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16범’ 조세형 파란만장 도벽사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19.06.17 10:41:54
  • 호수 1223호
  • 댓글 0개

손 못 씻고…좀도둑 된 대도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조세형이 아직 손을 못 씻고 제 버릇 남 주지 못했다. 또 도둑질을 했는데 벌써 16번째였다. 그의 나이는 올해 81세다.
 

▲ 조세형

1970~80년대 고위 관료와 부유층의 집을 털며 ‘대도’라는 별칭을 얻은 조세형씨가 또다시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11일 서울 광진경찰서는 조세형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조세형은 지난 1일 오후 9시경 서울 광진구에 있는 한 다세대 주택 1층의 방범창을 뜯고 침입해 소액의 현금을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고아 출신
10대 때 절도

경찰은 조세형이 훔친 금액은 몇만원에 불과했지만, 상습법인 점을 감안해 구속한 것으로 밝혔다. 조세형이 절도 혐의로 수갑을 찬 것은 16번째다.

조세형은 1938년 전북 전주서 태어났다. 고아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도둑질에 눈을 떴던 조씨는 5세 때 남의 깡통을 들고 밥을 얻어먹으러 갔다가 은수저를 훔친 것이 첫 도둑질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16살 무렵 본격적인 도둑질을 시작했고, 이후 20차례 교도소에 들락거렸다. 1970년대 조세형의 범행을 기록한 판결문을 살펴보면 ‘조씨는 뒷담을 넘고 베란다를 통해 2층 방에 침입했다. 뒷담을 넘고 그 집 안방 쇠창살을 드라이버로 뜯어냈다’고 기술했다. 


당시 조세형은 “어릴 때 배를 채우기 위해 훔쳐 먹다보니까 절도 습관이 몸에 뱄다”고 말한 바 있다. 

법원 판결문에 나온 절도 기록도 다양하다. 36세이던 1974년 5월15일 오후 8시쯤 서울 신당동의 한 평범한 가정집에 침입해 녹음기 한 대 등 모두 5만4100원 상당을 훔쳤다. 1975년 1월31일에는 서울 중구 필동 한 가정집에 들어가 다이아몬드 반지 등 105만원의 상당을 훔치기도 했다.

같은해 2월 조세형 서울 종로구 명륜동 양모씨 집 창문을 뜯고 침입해 금고를 드라이버를 부수고 현금·수표·금·비취목걸이·다이아몬드 반지 등 2600만원어치를 훔쳐 내연녀를 통해 700만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다세대주택 방범창으로…
고작 몇 만원 훔치고 수갑

그런데 1980년대 초반 언론서 조세형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현대판 홍길동, 대도 등 다양한 별명이 붙으면서 단순한 잡범이 아닌, 의로운 도둑의 이미지가 생긴 것이다.

1982년 12월 형사들은 “그는 유명인사의 집만 골라 값비싼 귀중품을 훔치는 간 큰 도둑이었으며, 돈을 쓰는 것도 한 달에 1000만원 이상 뿌렸다는 게 주변인들의 얘기”라고 말한 바 있다. 

1983년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가 훔친 5.75캐럿 물방울 다이아몬드의 주인이 5공 시절 고위층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야당은 정부를 공격할 거리를 찾다가 들고 일어나자, 5공에 반감을 갖고 있던 대중은 그를 강자를 노리는 대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조세형은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서 ‘권력층을 대상으로 대담한 절도 행각을 벌인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이왕에 범죄 하는 것 큰 집 들어가야 가지고 나올 것도 있을 것 아니냐”며 “물방울 다이아몬드의 주인은 청와대 경호처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신모씨였다”고 답했다. 

조세형은 “거기서 여러 가지 수십억원어치 보석을 들고 나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물방울 다이아였다”며 부유층에 대한 불신도 드러냈다. 이어 “솔직히 정상적인 수입으로 그렇게 했겠냐”며 “나보다 더 도둑놈들이고 부정축재로 쌓은 것이겠지”라고 덧붙였다.

조세형이 부유한 큰집을 노렸던 것은 허를 찌른 선택이라는 의견도 있다. 1980년 초반의 큰집은 의외로 문단속이 허술한 경우가 많았고, 집이 크면 한쪽 방에서 웬만한 소리를 내도 발각되는 일이 드물고, 큰 집일수록 낮에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부유층 털어
사회적 이슈

당시 조세형은 부유층의 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서민들은 통쾌하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지만, 경찰과 사법당국은 긴장했다. 결국 전국 경찰에 비상령이 내려졌고 182년 11월 조세형은 경찰에게 최포된다. 체포될 당시에도 조세형은 절도 전과 11범이었다.

1982년 11월에 체포된 조세형은 1983년 4월 결심공판이 열리던 날 탈주를 결심한다. 10여차례에 걸쳐 5억여원 절도 혐의로 기소된 그는 탈주 계획을 세운다. 법정에서 구치소로 돌아가기 전 피의자들은 구치감서 대기한다. 조세형은 구치감에 머무는 동안 경비가 허술해지는 순간을 노렸다.

담당 교도관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구치감 문을 부수고 복도로 나와 한쪽 수갑과 포승줄을 푼 뒤, 복도 환풍기를 뜯고 탈출한 것이다. 조세형은 탈주한 뒤 서울역, 후암동, 장충동 등 도심 일대를 활보했다. 또 5차례나 주택에 몰래 침입해 음식과 현금, 옷가지를 훔치는 대담함도 보였다. 

1983년 4월19일 오전 10시쯤 서울 장충동 주택가 골목. 18세 청년은 수배범을 발견하고는 10여분간 미행한 후,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을 발견한 조세형이 가정집으로 뛰어들어 지붕을 타며 필사적으로 도주했지만, 이미 장충동 일대에 포위망을 쳐놓은 상태였다.
 

10여분 동안의 추격전 끝에 경찰과 조세형은 막다른 곳에서 대치했다. 조세형이 한 가정집에 침입해 집주인의 아들을 붙잡아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조세형의 손에는 드라이버와 쇠톱이 들려 있었다. 경찰은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얼마 후 조세형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쏘지 마라. 자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가스총을 발사했고, 조세형이 흠칫하며 인질을 놓친 사이 권총 한 발이 발사됐다. 영화 같은 ‘대도 탈주사건’이 6일 만에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또…또…
의적 미화?

조씨는 체포 후에도 화제가 됐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절도 다섯가지 원칙 때문이었다. 첫째, 나라 망신을 주지 않기 위해서 외국인의 집은 털지 않겠다. 둘째, 다른 절도범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내가 판검사 집은 들어갔더라도 그냥 나오겠다. 셋째, 연장은 사용하지 않는다. 넷째, 가난한 사람 돈은 훔치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훔친 돈의 30-40%는 헐벗은 사람을 위해서 사용한다. 


조세형의 검거는 당대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조씨에게서 압수된 현금이나 수표, 귀금속 등을 도난당했다는 피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난당한 금품 회수보다도 ‘탐관오리’나 ‘졸부’라는 손가락질과 뒤따를 세무조사를 더 두려워서 한 탓이다.

상류층 부패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조세형을 의적이라며 추켜세웠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대중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여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당시 이해구 치안본부장이 “조세형은 훔친 돈으로 불우한 이웃을 도와준 적은 없다. 술집 등에서 호스티스들에게 돈을 마구 뿌려 횡재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발표했다.

조세형은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나눠줬는지는 구체적으로 진술한 적이 거의 없다.

최중락 전 총경은 “나눠주길 뭘 나눠주나. 자기 먹기도 바쁜데. 내가 보기에는 없었다. 항상 붙들리면 그렇게 얘기했다. 자기 미화하려고…”라고 말했다. 그를 옹호했던 한 법조인도 “그가 일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줬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정상참작을 받기 위한 목적이 컸다”며 “‘도둑질 했지만 베풀어 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본다”고 언급했다.

70~80년 부유층 털어 유명
신앙 등 제2의 삶도 공염불


조세형의 전력도 기부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도둑질을 하면 여성과 함께 호화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1982년 검거 직전엔 부자들만 가입할 수 있는 사파리 클럽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1997년 출소한 조세형은 보안업체서 수당을 받으면서 자문위원 일도 하고 대학 강의도 했다. 교회서 간증 요청을 받아서 신앙 활동하기도 하고 또 선교 단체 설립한 후에 사회사업도 시작하면서 개과천선의 아이콘이 됐다. 그는 전과자들을 종교로 인도하고 사회 복귀를 돕는 활동도 하면서 절도와는 연을 끊는 듯 했다. 하지만 조세형은 선교활동을 떠난 일본 도쿄 시부야 주택가서 빈집 세 곳을 털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징역 3년6개월형 선고를 받는다. 조세형은 수형 생활을 모범적으로 해 감형을 받았고, 2004년 3월에 다시 출소했다. 2005년 서울에 있는 한 치과의사 집에 들어가서 금품을 훔쳐 징역 3년 선고받았다. 2008년 출소하고 2년이 지난 2010년에도 장물 사건과 관련해 또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에는 70대의 나이에 노루발못뽑이 등을 이용해 강남 고급 빌라를 털다 실형을 선고받은 데 이어, 출소 5개월 만인 2015년 용산의 고급 빌라서 재차 남의 물건에 손을 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출소했다.

진짜 여든까지
다시 도둑질

손수호 변호사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서 “조세형 본인이 의적이었다면서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경찰이나 법원이 공식적으로 대도나 의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며 “대도, 소도 둘 다 없으며 오로지 절도만 있다”고 말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전자발찌 무용론 “길게 채우면 효과 없다”

재범 우려가 있는 범죄자 신체에 5년 넘게 전자장치(전자발찌)를 부착하는 경우 재범률이 오히려 올라간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법무부가 전자감독제도 시행으로 성폭력 범죄 재범률을 약 90% 떨어뜨렸다고 발표한 내용과 차이가 있어 주목된다. 

장기 전자발찌 부착자에 대한 관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으로 파악되면서 보다 정교한 정부의 감독과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 13일 한국형사정책학회의 학술지 ‘형사정책’에 실린 ‘전자장치 부착제도의 효과성에 대한 재검토’ 논문에 따르면 5년 이상의 전자발찌 중장기 부착기간을 선고받은 범죄자들의 재범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선고기간이 1년 이상 5년 미만인 경우 2531명 중 123명(4.9%)이 재범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비해 5년 이상 10년 미만 부착을 선고받은 경우는 1682명 중 183명(10.9%)이 재범을 저질러, 재범률이 1∼5년 부착과 비교하면 2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또 10년 이상 부착을 선고받은 경우도 1028명 중 71명(6.9%)이 재범을 저질렀다.

5년 이상 부착자들의 경우, 분석 대상인 전체 8430명 중 378명(4.48%)인 재범률 전체 평균을 앞지른 만큼 논문은 5년 이상의 전자발찌 중장기 부착이 오히려 재범률을 높이는 역효과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부착 선고 기간이 1년 미만인 경우 재범률은 3189명 중 1명(0.03%)에 불과했다.

논문은 1년 미만 전자장치 부착기간 선고가 주로 재범 위험성이 약한 가석방(가출소, 가종료 포함) 범죄자에 집중됐다고 하더라도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5년 이상 채우면 재범률 증가
1~5년 부착에 비해 2배 이상

따라서 해당 논문은 전자발찌 제도에 대해 “‘단기 충격요법’으로 전자장치 부착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 논문은 “법무부가 전자감독제도 시행 전인 2004∼2008년 14.1%에 달한 성폭력 범죄 재범률이 제도 시행 후 2009∼2017년 1.9%까지 떨어졌다며 내세운 운영 성과 발표에 실증적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번 논문은 전자감독제도가 도입된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성폭력·살인·강도 등 범죄자 8430명의 전자장치 부착 선고 기간에 따른 재범률을 분석한 결과다.

전자감독제도 도입 당시 최대 5년이었던 전자장치 부착 선고 기간은 지금까지 4차례 개정을 거쳐 가중처벌을 적용할 시 45년 상한으로 늘었다. 

강민구 변호사는 논문서 “전자감독제도 제정법대로 5년 범위에서 재범 위험성에 따른 전자장치 부착기간을 선고해야 한다”며 “전자장치를 단기 충격요법으로 사용해 줄어든 관리인력으로 1대1 전담 보호 관찰관제도를 확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환>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