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송구영신 특집> 국민이 바라는 재계발 2020 희망가

가시밭길…무소의 뿔처럼 돌진

[일요시사 취재1팀] 김정수 기자 = 저성장 국면을 넘기 위한 재계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예전 같지 않은 업황 속에서 저마다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올해도 어렵다’는 말이 오르내리고 있지만 좌고우면하는 기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신발 끈을 묶어 내달리는 형국이다.
 

▲ (사진 왼쪽부터)구광모(LG그룹)·박정원(두산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지난 12월8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020년 기업 경영 전망 조사’를 발표했다. 응답 기업의 64.6%는 현재 경기상황을 장기형 불황이라고 봤다. 47.4%는 경영계획 기조로 ‘긴축경영’을 꼽았다. 이 중 300인 이상 기업은 50%, 300인 미만 기업은 46.5%였다.

불황 지속
극복 갈망

재계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말에 다다르면서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한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CJ그룹은 재무 안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서 비상경영을 시작했다. 그룹은 CJ헬로와 투썸플레이스에 이어 조 단위의 부동산을 처분, 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매각설에 휩싸이던 이스타항공은 누적적자로 비상경영을 선포한 뒤, 제주항공의 인수 궤도에 올랐다. 보험업계도 실적 악화로 인해 인원 감축과 부서 간 통폐합을 시행하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12월17일 ‘2020년 경제전망 세미나’를 개최했다. 서영경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 원장은 “2020년 성장률은 세계교역 여건과 정보기술·조선 등 주력산업 업황 개선을 고려하면 올해보다는 높을 것”이라면서도 “민간부문 부진이 지속되면서 잠재성장률(2.5%)을 밑돌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장이 더딘 한 해를 보내면서 재계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재계별 불황 타개책들이 이목을 끈다. 당면한 상황이 저마다 다른 만큼 가지각색이다.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곳은 ‘유통업계’다. 온라인·모바일 시장의 활성화로 인한 오프라인 시장의 침체가 가시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통 빅3’로 불리는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이 대표적이다.

변화의 폭이 컸던 곳은 롯데쇼핑이다. 롯데쇼핑은 백화점·마트·슈퍼·e커머스·롭스 등으로 나뉘어 있던 사업부문을 하나의 통합 법인으로 재편했다. 각자 대표체제도 ‘원톱’ 대표이사 체제로 변경됐다.

2020년 경제 전망 부정적 기류 강해
불황 타개책 구비…전념하는 기업들

신동빈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다. 구조 개편은 곧 실적 개선을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롯데쇼핑은 올해 연결기준 3분기 매출액 4조4047억원과 영업이익 876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5.78%, 56% 하락한 수치다.

신 회장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단순히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장의 틀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돼라”고 주문했다.

현대백화점은 ‘세대교체’를 꺼내들었다. 그룹 전반에 생기를 불어넣겠다는 의지다. 현대백화점은 주요 계열사 사장단 인사를 ‘50대 인사’로 채웠다.


그룹은 “그동안 50년대생 경영진의 오랜 관록과 경륜을 통해 회사의 성장과 사업 안정화를 이뤄왔다면, 앞으로는 새로운 경영 트렌드 변화에 보다 신속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문성과 경영능력을 겸비한 60년대생 젊은 경영진을 전면에 포진시켜 미래를 대비하고 지속경영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덧붙였다.

신세계백화점은 ‘대표 맞트레이드’로 관심을 샀다. 신세계백화점과 신세계인터내셔날 대표를 맞바꾼 것. 사측은 미래 준비 강화와 성장 전략 추진에 초점을 맞춰 성과주의, 능력주의 인사를 강화했다는 설명을 내놨다.

이마트의 경우 첫 외부 인사 수혈로 눈길을 끌었다. 이마트는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내며 업계 안팎의 우려를 샀다. 이마트는 경영 컨설턴트 출신이자 ‘전략통’으로 유명한 강희석 사장 체제에 안착, 본격적인 수술에 나서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이마트는 기존 점포 리뉴얼을 통해 수익성 중심의 사업 전략을 재편할 계획이다.

변화와 혁신
과감한 결단

화학 업계는 부진을 거듭했지만 반등 모멘텀이 비교적 선명하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으로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가 감소했지만 사업 구도 다각화를 통한 탈출로 모색이 눈길을 끈다. ‘화학 3사’ 한화케미칼과 LG화학, 롯데케미칼이 그 주인공이다.

한화케미칼은 신사업 분야의 지속적 투자로 시황 악화 속에서 호실적을 내놨다. 한화케미칼은 ‘태양광 사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낙점한 바 있다. 회사의 지난 3분기 영업이익은 1524억원. 지난해와 비교해봤을 때 62.56%가 증가한 값이다. 이 중 태양광 부문이 656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성장을 견인했다.

태양광은 한화케미칼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것으로 점쳐진다. 윤재성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태양광 사업 실적은 주력 지역인 미국·유럽의 설치 수요 호조로 견조한 흐름을 보일 것”이라며 “미국의 캘리포니아 신축 주택에 대한 태양광 패널 설치 의무화 등의 영향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되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LG화학은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적극적이다. LG화학은 올해 3분기 전지 사업 부문서 직전 분기 대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전지사업은 LG화학이 꼽은 신성장 동력이다. 지난해 회사의 연구개발(R&D) 비용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이중 30% 이상이 배터리 분야에 투자됐다.

롯데케미칼은 사업 다각화에 힘을 싣고 있다. 회사는 1월1일부터 롯데첨단소재와 합병할 예정이다. 대표 체제는 ‘통합케미칼’ 대표이사 아래 기초소재사업 대표와 첨단소재사업 대표체제로 첫 발을 내딛는다. 롯데케미칼은 두 사업 분야의 특성이 상이한 만큼 각 영역서 핵심 역량을 효과적으로 강화, 사업 포트폴리오를 탄탄하게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 최태원(SK)·허태수(GS그룹) 회장

동시에 롯데케미칼은 비핵심 사업 구조조정 등을 정리하며 체질 개선에 나선다. 실제로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0월 흑자를 기록하던 영국 자회사를 중장기 비전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매각했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내수시장의 침체와 글로벌 경제 불황으로 판매 부진을 거듭했다. 업계는 신차를 출시해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

현대·기아차는 모두 10개의 신차를 출시할 예정이다. 또한 현대·기아는 해외 시장에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하이브리드차’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아의 하이브리드차는 이스라엘서 9년 연속 판매 1위의 고지를 바라보는 등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르노삼성자동차 역시 신차 계획을 앞두고 있다. 연말까지 노조의 절반가량이 출근했지만 파업으로 인한 생산 차질의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의 르노삼성 부산공장 일대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 지정 검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지난해 4월 전북 군산이 한국GM 공장 폐쇄 등으로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쌍용차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이후,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 기존 대출 상환 연장을 요청했다. 쌍용차는 11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다. 다만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그룹의 지원으로 반등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구체적인 투자 계획이 잡힌 것은 아니지만 아난드 마힌드라 마힌드라그룹 회장은 투자 의향을 밝힌 바 있다.

준비 사업
하나둘 정비

2020년을 앞두고 재계 그룹 총수들의 메시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위기 극복을 위한 변화와 혁신, 쇄신을 당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1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32주기 추도식에 참여해 ‘경영위기 타개’와 ‘사업 보국’ 등을 언급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선대 회장님의 사업보국 이념을 기려 우리 사회와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자”며 “지금의 위기가 미래를 위한 기회가 되도록 기존의 틀과 한계를 깨고 지혜를 모아 잘 헤쳐나가자”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그룹은 2019년을 내우외환과 함께했다. 국내에선 이 부회장의 국정 농단 관련 재판으로, 대외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등과 함께했다. 또 노조 와해 의혹으로 임원들이 법정 구속된 것과 관련, 이례적인 대국민 사과문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사실상 무노조 원칙을 폐기한 셈이다. 반성과 사회 가치에 부합하는 노사관계 형성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평가가 나온다.


LG그룹 4세 경영 시대를 열고 있는 구광모 회장은 ‘디지털 전환’을 화두로 꺼내 들었다. 구 회장은 새해부터 임직원들과 디지털을 통해 소통하기로 했다. 디지털 시무식은 LG그룹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구 회장은 저성장 국면에 취임해 소탈과 실용주의라는 키워드를 대표했다. 그룹 임원인사서 그 단면이 여실히 드러났다. 구 회장은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적 인사를 단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그룹 체질 개선과 미래 먹거리 발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인사라는 분석도 있었다.

구 회장은 잔뼈가 굵은 원로 부회장들과 함께 안정적으로 경영을 이끌어가면서도 파격 인사를 통해 변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LG그룹은 지난 12월14일 구자경 명예회장의 별세로 2020년은 ‘구광모 체제’가 더욱 공고하게 될 공산이 크다.

성장 동력 확보 그룹 총수 고심↑ 
각양각색 전략…새해부터 총력전

SK그룹에선 ‘행복 경영’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최태원 SK 회장은 2019년 한 해를 ‘행복 토크’로 마무리했다. 최 회장은 지난 12월19일 행복 토크 100회를 마무리 했다. 이동한 거리만 4만여km에 달한다. 1회 평균 2시간30분 정도의 시간을 들일 만큼 최 회장은 행복 경영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10월 제주도서 열린 ‘2019년 CEO(최고경영자) 세미나’ 폐막연설서 “성공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해지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며 행복 경영의 가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행복전략을 언급하며 “행복을 추구할 때도 정교한 전략과 솔루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각 계열사가 수립 중인 행복전략의 고도화를 주문했다. 실제로 SK그룹의 연말 임원인사는 행복경영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조직의 재설계라고 알려졌다.

두산그룹은 일찌감치 연초 일정을 잡아뒀다. 두산그룹은 2020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서 열리는 ‘CES 2020’에 참가한다. 두산의 CES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룹은 지향하는 새로운 미래상을 선보이고, 브랜드를 글로벌 시장에 널리 알리기 위해 참여했다고 밝혔다. 또한 미래 성장의 해법을 전통 제조업과 정보기술 간 업종 경계가 무너지는 최첨단 기술로부터 찾겠다고 밝혔다.
 

두산그룹은 지난 10월 면세점 사업에 손을 떼면서 전자 소재와 신성장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점을 드러낸 바 있다. 사업구조 개편을 통해 수익성이 떨어지는 분야는 과감히 정리하고, 신성장 동력으로 발판을 다듬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된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주력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의 부진으로 친환경 에너지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내세운 셈이다.

GS그룹은 허창수 회장의 용퇴 이후 ‘디지털 혁신’을 맞게 됐다. 허 회장은 “지금은 글로벌 감각과 디지털 혁신 리더십을 갖춘 새로운 리더와 함께 빠르게 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 대응해 GS가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솟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도전하는 데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하며 물러났다.

성장 동력
구비 마쳐

허태수 GS그룹 신임회장은 ‘디지털 혁신 전도사’ ‘트렌드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회사 GS랩스를 설립, 그룹 혁신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인공지능과 블록체인 기술 등 4차 산업과 관련된 최신 경향들을 그룹 전반에 소개하기도 했다. 허 회장은 GS홈쇼핑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실리콘밸리 혁신기업의 업무방식을 가장 먼저 적용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신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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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