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십년감수한 여영국 창원성산 당선인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4.09 09:05:37
  • 호수 12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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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 대역전’ 극적으로 여의도 입성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개표 마감을 불과 0.02% 남겨둔 상황서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결과가 뒤집혔다. 끈질긴 추격 끝에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정의당이 극적으로 고 노회찬 의원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 여영국 당선인 ⓒ정의당 캠프

지난 3일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서 정의당이 고 노회찬 의원의 지역구인 경남 창원성산 탈환에 성공했다. 노회찬 재단의 이사인 여영국 후보는 막판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중앙선거관리 위원회에 따르면 여 당선인은 개표가 완료된 오후 11시30분 기준 4만2663표를 얻어 득표율 45.75%를 기록하며 당선됐다. 한국당 강기윤 후보는 4만2159표를 얻어 득표율 45.21%로 2위로 내려앉았다. 

4만2663표
4만2159표

4·3국회의원 보궐선거 창원시 성산구 결과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3일 저녁 8시30분께 개표가 시작된 이후 밤 11시24분까지는 줄곧 강 후보가 앞섰다. 최대 2000표 이상 앞서기도 했다. 단 한 차례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밤 11시24분 개표율 99.98%를 기록하는 순간 순위가 뒤집혔다. 계속 2위를 달리던 여 당선인이 강 후보를 역전해 1위로 올라섰다. 결국 여 당선인이 4만2663표를 얻어 4만2159표를 얻은 강 후보를 504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투표율은 0.54%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굳은 표정으로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여 당선인은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눈물을 쏟았다. 함께 지켜보던 당직자들은 “여영국”을 소리쳐 부르며 환호했다. 


앞서 정의당 최석 대변인은 오후 10시가 넘어도 역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우리의 힘이 부족해 승리를 안겨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이라며 패배를 인정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여영국 당선인은 당선이 확정된 직후 “이 승리는 위대한 창원 시민의 승리이다. 권영길, 노회찬으로 이어온 진보정치의 자부심에 여영국을 넣어줘서 감사하다. 총선을 1년 앞둔 이번 선거를 통해 제1 야당으로 교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선거 결과는 반칙 정치, 편가르기 정치에 대해 창원 시민이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 앞으로 국회서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 국회를 개혁하겠다.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온 힘을 바치겠다. 오로지 국민과 민생만 바라보고 전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줄곧 한국당 후보에 뒤지다
개표 0.02% 남겨두고 역전승

이번 보궐선거서 창원시 성산구의 유권자는 18만3934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9만4101명이 투표해 투표율 51.2%를 기록했다. 민중당 손석형 후보(3540표·3.79%), 바른미래당 이재환 후보(3334표·3.57%), 대한애국당 진순정 후보(838표·0.89%), 무소속 김종서 후보(706표·0.75%) 순이었다. 

경남 통영고성 지역구의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정점식 후보는 개표율 80%을 넘은 오후 11시45분 기준 3만7711표(59.19%)를 득표해 당선이 확실시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양문석 후보는 2만3306표(36.58%)로 2위를 차지했다. 정 후보와 양 후보는 개표 시작부터 끝까지 20%포인트 이상의 격차를 보였다. 

이날 함께 치러진 기초의원 보궐선거에서 경북 나·라 선거구는 한국당이, 전북 전주 라 선거구는 민주평화당이 승리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표 현황에 따르면 오후 10시30분 기준 전북 전주시 라 선거구서 민주평화당 최명철 당선인은 총 투표수 7157표 중 3104표(43.65%)를 획득하며 전주시의원 배지를 거머쥐었다. 2위인 민주당 김영우 후보자(2143표·30.14%)를 961표 차로 따돌렸다. 

경북 문경 나 선거구에서는 한국당 서정식 당선인이 총 투표수 8900표 중  5069표(57.25%)를 얻어 당선됐다. 이어 무소속 신성호 후보(2258표·25.50%), 민주당 김경숙 후보(1057표·11.93%)가 뒤따랐다. 

문경 라 선거구에서는 한국당 이정걸 후보가 당선됐다. 총 투표수 6723표 가운데 62.03%(4137표)를 얻었다. 무소속 장봉춘 후보는 2532표(37.96%)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4·3보궐선거는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다. 경남 창원성산에선 민주당과 정의당의 단일 후보인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경남 통영고성에선 한국당 정점식 후보가 승리했다. 보수와 민주진보 진영이 나란히 1석씩 나눠 가졌다. 득표수와 정국 등을 고려하면 정당별 셈법이 복잡하다는 분석이다. 

노회찬 정신
이어받는다

4·3보궐선거 결과는 범여권과 야권이 각각 1대 1로 마무리됐지만 여권에서는 위기감이 감지된다. 문재인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비토(Veto: 거부권)  표심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정의당 후보로 단일화한 경남 창원성산의 경우 진보 진영 후보가 크게 앞설 것으로 예상됐지만 신승을 거뒀다. 보수 강세 지역으로 분류된 통영고성에서는 예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당인 민주당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한국당은 이번 보궐선거를 일찌감치 ‘문재인정권 심판’으로 규정하고 선거 기간 내내 정부·여당의 실정을 파고드는 데 전력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통영고성 지원 유세서 거듭 ‘경제 폭망론’을 꺼내며 “정점식 후보를 뽑아 망가진 지역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지역구에만 국회의원 후보를 낸 민주당은 양문석 후보 지원을 위해 ‘예산 폭탄’ 공약 등 집권당 메리트로 승부했지만 끝내 표심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의 지역구였던 창원성산에서는 정의당과 민주당이 ‘정치공학적 단일화’라는 비판 속에서도 여 당선인을 단일 후보로 내세워 합동 작전을 펼쳤다. 낙승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숨을 죽이며 개표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개표 중반까지 밀리던 여 후보는 개표 막판에서야 극적인 역전을 이뤘다. 진보 성향이 강한 지역서 정의당 후보로 단일화했음에도 고전한 것이다. 탈원전 정책 등 정부의 경제 실정이 지역 경제를 망가뜨렸다는 한국당의 심판론 공세가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선거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우리로선 선전한 선거”라고 자평했다. 

사실 이 선거구는 한국당에게 불리한 요소가 있었다. 정의당 고 노회찬 의원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당은 막판에 ‘축구장 선거유세’ 논란에 휩사이며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이번 선거는 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리더십을 검증하는 첫 번째 무대이기도 했다. 선거를 앞두고 “패배하면 황교안 책임론 나올 것(4월3일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란 예측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서 한국당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면서 황 대표는 체면을 세우게 됐다. 

여당 입장에선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됐다. 민주당에겐 민생 법안 처리와 청와대의 인사검증 논란 등 야당을 넘어야 풀 수 있는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선거 결과와 관련해 민심을 잘 살피겠다”고 했다. 


옐로카드를 받은 여권은 국정운영 기조에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서 전국적인 압승을 거둔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민심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집권 3년 차를 맞아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당장 내년 총선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전환 또는 대대적인 인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당내서 나온다. 앞으로의 현안을 두고 당내 여러 계파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공개적으로 쏟아져나올 가능성도 있다.

진보 정당서 
한 우물만… 

이번 보궐선거에서 여야,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서 총선까지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당장 한국당은 인사 참사의 책임을 물으며 조국 민정수석 등 청와대 인사 검증 라인의 교체와 장관 후보자 지명 철회 요구를 이어갈 전망이다. ‘진보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창원성산에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편 여 당선인이 승리하면서 정의당은 다시 교섭단체 지위를 회복하게 됐다.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나면서 원내교섭단체(20석)의 지위를 잃었던 정의당은 다시 민주평화당(14석)과 정의당(6석)으로 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해졌다. 향후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이 다시 부활해 국회는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 바른미래당과 함께 4당 교섭단체 체계로 국정 전반에 대한 캐스팅보트를 쥐고 목소리를 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6년 노회찬 전 의원이 창원성산 국회의원 후보일 때 상임선대본부장으로 활동한 여 당선인는 “노회찬 정신을 이어받아 책임지고 노 전 의원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며 “민주평화당(14석)과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면 20대 국회의 가장 개혁적인 교섭단체를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여 당선인은 정의당 소속 정치인. 민선 5·6기 경상남도의원을 지냈으며, 제20대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현재 정의당 경남도당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1965년 1월28일(양력) 경상남도 사천군(현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서 태어난 그는 구호국민학교, 축동중학교,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창원대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노회찬 지역구 정의당이 지켰다 
여야 무승부…총선까지 힘겨루기

여 당선인은 1983년에 통일중공업(현 S&T중공업)에 입사했으나 일상적으로 많은 문제를 겪었다. 동료들이 겪는 부당함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던 그는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여 당선인은 노조 활동으로 구속 및 해고됐다. 

여 당선인은 당시 노동운동을 하면서 고 노회찬 의원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87년 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정의당 심상정 의원과 만나 금속연맹, 금속노조에서 함께 활동하며 노동문제를 해결해왔다. 1989년 금성사(현 LG전자)와 효성중공업 노조 투쟁지원으로 다시 구속됐다. 

여 당선인은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하다 수배된 후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투쟁으로 또 다시 구속됐다. 하지만 1986년 통일중공업과 1990년 금성사, 효성중공업 노조 투쟁 지원으로 구속된 사건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조직국장을 맡아 노조활동을 펼쳤던 그는 비정규직과 영세 자영업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위해 정치권에 발을 담갔다. 여 당선인은 2000년대 초 경남지역 ‘노동자 정치 실천단’으로 진보정치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2010년 제9대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 소속으로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후 2014년 제10대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와 경남도의원에 당선됐다. 제10대 경남도의회에서는 유일한 진보정당 소속 도의원이었다. 단 한 명에 불과한 진보정당 정치인이었지만 기득권 정치인과 타협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여 당선인은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의 진주의료원 폐지, 무상급식 폐지, 교육감 소환 허위 서명 사건에 맞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특히 무상급식 중단을 막아내고 고등학교까지 확대하는 주춧돌을 놓기도 했다. 청년발전기본조례를 제정해 경남 청년 정책의 기반을 마련하고, 장애인인권조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고 노회찬 전 의원과 함께 경남의 도시가스 요금 인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정부 비토 표심
범여권 빨간불

도의원 시절에는 홍준표 전 지사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교육감의 지위를 박탈하기 위해 홍준표 전 지사가 임명한 경남도의 고위 공직자, 산하기관장 등 공무원이 개입된 불법 서명 사건에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당시 단식농성을 하던 여 의원에게 홍 전 지사는 “쓰레기가 단식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냐,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막말을 내뱉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홍 전 지사와 무상급식 폐지 철회 요구 등 사사건건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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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