불거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항소 시한을 앞두고 서울중앙지검은 대장동 일동에 대해 일부 무죄가 선고되는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1심 판결에 대해 “관행대로 항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를 전해 들은 대검 수뇌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노 대행은 지난 9일 “대장동 사건은 일선 검찰청의 보고를 받고 통상의 중요 사건의 경우처럼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후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대행인 저의 책임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의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 역시 대장동 일동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이 선고된 만큼 항소 포기가 ‘적절한 판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항소 포기 지시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화약고에 불붙인 ‘항소 포기’ 후폭풍 이재명·노만석·정성호 몽땅 도마 위로 정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이진수) 법무부 차관에게 대장동 사건 관련으로 어떤 지시를 했느냐’는 국민의힘 배준영 의원의 질문에 “노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 항소를 알아서 포기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정 장관은 총 3번 정도 대장동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언급하며 “(두 번째인) 11월6일 목요일에는 국회에서 예결위 종합질의가 있어 국회에 왔는데, 예결위 끝나고 대검에서 항소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 의견을 들었다”며 “당시 ‘중형이 선고됐는데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란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인 11월7일에도 마찬가지”라며 “저녁에 예결위가 잠시 휴정돼 검찰에서 항소할 것 같다는 구두 보고를 식사 중에 받았고, 그날 저녁 예결위가 끝난 후 최종적으로 항고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부연했다.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대목을 놓고 국민의힘은 “신중한 검토(판단)가 곧 항소 포기인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법무부가 사실상 외압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이 8글자에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다”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며 검찰에 지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일선 검사를 중심으로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영석 대검찰청 감찰1과 검사는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를 통해 “검찰 역사상 일부 무죄가 선고되고 엄청난 금액의 추징이 선고되지 않은 사건에서 항소 포기를 한 전례가 있었나”라며 이번 결정으로 대장동 일당 등 민간업자에게 수천억원 상당의 범죄수익이 돌아간 점을 꼬집었다. 대장동 사건의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도 “항소 포기로 남욱·정영학을 상대로는 범죄수익을 단 한 푼도 환수할 수 없게 됐고, 김만배를 상대로는 당초 예상 금액의 1/10에 불과한 금액만 추징 선고가 이뤄졌음에도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막힌 타이밍 검찰 안팎에서 책임론이 확산하자 결국 노 대행은 항소 포기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일선 검사들은 ‘검찰총장 권한대행께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항소 포기 과정에 대한 상세 설명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해당 입장문은 박재억 수원지검장을 비롯해 ▲박현준 서울북부지검장 ▲박영빈 인천지검장 ▲박현철 광주지검장▲임승철 서울서부지검장 ▲김창진 부산지검장 등 검사장 18명 명의로 작성됐다. 이들은 “서울중앙지검장은 명백히 항소 의견이었지만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항소 포기 지시를 존중해 최종적으로 공판팀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을 상대로 항소 의견을 관철하지 못하고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면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어제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의 항소 의견을 보고받고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뒤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책임 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하담미 수원지검 안양지청장 ▲최행관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신동원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등 8개 대형 지청을 이끄는 지청장들도 집단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번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지시는 그 결정에 이른 경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검찰이 지켜야 할 가치, 검찰의 존재 이유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라며 “그간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입장문, 법무부 장관의 설명만으로는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법적·행정적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정치 검사들의 반란을 분쇄하겠다”며 검찰의 집단 반발을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징계를 예고했다. 현재 일반 공무원은 6단계 징계 처분(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이 가능하지만, 검사는 파면에 해당하는 징계 규정이 없다. 검사에 대한 징계는 검사징계법에 따라 이뤄지는데, 이를 ‘검사 특혜법’이라고 지적하며 폐지하겠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정치 검사들의 반란에 철저하게 책임을 묻겠다”며 사실상 검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김 원내대표는 “정 법무부 장관께 강력히 요청한다. 항명 검사장 전원을 즉시 보직 해임하고 이들이 의원면직하지 못하게 징계 절차를 바로 개시하라”며 “항명에 가담한 지청장과 일반 검사들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후 김 원내대표가 검사징계법 폐지 법률안·검찰청법 개정안을 각각 국회에 제출하면서 사실상 검찰 징계는 당론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항소 포기 논란 이후 박재억 수원지검장에 이어 송강 광주고검장이 연달아 사의를 표명했지만 민주당은 “사표를 수리하지 말고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퇴로를 막았다. 항명? 투쟁? 법무부 내부에서 집단행동에 나선 일부 검사장을 대상으로 평검사 보직이동을 하거나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으로 형사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검찰 측에서는 “보복용 강등”이라는 거센 반발이 나오지만 법무부는 “검사장은 직급이 아닌 보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강등·징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검사장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며 징계의 타당성을 주장했지만, 일선 검사들은 항소 포기 판단 경위에 대해 추가 설명을 요청한 것이 어떻게 항명이냐며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이 앞다퉈 일선 검사장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르던 것과 달리 최근 지도부는 숨 고르기에 돌입한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계속해서 이정부와 대장동을 엮어 공격하는가 하면, 이 대통령의 UAE(아랍에미리트) 순방 성과가 묻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톤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 대통령이 순방을 떠난 17일부터 이틀간 공개 석상에서 검사 항명, 징계 등 관련 현안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 등 일부 최고위원이 내란전담재판부 도입을 주장했으나 당은 “지도부 차원의 의견은 아니”라며 거리를 뒀다. 정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18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검사장 징계 검토 관련 질문에 “어떤 것이 좋은 방법인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을 위해 법무부나 검찰이 안정되는 것”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택했다. 낮은 볼륨을 유지하는 지도부와 달리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한 라디오를 통해 정 법무부 장관의 ‘검찰조직 안정’ 발언에 대한 질문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가는 것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어 “정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와 검찰 전체를 총괄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면서도 “다만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현재 민주당이 내세우는 원칙은 항명 검사에 대한 징계로,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국민 여론이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몰아붙이던 지도부 잠시 숨 고르기 이제는 각개전투…검사들도 ‘부글’ 민주당이 다수 석을 차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는 ‘집단 항명 검사장 18인’ 전원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항소 포기 결정에 반발하는 검사장 18명을 겨냥해 “헌정 질서의 근본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조직의 지휘 감독체계를 정면으로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비판하며 법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일 법사위 여당 간사인 김용민 의원은 조국혁신당·무소속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검찰의 집단 항명은 정치적 집단행동으로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었으며 법이 명백히 금지한 공무의 집단행위, 즉 집단적 항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피고발인 18명은 모두 각 검찰청을 대표하는 검사장급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이 누구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위치에 있다”며 “그런데 이들은 서로 합의해 공동성명을 작성하고 이를 동시에 내부망과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다수가 결집해 실력으로 주장을 관철하려는 집단적 압력 행위”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검사들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권력이 교체됨에 따라 검사의 태도 역시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만일 보수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경우 검사의 날이 다시 이 대통령을 향할 것이란 점에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내년 10월 해체 예정인 검찰청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니던 시절의 관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 검찰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집단이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검사 인사권은 법무부에 있다”며 이번 사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통령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대통령실 외압’은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의 프레임”이라며 “만약 5년 뒤에 검찰이 반기를 들면 그때는 (이 대통령의 거취를) 국민 여론에 맡기면 된다. 지난 몇 년간 수십번의 압수수색과 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를 전부 국민이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피바람 과도기 이 모든 과정을 놓고 최요한 정치 평론가는 “과도기”라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일요시사>를 통해 “검찰이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그 대상을 개혁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이정부는 그걸 시스템으로 헤쳐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혁명은 싹을 자르면 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검사 징계, 검찰개혁을 놓고 같은 진보라 하더라도 결이 다르지 않나. 다양한 논의와 의견을 두들겨 맞춰서 하나의 안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개혁안은 보수도 일정 정도 동의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스템 개혁이라는 건 단칼에 두부처럼 잘리는 게 아닐뿐더러 이정부가 끝날 때까지 (개혁을) 시도하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