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칸의 남자’ 봉준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6.03 10:17:20
  • 호수 1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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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만에 일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봉준호 감독이 칸국제영화제서 최고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최초로 100년 역사상 최고의 쾌거다. 단편영화로 일찍이 충무로의 주목을 받았던 봉 감독은 떡잎부터 달랐다. 
 

▲ <기생충>으로 ‘칸의 남자’가 된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제72회 칸국제영화제서 최고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단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저녁 프랑스 칸 뤼미에르극장서 진행된 폐막식서 올해 수상 결과를 발표했다. 

독특한 감독
위대한 배우

봉 감독의 <기생충>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장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의 <영 아메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등 21개 작품 가운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결정됐다”며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기생충>이라고 발표했다. 

봉 감독은 수상자로 호명되자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기생충>의 주연 배우인 송강호와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프랑스의 대배우 카트린 드뇌브에게 트로피를 받은 봉 감독은 “메르시(Merci·감사합니다)”라고 짧게 프랑스어로 인사한 뒤 “언제나 프랑스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큰 모험이었다.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 작업은 저와 함께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스태프와 제작·투자사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무엇보다 <기생충>은 위대한 배우들이 없었다면 찍지 못했을 영화다.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동반자인 송강호의 멘트를 꼭 듣고 싶다”며 배우 송강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송강호는 “배우로서 인내심과 슬기로움, 그리고 열정을 가르쳐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 분들께 이 영광을 바치겠다”며 한국 배우들에게 수상의 공을 돌렸다. 

다시 마이크 앞에 선 봉 감독은 “저는 12세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은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다. 이 트로피를 손에 만질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다”고 수상 소감을 마쳤다.  

<기생충>은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가족과 고급 저택에 사는 부유한 가족, 두 가족을 통해 빈부격차로 양극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 계층·계급 갈등, 부유층의 허영과 위선·무관심, 개인주의와 공동체 의식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시상식 직후 열린 기자회견서 <기생충>에 대해 “재밌고 유머러스하며 따뜻한 영화”라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그는 수상작 선정에 대해 “우리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유로 수상작을 결정하지 않는다. 감독이 누구고 어느 나라 영화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영화 그 자체로만 평가한다”고 강조했다.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200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첫 진출한 이후 19년 만에 거둔 쾌거다. 아시아 국가로선 일본과 중국, 이란, 태국에 이어 다섯 번째 영예, 아시아 영화로선 아홉 번째 수상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에 맞이한 경사라 더 의미가 깊다.

<기생충>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심사위원 만장일치 최고상 수상 영예  

200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영화는 칸영화제와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1984년 이두용 감독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1989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정도였다. 


칸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던 것과는 달랐다. 베를린영화제는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에 은곰상을, 베니스영화제는 1987년 <씨받이>(감독 임권택)의 배우 강수연에게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여했다.

칸영화제와 한국영화의 본격적인 인연은 2000년에 시작됐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최초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후 한국영화는 칸의 단골손님이 됐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한국영화 두 편이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2004년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감독 홍상수) 두 편이 경쟁부문에 초대됐다. 2007년엔 <밀양>(감독 이창동)과 <숨>(감독 김기덕)이, 2010년엔 <시>(감독 이창동)와 <하녀>(감독 임상수), 2012년엔 <돈의 맛>(감독 임상수)과 <다른 나라에서>(감독 홍상수)가 나란히 경쟁부문 초대장을 받았다. 

2016년에도 <아가씨>(감독 박찬욱)와 <그후>(감독 홍상수)가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2017년에는 <옥자>를 포함해 16편이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16전17기인 셈이다.

2002년 <취화선>이 칸영화제서 감독상(임권택)을 받으면서 수상의 물꼬가 텄다. 2004년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 2007년 <밀양>의 배우 전도연이 최우수여자배우상, 2009년 <박쥐>(감독 박찬욱)가 심사위원상, 2010년 <시>가 각본상을 받았다. 2010년 <하하하>(감독 홍상수), 2011년 <아리랑>(감독 김기덕)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각각 수상했다. 

지난해까지 경쟁부분 상 중에서 받지 못한 상은 황금종려상과 최우수남자배우상뿐이었다. 단편부문에선 문병곤 감독이 2013년 <셰이프>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봉 감독은 그동안 칸영화제의 주요 초대객 중 한 명이었다. 2008년 옴니버스영화 <도쿄!>와 2009년 <마더>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다. 2011년엔 신진 감독들을 대상으로 한 황금카메라상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문 대통령도 
“보고 싶다”

2017년 온라인 스트리밍업체(OTT) 넷플릭스 제작 영화 <옥자>가 경쟁부문에 처음 올랐으나 온오프라인 동시 공개라는 넷플릭스의 사업 방식에 프랑스 영화계가 반발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영화제 초반 “극장서 상영되지 않을 영화에 상을 줄 수 없다”고 공언하면서 일찌감치 수상권서 멀어졌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지녔음을 공인받았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더구나 칸영화제를 안방처럼 드나드는 세계적 감독들을 물리치고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번 수상은 더욱 가치가 빛난다. 장르영화에 상 주기를 꺼리는 칸영화제의 기존 관성을 뚫고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최고상을 받았다는 것도 수상의 의미를 높인다.

수상 소식에 각계각층의 축전도 이어졌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도 봉 감독을 축하했다.

영진위는 “<기생충>의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물론이고, 영화의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성취를 위해 영화인들이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어 “올해 한국영화가 태동한 지 100년을 맞이한 해에 얻은 결과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며 “축적된 한국영화 역사 100년의 저력이 그 바탕이며 한국영화를 열정적으로 아끼는 국민의 성원이 함께 이룬 성과”라고 덧붙였다.

봉 감독의 수상 소식에 문재인 대통령도 빨리 영화를 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기생충>이 지난 1년 제작된 모든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며 “매우 영예로운 일”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이어 “무엇보다 열두 살 시절부터 꿔온 꿈을 차곡차곡 쌓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우뚝 선 봉준호라는 이름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는 우리의 일상서 출발해 그 일상의 역동성과 소중함을 보여준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삶에서 찾은 이야기들이 참 대단하다. 이번 영화 <기생충>도 너무 궁금하고 빨리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추기경)도 봉 감독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염 추기경은 “(수상 소식에) 국민 모두 기쁨과 자긍심을 느꼈다”며 봉 감독과 배우, 스태프 등 관계자 모두의 노고에 감사 인사를 밝혔다. 이어 “특히 영화 <기생충>을 제작하는 동안 표준근로계약을 지켰다는 감독님의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며 “영화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반의 노동 환경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아 더욱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정치권 역시 봉 감독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여당과 바른미래당은 봉 감독이 ‘주52시간제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 영화제서 최고상을 수상했다”며 “봉 감독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높은 수준의 감성으로 해석했고, 이번 수상으로 한국영화계의 경사를 이뤘다”고 축하의 말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봉 감독의 수상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주52시간제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영화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불편함을 봉 감독이 감내했기 때문이다. 좋은 제작과정이 훌륭한 영화로 이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배우 출신인 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도 축하인사를 전했다. 오 원내대표는 “2019년이 한국영화가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문화 예술이 세계문화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뜻깊은 수상을 하게 됐다”며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과 저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송강호, 이선균 배우, 모든 관계자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금의환향’
영화계 경사

바른미래당 채이배 정책위의장은 “영화계 노동현장은 여전히 열악하고 장시간 노동에 방치된 경우가 많다”며 “영화 <기생충>은 근로기준법 등을 지키며 만든 작품이기에 더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제작 환경이 한 걸음 나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로 봉 감독은 <기생충> 촬영 시 노동 사각지대에 있는 스탭들과 표준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생충>은 스탭들의 표준근로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완성된 작품임이 알려져 팬들의 더욱 큰 지지를 받은 바 있다. 봉 감독은 “<기생충>만 유별난 건 아니고 2~3년 전부터 영화 스탭들의 급여나 그런 건 정상적으로 정리가 됐다”며 “영화인들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 칸 영화제

봉 감독은 열악한 근무 조건서 힘겹게 일하고 있는 영화 스텝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이 같은 인식과 실천에 의해 영화 <기생충>은 스텝 모두가 주 52시간제를 준수하는 등의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영화를 촬영했다. 이번 봉 감독의 수상은 그동안 ‘근로기준법 등을 준수하면 제대로 된 작품을 찍을 수 없다’는 사용자 논리가 횡행하던 한국 영화계 세태를 보기 좋게 날려버린 쾌거이기도 하다.  

봉 감독은 1969년 9월14일 대구 출생으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래픽디자이너이자 교수인 봉상균씨, 어머니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둘째 딸인 박소영씨다. 형인 준수씨는 서울대 교수, 누나인 지희씨는 패션디자이너이자 국제문화협회 이사로 지식인과 예술가 집안의 출신인 셈이다. 아내는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정선영씨고, 아들 봉효민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됐다.

봉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영화아카데미서 1년 동안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학보 <연세춘추>에 시사만평을 그리기도 했다. 봉 감독은 습작 시절부터 일찌감치 충무로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는데, 1994년 제작한 단편영화 <프레임 속의 기억> <지리멸렬>은 영화 애호가들 사이서 화제를 일으켰다. 이들 작품은 1994년 밴쿠버와 홍콩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위대한 배우 없으면 못 찍었을 것”
충무로 잔칫집 분위기…각계서 축전

봉 감독은 31세였던 2000년 블랙코미디 <플란다스의 개>로 입봉했다. 사라진 개를 둘러싼 일대 소동극을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들춘 이 영화는 홍콩 국제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과 뮌헨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봉 감독은 여러 인터뷰서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의 기호에 대해 절실히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봉 감독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2003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서였다. <살인의 추억>은 그해 최대 흥행을 거두고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 면에서 특히 호평을 받았다. 이후 <괴물>로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역대 흥행 신기록을 달성했다.

2009년에는 스릴러 영화 <마더>로 칸영화제에 초청됐고, 2013년 제작한 SF 영화 <설국열차>는 167개국에 판매돼 역대 한국영화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2017년 넷플릭스 영화 <옥자>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전 세계 190개국을 통해 <옥자>를 공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국제비평가연맹상과 디렉터스 컷 시상식 감독상, 국제환경미디어협회상 작품상 수상, PETA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며 세계적으로 위상을 떨쳤다. 

봉 감독은 지난 10년간 정부 차원서 관리했던 영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영화감독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가 낸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봉 감독은 이명박·박근혜정권 당시 감시와 배제의 타깃이었다.  

당시 국정원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82명 중 60명이 영화인이었는데, 봉 감독을 포함해 이창동, 박찬욱, 문성근, 권해효, 문소리, 김민선, 유준상 등이 망라됐다. 정권 초기부터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대중적인 파급력이 높은 영화를 집중 단속하려고 했던 결과였다.

이·박 시절
블랙리스트에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보고서에는 이명박·박근혜정권서 블랙리스트 대상으로 지목한 상업영화 15편의 목록과 그 이유가 나온다. 봉 감독의 작품으로는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가 포함돼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서도 호평받은 이 작품들을 두고 블랙리스트에서는 “반미 및 정부의 무능을 부각시키며 국민 의식을 좌경화”(<괴물>)한다거나 “공무원·경찰을 부패 무능한 비리 집단으로 묘사해 국민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주입”(<살인의 추억>)한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긴다”(<설국열차>)고 단정했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수상작

▲황금종려상-봉준호 <기생충>
▲심사위원대상-마티 디옵 <아틀란틱스>
▲심사위원상-라즈 리 <레 미제라블>, 클레버 멘돈사 필로 <바쿠라우>
▲남우주연상-안토니오 반데라스 <페인 앤 글로리>
▲감독상-장 피에르·뤼크 다르덴 <영 아메드>
▲여우주연상-에밀리 비샴 <리틀 조>
▲각본상-셀린 시아마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온 파이어>
▲특별심사위원언급상-엘리아 술레이만 <잇 머스트 비 헤븐>
▲황금카메라상-세사르 디아스 <누에스트라 마드레스>
▲단편 황금종려상-바실리스 케카토스 <더 디스턴스 비트윈 어스 앤 더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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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