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칸의 남자’ 봉준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6.03 10:17:20
  • 호수 1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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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만에 일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봉준호 감독이 칸국제영화제서 최고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최초로 100년 역사상 최고의 쾌거다. 단편영화로 일찍이 충무로의 주목을 받았던 봉 감독은 떡잎부터 달랐다. 
 

▲ <기생충>으로 ‘칸의 남자’가 된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제72회 칸국제영화제서 최고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단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저녁 프랑스 칸 뤼미에르극장서 진행된 폐막식서 올해 수상 결과를 발표했다. 

독특한 감독
위대한 배우

봉 감독의 <기생충>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장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의 <영 아메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등 21개 작품 가운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결정됐다”며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기생충>이라고 발표했다. 

봉 감독은 수상자로 호명되자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기생충>의 주연 배우인 송강호와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프랑스의 대배우 카트린 드뇌브에게 트로피를 받은 봉 감독은 “메르시(Merci·감사합니다)”라고 짧게 프랑스어로 인사한 뒤 “언제나 프랑스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큰 모험이었다.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 작업은 저와 함께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스태프와 제작·투자사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무엇보다 <기생충>은 위대한 배우들이 없었다면 찍지 못했을 영화다.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동반자인 송강호의 멘트를 꼭 듣고 싶다”며 배우 송강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송강호는 “배우로서 인내심과 슬기로움, 그리고 열정을 가르쳐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 분들께 이 영광을 바치겠다”며 한국 배우들에게 수상의 공을 돌렸다. 

다시 마이크 앞에 선 봉 감독은 “저는 12세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은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다. 이 트로피를 손에 만질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다”고 수상 소감을 마쳤다.  

<기생충>은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가족과 고급 저택에 사는 부유한 가족, 두 가족을 통해 빈부격차로 양극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 계층·계급 갈등, 부유층의 허영과 위선·무관심, 개인주의와 공동체 의식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시상식 직후 열린 기자회견서 <기생충>에 대해 “재밌고 유머러스하며 따뜻한 영화”라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그는 수상작 선정에 대해 “우리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유로 수상작을 결정하지 않는다. 감독이 누구고 어느 나라 영화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영화 그 자체로만 평가한다”고 강조했다.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200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첫 진출한 이후 19년 만에 거둔 쾌거다. 아시아 국가로선 일본과 중국, 이란, 태국에 이어 다섯 번째 영예, 아시아 영화로선 아홉 번째 수상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에 맞이한 경사라 더 의미가 깊다.

<기생충>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심사위원 만장일치 최고상 수상 영예  

200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영화는 칸영화제와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1984년 이두용 감독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1989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정도였다. 


칸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던 것과는 달랐다. 베를린영화제는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에 은곰상을, 베니스영화제는 1987년 <씨받이>(감독 임권택)의 배우 강수연에게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여했다.

칸영화제와 한국영화의 본격적인 인연은 2000년에 시작됐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최초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후 한국영화는 칸의 단골손님이 됐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한국영화 두 편이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2004년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감독 홍상수) 두 편이 경쟁부문에 초대됐다. 2007년엔 <밀양>(감독 이창동)과 <숨>(감독 김기덕)이, 2010년엔 <시>(감독 이창동)와 <하녀>(감독 임상수), 2012년엔 <돈의 맛>(감독 임상수)과 <다른 나라에서>(감독 홍상수)가 나란히 경쟁부문 초대장을 받았다. 

2016년에도 <아가씨>(감독 박찬욱)와 <그후>(감독 홍상수)가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2017년에는 <옥자>를 포함해 16편이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16전17기인 셈이다.

2002년 <취화선>이 칸영화제서 감독상(임권택)을 받으면서 수상의 물꼬가 텄다. 2004년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 2007년 <밀양>의 배우 전도연이 최우수여자배우상, 2009년 <박쥐>(감독 박찬욱)가 심사위원상, 2010년 <시>가 각본상을 받았다. 2010년 <하하하>(감독 홍상수), 2011년 <아리랑>(감독 김기덕)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각각 수상했다. 

지난해까지 경쟁부분 상 중에서 받지 못한 상은 황금종려상과 최우수남자배우상뿐이었다. 단편부문에선 문병곤 감독이 2013년 <셰이프>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봉 감독은 그동안 칸영화제의 주요 초대객 중 한 명이었다. 2008년 옴니버스영화 <도쿄!>와 2009년 <마더>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다. 2011년엔 신진 감독들을 대상으로 한 황금카메라상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문 대통령도 
“보고 싶다”

2017년 온라인 스트리밍업체(OTT) 넷플릭스 제작 영화 <옥자>가 경쟁부문에 처음 올랐으나 온오프라인 동시 공개라는 넷플릭스의 사업 방식에 프랑스 영화계가 반발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영화제 초반 “극장서 상영되지 않을 영화에 상을 줄 수 없다”고 공언하면서 일찌감치 수상권서 멀어졌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지녔음을 공인받았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더구나 칸영화제를 안방처럼 드나드는 세계적 감독들을 물리치고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번 수상은 더욱 가치가 빛난다. 장르영화에 상 주기를 꺼리는 칸영화제의 기존 관성을 뚫고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최고상을 받았다는 것도 수상의 의미를 높인다.

수상 소식에 각계각층의 축전도 이어졌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도 봉 감독을 축하했다.

영진위는 “<기생충>의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물론이고, 영화의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성취를 위해 영화인들이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어 “올해 한국영화가 태동한 지 100년을 맞이한 해에 얻은 결과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며 “축적된 한국영화 역사 100년의 저력이 그 바탕이며 한국영화를 열정적으로 아끼는 국민의 성원이 함께 이룬 성과”라고 덧붙였다.

봉 감독의 수상 소식에 문재인 대통령도 빨리 영화를 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기생충>이 지난 1년 제작된 모든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며 “매우 영예로운 일”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이어 “무엇보다 열두 살 시절부터 꿔온 꿈을 차곡차곡 쌓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우뚝 선 봉준호라는 이름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는 우리의 일상서 출발해 그 일상의 역동성과 소중함을 보여준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삶에서 찾은 이야기들이 참 대단하다. 이번 영화 <기생충>도 너무 궁금하고 빨리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추기경)도 봉 감독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염 추기경은 “(수상 소식에) 국민 모두 기쁨과 자긍심을 느꼈다”며 봉 감독과 배우, 스태프 등 관계자 모두의 노고에 감사 인사를 밝혔다. 이어 “특히 영화 <기생충>을 제작하는 동안 표준근로계약을 지켰다는 감독님의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며 “영화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의 노동 환경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아 더욱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정치권 역시 봉 감독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여당과 바른미래당은 봉 감독이 ‘주52시간제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 영화제서 최고상을 수상했다”며 “봉 감독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높은 수준의 감성으로 해석했고, 이번 수상으로 한국영화계의 경사를 이뤘다”고 축하의 말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봉 감독의 수상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주52시간제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영화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불편함을 봉 감독이 감내했기 때문이다. 좋은 제작과정이 훌륭한 영화로 이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배우 출신인 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도 축하인사를 전했다. 오 원내대표는 “2019년이 한국영화가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문화 예술이 세계문화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뜻깊은 수상을 하게 됐다”며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과 저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송강호, 이선균 배우, 모든 관계자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금의환향’
영화계 경사

바른미래당 채이배 정책위의장은 “영화계 노동현장은 여전히 열악하고 장시간 노동에 방치된 경우가 많다”며 “영화 <기생충>은 근로기준법 등을 지키며 만든 작품이기에 더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제작 환경이 한 걸음 나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로 봉 감독은 <기생충> 촬영 시 노동 사각지대에 있는 스탭들과 표준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생충>은 스탭들의 표준근로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완성된 작품임이 알려져 팬들의 더욱 큰 지지를 받은 바 있다. 봉 감독은 “<기생충>만 유별난 건 아니고 2~3년 전부터 영화 스탭들의 급여나 그런 건 정상적으로 정리가 됐다”며 “영화인들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 칸 영화제

봉 감독은 열악한 근무 조건서 힘겹게 일하고 있는 영화 스텝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이 같은 인식과 실천에 의해 영화 <기생충>은 스텝 모두가 주 52시간제를 준수하는 등의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영화를 촬영했다. 이번 봉 감독의 수상은 그동안 ‘근로기준법 등을 준수하면 제대로 된 작품을 찍을 수 없다’는 사용자 논리가 횡행하던 한국 영화계 세태를 보기 좋게 날려버린 쾌거이기도 하다.  

봉 감독은 1969년 9월14일 대구 출생으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래픽디자이너이자 교수인 봉상균씨, 어머니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둘째 딸인 박소영씨다. 형인 준수씨는 서울대 교수, 누나인 지희씨는 패션디자이너이자 국제문화협회 이사로 지식인과 예술가 집안의 출신인 셈이다. 아내는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정선영씨고, 아들 봉효민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됐다.

봉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영화아카데미서 1년 동안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학보 <연세춘추>에 시사만평을 그리기도 했다. 봉 감독은 습작 시절부터 일찌감치 충무로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는데, 1994년 제작한 단편영화 <프레임 속의 기억> <지리멸렬>은 영화 애호가들 사이서 화제를 일으켰다. 이들 작품은 1994년 밴쿠버와 홍콩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위대한 배우 없으면 못 찍었을 것”
충무로 잔칫집 분위기…각계서 축전

봉 감독은 31세였던 2000년 블랙코미디 <플란다스의 개>로 입봉했다. 사라진 개를 둘러싼 일대 소동극을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들춘 이 영화는 홍콩 국제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과 뮌헨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봉 감독은 여러 인터뷰서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의 기호에 대해 절실히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봉 감독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2003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서였다. <살인의 추억>은 그해 최대 흥행을 거두고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 면에서 특히 호평을 받았다. 이후 <괴물>로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역대 흥행 신기록을 달성했다.

2009년에는 스릴러 영화 <마더>로 칸영화제에 초청됐고, 2013년 제작한 SF 영화 <설국열차>는 167개국에 판매돼 역대 한국영화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2017년 넷플릭스 영화 <옥자>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전 세계 190개국을 통해 <옥자>를 공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국제비평가연맹상과 디렉터스 컷 시상식 감독상, 국제환경미디어협회상 작품상 수상, PETA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며 세계적으로 위상을 떨쳤다. 

봉 감독은 지난 10년간 정부 차원서 관리했던 영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영화감독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가 낸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봉 감독은 이명박·박근혜정권 당시 감시와 배제의 타깃이었다.  

당시 국정원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82명 중 60명이 영화인이었는데, 봉 감독을 포함해 이창동, 박찬욱, 문성근, 권해효, 문소리, 김민선, 유준상 등이 망라됐다. 정권 초기부터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대중적인 파급력이 높은 영화를 집중 단속하려고 했던 결과였다.

이·박 시절
블랙리스트에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보고서에는 이명박·박근혜정권서 블랙리스트 대상으로 지목한 상업영화 15편의 목록과 그 이유가 나온다. 봉 감독의 작품으로는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가 포함돼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서도 호평받은 이 작품들을 두고 블랙리스트에서는 “반미 및 정부의 무능을 부각시키며 국민 의식을 좌경화”(<괴물>)한다거나 “공무원·경찰을 부패 무능한 비리 집단으로 묘사해 국민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주입”(<살인의 추억>)한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긴다”(<설국열차>)고 단정했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수상작

▲황금종려상-봉준호 <기생충>
▲심사위원대상-마티 디옵 <아틀란틱스>
▲심사위원상-라즈 리 <레 미제라블>, 클레버 멘돈사 필로 <바쿠라우>
▲남우주연상-안토니오 반데라스 <페인 앤 글로리>
▲감독상-장 피에르·뤼크 다르덴 <영 아메드>
▲여우주연상-에밀리 비샴 <리틀 조>
▲각본상-셀린 시아마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온 파이어>
▲특별심사위원언급상-엘리아 술레이만 <잇 머스트 비 헤븐>
▲황금카메라상-세사르 디아스 <누에스트라 마드레스>
▲단편 황금종려상-바실리스 케카토스 <더 디스턴스 비트윈 어스 앤 더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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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