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운설’ 청와대와 풍수지리 대해부

“북악산에 살기 감돈다”

[일요시사 정치팀] 김정수 기자 = 청와대와 풍수지리.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집무실 광화문 이전’이 무산됐다. 공약 파기에 대한 비난이 불거진 가운데 때아닌 풍수지리설이 고개를 들었다. 그간 풍수지리학자들 사이에선 청와대 터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흉지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반박이 치열했다. 양 측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에 궁금증은 증폭되고 있다. 청와대 터는 정말 괜찮은 땅일까?
 

▲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대 대선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소통 부재가 탄핵 정국을 야기했다는 진단에 따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이전, 대국민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책자형 선거공보를 통해 “퇴근 후 시장에 들러 넥타이를 풀고 국민들과 소주 한 잔 나누는 소탈하고 친구 같은 대통령을 꿈꿔왔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11개월 만에 
없던 일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유홍준 자문위원은 지난 4일, 춘추관 브리핑서 광화문 이전 불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유 위원은 이날 “집무실을 광화문 청사로 이전할 경우 청와대 영빈관과 본관, 헬기장 등 집무실 이외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서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경호·의전이라는 게 엄청 복잡하고 어렵다는 사실을 문 대통령도 인지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2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광화문시대위원회는 그렇게 11개월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야당의 비판은 거셌다. 야 4당은 이구동성으로 문 대통령의 공약 파기를 문제 삼았다.


자유한국당 이양수 원내대변인은 “집무실 이전 공약의 취지는 국민과의 상시적 소통이었지만 문 대통령은 취임 후 국민의 목소리조차 듣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바른미래당 김정화 대변인은 광화문 이전 공약을 “현실성 없는 거짓 공약”이라며 “국민을 우롱한 문재인정부는 국민께 사죄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범진보 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평화당 김정현 대변인은 “공약을 못 지키게 됐으면 대통령이 우선 국민들께 경위를 직접 설명하고 사과하는 게 옳다”며 촉구했고,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지난 5일 “국민은 면밀한 검토 없이 제시된 ‘공약(空約)’에 속이 쓰리다”고 비판했다.

여당은 강하게 항변했다. 더불어민주당 조승현 상근대변인은 “모든 이슈에 대해 정치공세로 일관하는 야당서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야 공방이 가열되는 가운데 청와대 터를 둘러싼 풍수지리설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광화문시대 무산되니 풍수 불쑥
민심 흉흉하니 흉지론까지 부상

논란에 단초가 된 것은 광화문시대위원회 유 위원의 발언이었다. 유 위원은 광화문 이전 공약 철회를 설명하던 중 “현재 대통령 관저가 갖고 있는 사용상의 불편한 점이 있다. 나아가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한다면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풍수상 불길한 점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 위원은 웃으며 “수많은 근거가 있다”고 답했다.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이름을 떨친 유 위원은 풍수에 대해서도 나름의 식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풍수가 등장하면서 여파도 거셌다. 지천타천으로 청와대 터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 문재인 대통령

물론 쟁점은 청와대 부지의 길흉 여부다. ‘청와대 흉지설’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은 최창조 전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다. 최 전 교수는 자타공인 풍수지리 전문가로 풍수 관련 서적만 20권 넘게 집필했다. 최 전 교수는 행정수도 계획이 발표될 당시 ‘행정수도 불가론’을 내세우며 아홉 가지 이유를 들어 주목을 받았다.


최 전 교수는 저서 <한국의 풍수지리>를 통해 “청와대 터의 풍수적 상징성은 그곳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영주처이거나 신의 거처”라며 “사람이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으니 나쁠 것도 없지 않느냐고 얘기할 수도 있으나 풍수에서는 결코 인사(人事)가 천도(天道)를 넘보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코에 걸면…
귀에 걸면…

김두규 우석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최 전 교수의 불가론에 대해 반박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17년 12월 <월간 조선> 칼럼을 통해 “최 전 교수는 조선총독들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고 살다가 뒤끝이 안 좋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여기에 풍수술사들까지 덩달아 진지한 성찰 없이 그 내용을 확대시키면서 청와대 흉지설이 굳어졌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신의 거처, 즉 큰 사찰이나 성당이 들어서려면 풍수상 2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터는 흙산이 아닌 돌산이어야 하고, 좌우 산들이 이를 완벽하게 감싸줘야 한다. 김 교수는 두 번째 조건을 지적하며 “내백호와 내청룡의 지맥이 낮고, 서로 교차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터를 둘러싼 길흉 논란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세종 15년의 풍수관리 최양선이 ‘경복궁 이전’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 청와대는 경복궁 터의 일부다.

세종은 황희 등을 비롯한 신하들과 풍수가에게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세종이 직접 북악산에 올라 살펴본 뒤 “경복궁은 길지”라고 결론내렸다.

현재 청와대는 풍수지리학서 이상적인 배치로 여겨지는 배산임수 지형이다. 청와대 뒤편 북악산을 시작으로 좌우엔 각각 낙산과 인왕산이, 청와대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청와대 터는 길지 중의 길지라는 해석이다.

청와대가 명당이라는 주장에는 청와대 경내서 발견된 글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도중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가 발견됐다. 천하제일복지는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을 일컫는 말이다. 바위에 새겨진 글은 약 300∼400년 전 쓰인 글로 추정됐다. 

“그걸 믿어?”
이견도 팽팽

청와대서도 현재 위치를 길지로 보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로 알려진 곳’으로 ‘890년 전 고려시대에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이다. 남경은 고려 3경(개경·서경·남경) 중 하나를 뜻하고, 이궁은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이다. 남경 이궁은 고려시대 숙종 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도 청와대 터는 명당으로 지목됐다. 

반면 청와대 흉지설도 만만치 않다. ‘칠궁’에 대한 주목이 대표적이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 7인의 묘다. 조선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도 여기에 있다. 후궁 7인은 모두 왕을 낳았지만 그들의 위패는 종묘에 모셔지지 못했다. 종묘에 모셔진 건 후궁이 아닌 왕비였다. 


현재 칠궁은 청와대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 연유로 몇몇 풍수학자들은 청와대 터에 ‘한’이 서려 있다고 주장한다. 후궁들은 왕자를 낳고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소외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터가 내시와 무수리의 임시 무덤으로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일부는 이곳이 무인들의 무예시험장소와 전국 유생들의 과거시험 장소였다고 말한다.

청와대가 북악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점도 흉지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북악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다. 풍수학에선 바위가 크고 많은 산을 ‘살기’가 가득한 산으로 본다. 
 

▲ 신년 기자회견 갖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대통령의 말로가 모두 혼탁했던 것 역시 흉지론에 설득력 갖게 한다.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건축가 승효상씨는 지난 2017년 10월 청와대 내부 강연서 풍수지리를 신봉하지 않는다면서도 역대 대통령들의 후일이 좋지 못한 이유에 대해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그리 좋은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역대 대통령 중 그 누구도 임기를 순탄하게 끝내지 못했다. 수사와 구속은 물론이고 탄핵까지 그 결과는 암담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청와대에 들어왔다. 당시 청와대의 이름은 경무대였다. 이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 뒤 6·25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이 끝난 뒤엔 4·19혁명이 있었다.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해 5년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음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선출됐다. 경무대의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게 된 때이기도 하다. 윤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대통령 자리서 물러났다.

역대 대통령 말로 비참…정말 터 때문?
“기운 탓 아닌 사람 탓” 경계 목소리도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게 됐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을 겪었고, 자신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의해 피살당한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1979년 신군부의 12·12사태로 최 전 대통령은 8개월 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 전 대통령은 역대 최단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장악했지만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수의에 고무신을 신고 나란히 법정서 재판을 받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문민정부가 탄생했지만 IMF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 아들의 비리 연루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됐다.

끝이…
가시밭길

다만 일각에선 청와대 흉지론에 대한 맹목적 신뢰와 확대 해석을 경계한다. 국내 풍수학 박사 1호인 이몽일 박사는 <영남일보> 칼럼을 통해 “새 대통령이 나오면 얼풍수들은 으레 그 사람의 조상 묘터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가터를 이 세상의 둘도 없는 대명당으로 미화한다”며 “그러다가 퇴임 시 정쟁이나 비리로 대통령의 위상이 추락되면 그것을 오롯이 ‘청와대의 터’ 탓으로 돌린다”고 비판했다. 이 박사는 “사람의 일을 탓하지 않고 땅을 탓할 때 풍수는 미신이 되고 만다”고 일갈했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집무실 이전 추진 왜?

청와대 집무실 이전은 오랜 기간 단골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청와대 집무실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 후보를 제치고 승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행정수도로 집무실을 이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경호, 의전, 예산 등을 이유로 집무실 이전은 무산됐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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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