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파란만장 풍운아 정두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7.22 10:09:01
  • 호수 12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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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할 말은 했던 ‘왕의 남자’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정두언 전 의원이 세상을 등졌다. 향년 62세. 그는 그동안 진정한 ‘보수의 품격’을 보여주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이명박정권의 일등 개국공신서 가수, 음식점 사장, 시사평론가까지 다양한 변신을 거쳤던 풍운아였다. 
 

▲ 고 정두언 의원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정두언 전 의원이 지난 16일, 북한산 자락길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정 전 의원은 이날 오후 2시30분쯤 자신의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인근 북한산 자락길 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 오후 3시42분쯤 집에서 정 전 의원의 유서를 발견한 부인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 추적으로 오후 4시25분쯤 정 전 의원을 찾아냈다.

4선 도전 실패
극심한 우울증

경찰은 가족에 미안하다는 취지의 유서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정 전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전 의원의 갑작스런 비보에 여야 정치권 인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날 사고 현장을 직접 찾은 자유한국당 김용태 의원은 “동료 의원으로서 정 전 의원의 명복을 빌면서 한 말씀 드리겠다”며 “정 전 의원이 우리 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참으로 깊고도 선명하게 남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였고, 현장 정치를 떠나고도 정치에 도움이 되고자 평론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며 “정 전 의원이 정치발전을 위해 꿈꿨던 꿈을 동료 의원들과 후배 정치인들이 꼭 이뤄내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이날 구두 논평을 내고 “2016년 정계은퇴 이후 합리적 보수 평론가로서 날카로운 시각과 깊이 있는 평론으로 입담을 과시했던 그를 많은 국민들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정 전 의원은 새누리당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정권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노련한 전략가였다”며 “이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며 이명박정권과 등을 지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정치인이기도 했다”고 고인의 삶을 평했다.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 역시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바미당 김정화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생산적인 의정활동을 하던 정치인,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맹활약하던 시사평론가로서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이 비통하기만 하다”고 애도를 표했다. 이어 “부디 하늘에서는 걱정과 고민 없이 편히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다시 한 번 고인을 애도하며,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을 유가족에게도 각별한 위로를 전한다”고 말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진짜 합리적 보수 정치인이었다. 저와는 절친도 아니고 이념도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였다”고 회고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우리는 MB(이명박)에게 잘못 보인 탓에 저축은행 비리에 연관됐다며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무죄로 명예회복돼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때때로 부인과 개업한 식당에 가면 예의 쑥스러운 웃음으로 감사해하던 정두언 의원. 영면하길”이라고 덧붙였다.

총선 낙마 이후 우울증 앓아
홍은동 야산서 숨진 채 발견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정 전 의원 측에 조문 메시지를 전했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든 개국공신이자 저격수였다. 이 전 대통령의 측근인 이재오 전 의원은 장례식장을 찾아 근조화환을 전달했다. 

이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이)원래 평소에 (정 전 의원과)한 번 만나겠다는 이야기를 감옥 가시기 전에도 했다”며 “이 전 대통령께서 오늘 조문을 오려고 생각을 했는데, 병원 이외에 다른 곳에는 보석으로 출입과 통신을 하는 것이 제한돼있어 변호사를 통해서 대신 말을 전했다”고 했다.


그는 “조문을 하려면 재판부에 신청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며칠이 걸려서 못 오게 돼서 아주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고인과 가까웠던 이들은 “정 전 의원이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했다. 그의 우울증은 4선 의원에 도전했던 서울 서대문구(을) 지역서 낙선한 뒤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 전 의원은 이 지역구에서만 내리 3선에 당선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일명 ‘왕의 남자’로 불릴 만큼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불출마를 주도하며 MB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는 MB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3월 이상득 전 의원을 겨냥해 ‘권력을 사유화한다’며 출마 포기를 권유했다.

당시 총선에 출마하려던 29명의 총선 후보자는 정 전 의원 주도로 ‘이상득 불출마’에 서명했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이 전 의원에게 총선에 나가지 말 것을 권유한 배경에 대해 “그 길만이 진정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손해를 보는 것은 참아도 이치에 안 맞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미래가 불투명해져도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명분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MB정부 개국공신
권력사유화 비판 

정 전 의원을 포함한 29명의 총선 후보자가 지속해서 이 전 의원을 설득하자 그는 결국 ‘2선 후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 전 의원과 이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사실상 끝났다.

2007년 이명박 대선후보 경선캠프서 기획본부장, 대선 당시엔 전략기획총괄기획팀장 등을 지내며 얻은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후광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 2012년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대법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고 정치적으로 재기했지만, 당내 입지가 줄어든 정 전 의원에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4선 도전에 실패한 정 전 의원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바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서 그는 “내가 악몽을 꾼 건가. ‘여기가 어디지’ 싶더라고”라며 “힘든 일이 한꺼번에 찾아오니까 정말로 힘들더라고. 지옥 같은 곳을 헤매다가 눈을 떴어. 한동안은 여기가 어딘지 가늠이 안 되더라”고 말했다.
 

▲ 고인이 된 정두언 전 의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이 본디 욕심 덩어리인데, 그 모든 바람이 수포로 돌아가 ‘이 세상서 할 일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삶의 의미도 사라진다. 내가 이 세상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급성 우울증이 온 거지”라며 우울증이 심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털어놨다.

구치소서 출소한 뒤의 심경에 대해서는 “세상에 나오니 점점 도루묵이 되더라. 나를 기다리는 건 배신이었다. ‘이제 정두언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평온이 깨지고 분노와 증오가 서서히 생겨났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1957년 3월6일 서울서 운전기사인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방 후 만주서 귀국, 사촌 형과의 인연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됐다. 

신민당의 정치인이자 6·3사태 당시 한일협정 반대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던 정성태 전 국부회의장은 아버지와 같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같은 항렬의 친척이었다. 정 전 국회부의장은 그의 아버지를 각별히 여겼고 정 전 의원은 그를 큰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정 전 의원은 청소년기에 가정이 불우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서대문 모래내 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다. 정 전 의원은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자기애 또는 자존심을 드러냈다”며 자신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1972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부터 화장실서 30분~1시간 정도 노래를 부를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으나 가수의 꿈을 접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록밴드를 결성했다. 보컬그룹명은 ‘spirit of 1999’였는데 세기말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정두언은 학과서 스타급이었다. 술자리나 회식 또는 연수회를 가면 언제나 사회를 맡았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 뒤 진로를 고민하며 도서관을 다니던 중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 성적은 우수했지만 실습점수가 0점이었다. 구청 인사 담당자와 시비가 붙어 해당 관계자가 앙심을 품고 영점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다른 인사 담당자가 그를 합격시켰다. 


계속된 변신
굴곡진 인생

그 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 합격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인 장교 복무 대신 사병으로 자원입대해 강원도 양구의 부대서 복무하고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 제2장관을 지내던 시절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을 거쳤다. 노 전 대통령이 문화체육부장관으로 발령나자 정 전 의원은 그를 따라 문화체육부에 배속돼 올림픽 개최 지원업무를 담당했다.

1985년 1월에는 국무총리실로 발령, 청소년대책반서 근무했다. 그 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비서관으로 있을 때 그는 상사의 순직을 봤다.

1987년 4월에는 4·13 호헌 결사 반대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해 정 전 의원은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KBS 방송의 드라마급 주연을 뽑는 KBS 탤런트 공채에 응시, 4단계 최종 시험까지 합격했지만 아내와 가족들의 만류로 스스로 포기했다.

1991년 미국으로 특별 유학을 간 그는 2년간의 연수를 받았으며 이 기간 중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면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로 옮겨 국무총리실 정무 비서관,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등을 지냈다.

2000년 정 전 의원은 이회창의 권고로 정계 입문을 결심했으나 같은 해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다가 장재식 후보에게 2000표 차이로 낙선하고 만다. 이듬해 그는 공무원 생활의 경험을 근거로 총리 등 행정부 고위 관료의 부끄러운 실태를 공개하고 비평한 책인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를 발간했다.

정치권 충격에 빠져
여야 애도 물결 쇄도

같은 해 교통사고로 2개월간 병상에 입원했던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찾아와 캠프 합류를 권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그에게 “공직생활 20년을 채워 연금을 타도록 해주겠다”며 영입했다고 한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의 콘셉트가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 준비했다. 

민선 3기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당선으로 정 전 의원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돼 2002년 7월1일부터 2003년 11월1일까지 일했다. 2003년 서울특별시 프로축구단 추진위원장에 위촉됐고, 2004년 서대문(을)구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 기획본부장과 전략기획 총괄팀장으로 활동하며, 이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 전 의원은 17대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으로 지명받았다. 
 

2008년에는 18대 총선에 재선한다. 2010년 7·14전당대회서 지도부에 입성, 최고위원으로서 중도개혁과 보수혁신의 길을 주장했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2009년에는 가수로 4집 앨범까지 냈다.

주호영과 박형준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으며, 대선 이후 여당의 지도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인물이 됐다. 하지만 정 전 의원은 정권 초기부터 ‘형님(이상득 의원)의 권력 사유화’를 정면서 거론했고, 줄기차게 당내 실세(이재오 전 의원)를 공격했다. 

그는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 지도부를 향해 독설을 퍼붓는 몇 안되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었고, 이 때문에 이 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MB정권 내내 변방서 머물러야 했다. 

정치인·가수
평론가·사장

정 전 의원은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는 박근혜 국정 농단이 터진 2016년 11월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이후 정치를 접고 시사평론가로 종횡무진 활동했다. 정 전 의원은 지난해 초 “17대 대선 때 이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큰 실수를 해서 각서까지 써주고 무마했다”고 주장해 MB와의 악연을 이어갔다. 지난해 재혼한 그는 서울 마포구서 일식집을 개업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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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은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