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김명일 기자]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한 정치권의 총공세에 바짝 엎드렸던 재계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다. 한 재계관계자는 “요즘 재계를 향한 사회의 분위기는 마치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타도’를 외치며 부자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섬뜩할 때가 많다”며 “스페인마저 구제금융 절차에 들어가는 유럽발 금융위기와 미국경기의 침체, 중국 성장세 둔화 등 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도 정치권에선 대선을 의식해 기업들의 사회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목소리만 커져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는 재계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일갈이었다.
지난 5월30일. 제19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개원 첫날,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이른바 재계를 대변하는 경제5단체는 '제19대 국회의원 당선자 축하리셉션'을 마련했다. 국회 임기 첫날 여야 의원들이 재계와 공식 상견례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치권과 전면전
그러나 참석한 국회의원은 전체 300명 중 100여 명 뿐이었다. 박근혜·문재인 등 여야의 대선주자들은 대부분 불참했다. 원 구성도 못한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개원 첫날부터 재계와 만찬을 즐긴다는 여론의 비판을 의식한 것이다. 이 행사가 처음 열린 17대(2004년)와 18대(2008년) 국회 개원 때는 각각 160여 명의 의원이 참석했었다.
무엇보다 이번 행사에 참석한 각 당의 대표들은 축사를 통해 뼈가 있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우리에겐 골고루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있다"고 했고,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기업에서 얼마나 양극화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했는가 반성할 때가 됐다"고 했다.
행사에 참석한 재계 관계자는 "이번 행사는 경제살리기를 위해 정치권이 힘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인데 오히려 재계의 사회적 역할만 강조하는 정치권에 놀랐다"며 "심지어 재벌개혁을 부르짖던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했던 17대 시절에도 축사에서만큼은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재계를 향한 정치권의 냉랭한 태도가 무척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처럼 날로 확산되는 반재벌 정서에 재계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반재벌 여론과 맞물려 정치권이 불공정행위 규제부터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까지 재계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와 정치권과의 팽팽한 기싸움은 사실상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정치권에 대해서만큼은 재계는 늘 약자였다. 오죽하면 1988년 5공 청문회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불법정치자금에 대해 "힘 있는 사람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고 돈을 냈다"는 발언까지 했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정치권과 전면전을 선언한 현 재계의 태도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여론 뭇매에 뿔난 재계 "더 이상은 못 참아!"
대선주자와 신경전, 문재인 재계에 "오만하다" 일침
정치권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한 재계의 행보는 무척 파격적이다. 재계는 최근 백서 형태의 <차기 정부 정책 건의서>를 발간해 잠정 대선후보군 측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포퓰리즘 대선정국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포석이다. 또 한편으로는 재계가 내놓은 건의사항을 후보군들이 얼마나 수용하는가에 따라 사실상 '대선후보검증'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철저히 중립을 지켜왔던 재계로서는 이례적이다.
뿐만 아니라 재계는 일부 헌법에 대한 개정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 허창수)의 싱크탱크 격인 한국경제연구원이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 적정 소득분배, 시장 지배력 및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주체 간 조화를 위해 정부가 경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 헌법 119조2항에 대해 '남용이 우려된다'는 견해를 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이 조항을 아예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항 삭제에 찬성하는 측은 "경제민주화는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경제활동의 과정과 결과에 멋대로 개입해 자신들이 원하는 상태로 만들겠다는 시도"라며 "이는 전체주의나 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재계는 각 정당의 복지공약을 이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분석한 내용과 대-중소기업 양극화가 대기업의 책임이 아니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잇달아 준비하는가 하면 19대 국회 개원을 맞아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 부당 납품단가 감액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하도급거래 개선정책과 중소기업 사업영역 보호 정책 등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관련 입법안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낸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이같은 재계의 행보에 대해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켜 대선을 앞둔 정치권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민주통합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문재인 의원은 경제민주화 조항 폐지주장에 대해 "대단히 오만한 발상"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새누리당에서도 "경제민주화가 마치 경제를 저해시킨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며 날을 세웠다.
대선정국은 '기회'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이번 싸움이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니냐고 하지만 설사 승산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치권의 공세에 더 이상 반격을 하지 않는다면 대선을 앞둔 각 정당들이 손쉽게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대량으로 쏟아낼 우려가 있다"며 "공개적인 반발을 통해 최소한 여론의 환기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재계에 대한 압박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이룬다고 하지만 오히려 투자심리 저하 등 국내경제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에서도 잘 알고 있다. 재계가 적극적인 행동으로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줘야만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관계자는 "현재 정치권은 대선을 앞두고 하나같이 재계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각 정당과 대선주자들은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결국 기업들의 후원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며 "대선정국은 그런 의미에서 위기이자 기회"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