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일요시사 선정> 2011 이슈메이커 50인②재계 10인

좋은 회장님, 나쁜 회장님, 이상한 회장님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2011년 한해가 저물었다. 늘 그랬듯 재계 역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러나 꼭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각종 비리와 의혹 사이로 마음이 따듯해지는 감동도 전해졌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의문이 있는가 하면 가슴 먹먹한 사연도 있었다. 그야말로 ‘희노애락’이 한데 버무려진 한해였다. 지난 2011년 한해 신문지면을 수놓은 사건과 이슈들을 재계를 호령하는 총수들을 중심으로 풀어봤다.

최태원, 정몽구 통 큰 기부…이건희, 발로 뛰어
이윤재, 담철곤 철창…허창수, 재계서 죄인 취급

<5000억원 통 큰 기부 정몽구>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올해 재계 대표급 ‘좋은 회장님’에 등극했다. 지난 8월28일 5000억원 상당의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그룹 사회공헌재단인 해비치 재단에 출연한 것을 두고서다. 기부액은 저소득층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 사용된다.

사방에서 갈채가 쏟아졌다. 정 회장의 기부가 이처럼 환영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 내로라하는 국내 재벌들의 기부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연말연시나 재난 때 적지 않은 돈을 내놨지만 대부분 기업 차원의 기부였다. 게다가 이마저도 ‘보여주기’나 ‘생색내기’용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정 회장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당연히 돋보일 수밖에 없다.

개인 기부 규모로 사상 최대 액수라는 점 외에도 정 회장의 기부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 재계의 기부문화에 변화를 이끌어 내리란 기대감이 바로 그것이다. 정 회장은 올해 우리 기부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핸드볼인 염원 이뤄준 최태원>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통 큰 기부’에 동참했다. 현금이나 주식을 내놓은 건 아니다. 최 회장은 핸드볼 전용 경기장을 준공해 기부키로 했다. SK그룹은 스포츠 분야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설계·공사비 434억원을 핸드볼협회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전액 부담했다. 국내 기업이 대규모 국민 스포츠 시설을 조성해 사회에 기부한 첫 사례다.

최 회장이 이 같은 결단을 내린 건 전용경기장을 갖는 게 핸드볼인들의 오랜 염원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다. 국내 최고 수준으로 지어달라는 최 회장의 당부에 경기장 내 관람석?전광판?음향설비 등에 최상급 기술과 자재가 투입됐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의 기부가 더욱 빛을 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울산대공원과 세종시 장례문화센터를 조성 및 기부하는가 하면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2009년부터 5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 ‘행복한 학교’ 등 사회적 책임에 앞장서고 있다. 최 회장의 사회적 기여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공공시설 조성 부문만 2000억원대에 달한다. 여기에 사회적기업 지원 기금을 더하면 규모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주역 이건희>

재계 맏형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몸으로 직접 뛰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지난 2월 평창을 찾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실사단 접견을 시작으로 영국 런던 ‘스포츠 어코드’, 스위스 로잔 ‘IOC 테크니컬 브리핑’,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IOC 총회’ 등 유치전의 핵심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1년반 동안 해외 출장을 170일이나 다녔다. 이동거리는 모두 21만㎞, 지구 5바퀴가 넘는 거리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글로벌 그룹의 회장이라는 자존심도 내려놨다. IOC 위원 자격으로 동료위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는가 하면 선약이 있는 IOC 위원을 만나기 위해 1시간30분이나 기다리기도 했다.

각고에 노력 끝에 지난 7월6일 평창이 개최지로 선정됐다. 이날 이 회장은 소리 없이 울먹였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2003년, 2007년 두 번 연속 결선투표에서 평창이 탈락했던 아쉬움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청부폭행 혐의 철창행 이윤재>

좋은 일에 앞장선 ‘착한 회장님’ 들이 있는가하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못된 회장님’도 있다. 그 선두에 있는 건 단연 이윤재 전 피죤 회장. 직원 폭행, 회삿돈 횡령, 청부폭행 등 온갖 더러운 일이 그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문제는 지난 6월 이은욱 전 피죤 사장을 취임 4개월 만에 해고하면서 시작됐다. 이 전사장을 통해 창업자 일가의 전횡이 세상에 알려진 것. 여기에 피죤 전 직원들의 제보도 잇따랐다. 다급해진 이 전 회장은 측근에게 3억원을 건네며 이 전 사장 등의 입막음을 주문했다. 김 이사는 청부폭행을 지시했고 결국 경찰에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국철, 선종구, 조남호, “당최 속을 알 수가 없네”
박태준, 빈손으로 떠났지만 국민 가슴에 영원히


이 전 회장은 재판 과정에서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이 전 사장 등 전 임직원들을 상대로 한 모든 소송도 취하했다. 이 전 회장은 깊이 뉘우치고 있다며 거듭 선처를 부탁했다. 법원은 이 전 회장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의 반성은 진심이 아니었다. 선고에 앞서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이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 사임 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사내이사로 취임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또 후임 대표에 이 전 회장의 딸인 이주연 부회장이 선임됐다. 결국 이 전 회장의 반성은 형량을 낮추기 위한 ‘꼼수’였던 셈이다.

<비자금 혐의 쇠고랑 담철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도 쇠고랑을 찼다. 3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다. 검찰에 따르면 담 회장은 해외 유명작가의 고가 미술품들을 계열사 법인자금 140억원으로 매입해 서울 성북동 자택에 설치했다. 담 회장은 회삿돈으로 고가의 외제 고급 슈퍼카도 굴렸다. 담 회장이 ‘공짜’로 몰고 다녔던 차량들의 가격은 웬만한 집 한 채보다 비싸다. 담 회장은 회삿돈으로 자택에 관리자 8명을 두고 ‘황제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검찰은 담 회장에게 징역 3년6개월을 구형했다. 담 회장 측은 실형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우선 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해 방어에 나섰다. 재계와 법조계에선 역대 최강의 ‘드림팀’이 모였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영장 청구 직전 문제가 된 돈도 변제했다. 담 회장은 법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검찰 측에서 횡령·배임 혐의를 적용한 회삿돈 160억원을 개인 재산으로 전액 갚았다. 이어 경영인으로서 ‘담철곤 업적’을 강조했다. 변호인단은 공판 때마다 해외시장 진출 등의 담 회장 공로를 부각시켰다. 담 회장은 이처럼 ‘아등바등’ 했지만 3년형을 선고받으면서 결국 철창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죄인된 양 비난받는 허창수>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딱히 죄를 짓진 않았다. 그러나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비난을 받고 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할 일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허 회장은 지난 2월 전경련 33대 회장에 올랐다. 당시 ▲초과이익공유제 추진 ▲기업별 동반성장지수 발표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법인세 감세 철회 움직임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 등 재계에 대한 정치권 압박이 거세지던 때였다. 그러나 정작 대기업 입장을 대변해야 할 전경련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기업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갔다.

재계와 정치권 사이에 암운이 짙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허 회장이 ‘마이크’를 든 것은 지난 6월 취임 후 처음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다. 허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노골적인 반기를 들었다. 재계는 전체적으로 허 회장의 쓴소리를 반색했다. 오랜만에 대기업들의 입장을 시원하게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도 잠시. 허 회장을 여의도로 호출하는 등 발끈한 정치권이 잔뜩 벼르자 전경련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심지어 정부·정치권과 보조를 맞추거나 눈치를 보는 기류마저 감지됐다. 이후 지금까지도 허 회장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재계에선 허 회장이 그동안 쌓아온 전경련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비난이 나오고 있다.

<정계 로비 폭로한 이국철>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이상한 회장님’도 있다. 정계 로비를 폭로하며 정계의 핵으로 떠오른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회장의 ‘폭로’가 시작된 건 지난 10월. 첫 번째 폭로 대상은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었다. 이후 폭로 대상은 늘어났다. 이 회장은 이명박 정권에서 ‘왕차관’으로 불리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이 접대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회장이 공개한 ‘비망록’에는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과의 만남, 대검 고위 관계자 등에게 5억 원을 현금으로 전달한 일 등이 나와 있다. 비망록은 이 회장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검증과 사실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폭로의 목적이다. 이 회장은 신 차관과 인간적으로는 둘이 형 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회장은 신 차관을 사회적으로 살인했다. 상식적으론 생각하기 힘든 모순이다. 이를 두고 여러 설들이 오가고 있지만 아직 폭로의 목적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짜고 치는 고스톱 선종구>

선종구 하이마트 회장은 돌연 하이마트를 매각키로 결정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선 회장과 유진그룹은 지난 11월 경영권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러던 지난 11월30일 하이마트 주주총회 직전 극적인 화해를 했다. 이날 주총에선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이 재무 총괄을, 선 회장이 영업 총괄을 맡는 각자대표 체제를 의결했다.

모든 것은 수습된 듯 보였다. 갈등의 핵심이던 유경선 회장의 이사 선임 문제가 해결됐고, 경영진과 대주주간 갈등으로 기업 가치 훼손을 우려하던 시장은 주가 반등으로 화답했다. 그러던 지난 12월1일 선 회장은 돌연 재매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은 경악했다.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를 놓고 입장 정리에 고심했던 기관투자자들은 불쾌한 반응 일색이다. 이들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투자자들도 초대형 매물폭탄을 꼼수로 막았다며 분개하는 모습이다. 1, 2대 주주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비난도 쏟아져 나왔다. 선 회장은 표면적으론 ‘비전 있는 주주를 찾기 위해서’라는 매각 사유를 밝혔지만 그 진짜 속내는 안개에 가려있다.

<골치 아프면 한국 뜨는 조남호>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도 생각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의 처세를 두고서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지난해 12월15일 사측이 노조에게 400명의 정리해고자 명단을 통보하면서 본격화 됐다. 이후 노사는 한치의 물러섬 없이 대립각을 세웠다. 갈등은 고조됐고 사태는 여야 정치권까지 확대됐다.
그 동안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조 회장은 그야말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청문회 요구를 받은 직후인 지난 6월17일 도망치듯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약속한 날짜에 귀국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사측도 조 회장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했다. 출장을 핑계로 댔지만 도피성 외유라는 게 전반적인 시각이었다.

복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자 지난 8월10일 조 회장이 돌아왔다. 출장길에 오른 지 54일 만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도 정리해고 원칙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켰다.

8월18일 열린 청문회는 그야말로 ‘조남호 난타전’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조 회장은 구조조정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을 지켰다. 이처럼 완고한 의지를 지켜오던 그는 지난 11월9일 돌연 한진중고업 노사가 94명의 해고자를 재고용하는데 합의했다. 끝까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회장님이다.

<쇳물처럼 뜨겁게 살다 간 박태준>

국민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 회장님도 있었다.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13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10년 전 수술했던 흉막섬유종 후유증으로 흉막 전폐절제술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박 명예회장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1960년대, 모래 바람만 자욱하던 경북 포항에 ‘죽기 살기’로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의 세 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세웠다. 무리수라는 비난에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런 그의 무쇠 같던 육체와 집념도 결국 죽음을 비켜가지 못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일평생 지켜온 박 명예회장은 청렴한 생활로 유명하다. 1960년대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단 한 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았다.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해야 제대로 된 조직운영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명의로 남은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최근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큰딸의 집에서 지냈으며 입원비조차 본인 스스로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박 명예회장은 이처럼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근현대사와 국민들의 가슴속에 남긴 족적만큼은 무엇보다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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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