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대선주자 7인 검증 ①출생(가정환경)

  • 이주현 jhjh1313@ilyosisa.co.kr
  • 등록 2012.06.07 10: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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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환경은 다르지만 이제는 같은 대권주자!

[일요시사=이주현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 주자들이 치열한 대권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정몽준)·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검증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출생과 가정환경을 살펴봤다.


각 주자별 사상과 정치 색깔이 다르듯 검증의 첫 번째 주제로 선정한 출생과 가정환경 또한 판이하게 달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부터 대통령의 딸까지 극명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마치 현재 보이고 있는 지지율 격차처럼 말이다.

자신이 살아오며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는 있지만 출생과 가정환경은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다. 따라서 현재 대중들에게 비쳐지는 모습은 자신이 개척해온 삶의 이미지지만 출생과 가정환경은 숨기고 왜곡하려해도 변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근본 된 본질이다.

이것이 대선주자들에게는 ‘스토리’로 활용 될 수도 있는 반면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선주자 7인의 출생과 가정환경을 살펴보자.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까지

범상치 않은 유년시절 보낸 박근혜
 
먼저 가장 높은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으며 새누리당의 유력대선 주자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익히 알려진 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1952년 2월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에서 육군 정보학교장 박정희 대령(당시)과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육 여사에게는 첫 딸이었으나 박 전 대통령은 이혼경력과 전처의 자제가 있었으므로 박 전 대통령에게는 차녀였다. 형제자매로는 언니 박재옥과 동생 박근령(훗날 박서영으로 개명), 박지만씨가 있다.

박 전 위원장의 본관은 고령박씨로 신라 경명왕의 왕자군 중 한사람인 고령대군 박언성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의 소론 정치인이자 정조 때의 암행어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명했던 어사 박문수는 그의 8대 방조였다.

그 후 그의 가문은 몰락했지만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과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해 육군대장에 이르렀다.

육 여사는 소학교 가정교과목 교사였는데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농토와 수많은 하인과 첩을 거느린 대지주 육종관씨의 외손자였다. 외할아버지는 박 전 대통령을 사위로 삼는 것을 반대했으나 외할머니 이경령과 육 여사가 박 전 대통령의 대구 관사로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 전 위원장이 태어났을 무렵 박 전 대통령은 겨우 여순 사건의 회오리를 벗어나 대구에 집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후 한국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와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유년기를 보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프랑스에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귀국했다.

육 여사의 사후 박 전 위원장은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고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서거에 이어 아버지 또한 암살되었지만 박 전 위원장은 의연하게 대응했고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남동생인 박지만이 2002년까지 사창가와 여관 등에서 윤락녀와 어울리며 상습적인 마약 투약에 빠져 지낸 것 등으로 인하여 맏딸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노동운동으로 해고·고문·구속
입지전적인 인물 김문수

새누리당의 또 다른 대선주자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1951년 8월27일 경북 영천시 임고면에서 평범한 가정의 4남3녀 중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경북 영천초등학교 졸업 후 대구로 유학하여 경북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노동운동을 벌이다 제적됐다.

제적 뒤 고향에서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을 했으며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됐고 80년 광주항쟁의 여파로 회사는 노조해산 정책을 추진해 해고당했다. 이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해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체포, 연행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복직했고 여성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구로2공단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지낸 부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 후에도 노동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노동운동가 전태일 기념 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1985년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출범하자 그는 심상정(현 통합진보당 의원)과 함께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함께 서울 구로구 구로공단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위장 취업노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노동계몽운동을 하던 고대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을 만나 그로부터 마산수출자유지역, 영등포공장 이야기 등 언론에 보도되지 않던 비화 등을 접하며 한국노동계의 현실을 체험하기도 했다.

1986년에 인천시 5·3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2년6개월 형을 선고받아 복역, 1988년 특별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복학해 입학 25년 만인 1994년 뒤늦게 졸업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 6남

보기 드문 엘리트 코스 밟은 정몽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는 1951년 10월27일 부산에서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8남1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서울 장충동 집에서 삼촌과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 워낙 식구가 많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단체 생활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치워지고 없는 것이었다.

장충초등학교를 다닌 정 전 대표는 박근혜 전 위원장과 동기생이자 박 전 위원장의 동생 지만씨의 선배다. 1차 지망인 경기중학교 시험에 떨어져 당시 2차였던 중앙중에 입학했고 3학년 때 반장이 되자 부친인 정 회장이 시멘트 1만 포대를 기증했다.

그는 중앙고에 진학했으며 고교 시절부터 축구·농구·복싱·승마를 했다. 승마와 스키 실력은 대학시절 전국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을 정도다.

고2 때 그는 11일이나 결석했다. 사유는 ‘질병’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복싱을 배운 그는 학교 유도부 선수와 싸워 두들겨 팬 적이 있다. 그 뒤 유도부의 보복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1주일 이상 결석한 것이다.

그는 “이런 일에는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고 결국 등교해 많이 얻어맞고서 매듭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진학한 그는 ROTC 학군단 13기로 병역을 이행했다.

병역을 마친 정 전 대표는 유학길에 올라 경영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정 전 의원은 유학을 생활을 통해 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세계의 리더인 미국과 일본을 이해하게 된 것을 최대 성과로 생각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시절
유치장서 사법시험 합격통지서 받은 문재인

야권의 유력대선주자 문재인 의원은 1952년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남도 흥남출신으로 지역 명문인 함흥농고를 졸업한 수재다.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하다 흥남철수 때 미군 군용함정에 몸을 실어 북한에서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피난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계란행상을 한 어머니의 걱정은 늘 끼니를 때우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이사를 갔다.

태풍 때는 지붕이 날아가 뻥 뚫린 천장 아래서 울어야 했던 일화와 이른 새벽 암표장사를 해보려고 어린 문 의원을 데리고 영도에서 부산역까지 걸어갔지만 차마 아들 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못하고 돌아오며 토마토 한 입으로 허기를 달랬던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문 의원은 “가난은 자신을 강하고 따뜻하게 키운 또 하나의 스승”으로 회고한다.

남항초등학교, 경남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후기로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 72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재학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집회를 주도하다 구속되어 제적당했다.

강제 징집되어 특전 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수중폭파요원으로 활동했다. 복무 중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되기도 했으며 표창도 수차례 받는 모범병사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한 문 의원은 사시 22회에 합격하고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의원은 과거의 구속 및 수감의 전력으로 그가 원하던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의 길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합격했지만 등록금 없어 대학 포기
형들의 도움으로 학업 마친 김두관

김두관 경남지사는 1959년 4월10일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마을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5남1녀 중 다섯 째로 태어났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농민의 아들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더욱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며 가세는 더욱더 기울었고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감당했지만 집안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만 갔다. 운동화를 신어 보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역사책과 위인전 읽기를 좋아했던 김 지사는 고등학교 때 관람 차 들른 <MBC장학퀴즈>에 현장 응모로 참가해 차석을 차지한 수재였다.

국민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2년간 마늘 농사를 지었다. 학업의 뜻을 접지 못한 김 지사는 경상전문대학(현재 경북 전문대학) 행정학과 입학 후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 형들 덕택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큰형은 서독의 광부로 갔고,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둘째형은 남해의 논밭을 지켰으며, 중학교를 나온 셋째형은 기술을 배워 이라크 노동자로 일했다. 형들이 보내준 돈으로 김 지사는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그는 고려대학교 운동권이었던 친동생의 영향으로 민통련 가입, 간사 활동 중 개헌추진본부 충북지구 결성대회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3개월간의 감옥생활 중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귀향해 남해 농민회를 조직했고 아내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끝없는 사회운동과 오랜 수배기간

고문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손학규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1947년 11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사인 아버지를 4살 되던 해 교통사고로 여의고 손 고문과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매동초등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생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한 손 고문은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2학년 때에는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무기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또 무기정학을 받았다.

연이어 무기정학을 받은 손 고문은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학교로 돌아온 손 고문은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해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 고문은 육군 병장 만기 제대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고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오랜 수배생활 도중 암으로 투병중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부음 소식을 접하게 됐다. 하지만 손 고문은 체포될 것을 알고도 주저 않고 어머니의 영정을 찾아 불효의 눈물을 흘렸다.

1979년 부마항쟁 진상 조사시 계엄사령부에 체포되어 김해보안대에 수감. 48시간 취조 없이 구타로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가 박정희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며 목숨을 건졌다.

'책벌레'의 평범했던 학창시절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 안철수

비정치권 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1962년 2월26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창 시절에는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운동 등 특별하게 잘하는 게 있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의 책을 대부분 다 읽을 만큼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 스스로 “활자 난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밝힐 정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학교를 졸업 한 그는 1990년에는 당시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대 재학 중에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백신 프로그램인 V1, V2와 V3를 만들었다. 이후 7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백신을 무료로 제작·배포했다.

대학생 때 만난 부인은 1년 후배로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 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은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안 원장은 한 TV프로에서 군대에 갈 무렵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려 이에 대한 백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군대 가는 날 까지 만들어 V3 최초 버전을 PC통신으로 전송하고 입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무반에서 다른 사람들이 입대 전날 가족들과 헤어진 얘기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족들한테 군대 간다는 말을 안하고 나왔다”고 밝혔다.

안 원장의 아내가 “군대 가는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 업데이트하더니 허둥지둥 지하철 타고 서울역으로 달려가더라. 기차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무지 섭섭했다”고 밝힐 만큼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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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