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오세훈의 저주’ 막전막후

‘5세 훈이’ 응석에 파탄 난 한나라당 ‘그 끝은 어디?’

[일요시사=이주현 기자] 한나라당이 심상치 않다. 쇄신은 물론 해체설까지 제기되며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집권당이자 거대여당의 이러한 위기에는 이른바 ‘오세훈의 저주’가 서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하고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퇴한 것이 ‘저주’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해체수준까지 인도한 오세훈의 저주는 끝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한나라당은 떨고 있다. 오 전 시장의 사퇴가 남긴 것은 무엇인지 집중 조명해봤다.

유승민·남경필·원희룡 동반사퇴에 홍반장도 사퇴 ‘체제붕괴’
FTA 날치기 여파 가시기도 전에 디도스 공격 파문 악재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을 포함한 현 정치권에 남긴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단지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로 서울시장이 교체된 것 이상의 의미와 파장을 남기고 있다. 세상을 뒤흔든 ‘핵폭탄급’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나가는 변호사 출신이 서울시장 연임에 성공했고 차차기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인물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오세훈 사퇴
‘저주’의 시작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 전부터 한나라당과 줄곧 마찰을 빚어왔다. 중앙당 차원의 지원을 요구하고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패배시 ‘시장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쳤다.
 
이에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티격태격했고 당내 갈등이 심화됐다. 주민투표에서 패배하자 지도부는 오 전 시장의 사퇴를 극구 말렸고 사퇴를 강행하더라도 10·26 재보선 이후로 사퇴시점을 늦춰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오 전 시장은 끝내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즉각 사퇴해 버렸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서울시장 후보 선정으로 당내 혼란이 일었고 결국 나경원 후보가 고군분투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선거 패배는 물론이고 장래가 촉망됐던 나 후보 부친의 사학비리가 까발려졌고 1억원 피부샵, 고가의 다이아 재산 은닉 의혹, 보좌관의 폭로 등으로 만신창이 돼버렸다.

나 후보는 선거 패배 후 미국으로 건너가 휴식을 취하며 복귀 시점을 저울질 하고 있지만 당의 계속되는 악재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또한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밝혀진 의혹들은 앞으로도 공직생활을 하는데 크나큰 오점과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것으로 여겨진다.

‘불똥’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튀었다. 4년을 절치부심하며 자신만의 대권레이스를 구상한 그를 조기등판 시킨 것이다. 박 전 대표로서도 역할론과 책임론에 휩싸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걸로 여겨진다.

박 전 대표도 득보다 실이 많았다. 선거운동기간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총력을 다한 서울시장 선거에 패배하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미지에 크나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오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거 기간 중 안철수 현상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병 걸린 거 아니에요?”라고 답해 막말 파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오세훈 저주가 남긴 것 중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시민사회세력의 등장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정치권의 새로운 정치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으로 그 파워를 여실히 드러냈다.
 
안 원장의 등장은 4년간 대선후보 지지도 1위 자리를 지켜온 박 전 대표를 앞서는 등 엄청난 영향력을 가져왔다.
 
안 원장은 “학교 업무만으로도 벅차다”며 한발 물러선 듯 했지만 1500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하며 다시 한 번 국민의 환심을 사 박 전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를 더욱더 벌렸다. 

박근혜 전면 복귀 불가피, 당내 잠룡들 주도권 경쟁 치열할 듯
한나라당 공중분해 위기, ‘저주’ 계속 된다면 정권교체 가능성도

오 전 시장은 한나라당의 ‘소통 부재’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시민세력이 강세를 보였지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SNS의 힘이 컸다는 사실에 이견을 다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층에게 관심을 갖게 하면서 빠른 전달력으로 정보전달을 하는 한편, 이들의 발걸음을 투표소로 향하게끔 했다.

그 정점에는 <나는 꼼수다>라는 인터넷 방송이 있었다. 팟케스트 다운로드 전 세계 1위 기염을 달성한 <나꼼수>는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나 후보의 의혹과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 등을 사실에 입각해 집중 거론했고 투표를 독려했다.

또한 정치라는 딱딱한 주제에 재미를 가미하면서 젊은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승리의 1등 공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말로만 ‘소통’을 강조하며 <나꼼수>와 SNS, 토크콘서트 등을 흉내 내려다 여의치 않자 SNS를 규제하는 법안을 개정하고 이들을 나쁜매체로 규정함으로써 국민적 반감을 샀다.

여러 사람 울린
‘오세훈의 저주’


최근에는 10·26 재보선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마비시킨 디도스 공격의 범인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수행비서라는 사실이 밝혀져 오세훈의 저주는 정점에 달해있다.

야권과 시민들의 원성은 자자하고 여권 내에서도 확실한 규명을 언급하며 국정조사와 특검까지 논의되고 있는 상항이다. 이번 디도스 사건으로 한나라당은 도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었다.

또한 선거 패배 후 책임론에 휩싸인 홍 대표는 줄곧 사퇴압박을 받았고 쇄신안을 내놨지만 지도부는 물론 친박과 친이, 쇄신파 할 것 없이 홍 대표를 압박했다.
 
홍 대표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 사퇴는 없다고 완강히 버텼지만 지난 7일 유승민·남경필·원희룡 최고위원이 동반사퇴하며 ‘홍반장 체제’는 완전 붕괴됐다.
 
지난 8일에도 측근들에게 “자리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대안 없이 대표를 그만두고 나가버리면 당에 대 혼란이 초래된다. 대안이 마련될 때까지는 대표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겠다”고 일축하며 다시 한 번 사퇴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하지만 홍 대표는 지난 8일 저녁 “나갈 때가 되면 내 발로 걸어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다음 날인 9일 오전 여의도 당사 대표실에서 김장수 최고위원과 면담을 갖고 “결심을 하겠다”고 말해 사퇴가 임박했음을 내비쳤다.

이어 오후 3시 홍 대표는 사퇴 기자회견을 통해 “당원 여러분의 뜻을 끝까지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고 운을 뗀 뒤 “집권여당 대표로서 혼란을 막고자 당을 재창당 수준으로 정비하고 내부정리 후 사퇴하고자 했던 저의 뜻도 기득권 지키기로 매도되는 것을 보고 저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것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히며 전격 사퇴했다.

오세훈의 저주가 결국 ‘홍반장’ ‘모래시계 검사’로 불리며 유명세를 떨쳤던 홍 대표까지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홍 대표가 사퇴하자 관심은 자연히 박 전 대표의 등판에 쏠렸다. 홍 대표의 퇴진은 당내 최대 주주이자 유력 대선주자인 박 전 대표의 당 전면 복귀를 뜻하지만 박 전 대표의 역할 및 향후 당의 진로를 둘러싸고 비상대책위원회, 선거대책위원회, 재창당위원회, 조기 전당대회 등의 논의가 쏟아져 나오면서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현재 소장·쇄신파는 비대위를 구성해 박 전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수도권 친이계 ‘재창당모임’은 당의 실질적 재창당을 위해 재창당준비위를 구성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친박은 비대위냐 조기 전당대회냐 등을 놓고 통일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다.

여당 내부의 상황과는 별개로 내년 4·11 총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의 여권 지도부 교체, 특히 박 전 대표의 전면 등장은 총선과 대선 정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여권이 만약 재창당 수순으로 갈 경우 ‘헤쳐모여’ 속에 일부 이탈세력이 발생하면서 여권발 정계개편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부에선 당의 향후 진로를 놓고 권력투쟁이 시작됐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친박계는 특히 ‘포스트 홍준표’ 체제에 대한 당내 논란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선뜻 전면에 나설 경우 정몽준 전 대표, 김문수 경기지사 측이 반격을 가할 수도 있어 잠룡들 간에 주도권을 잡기위한 치열한 경쟁 또한 예상된다.
 
이들은 박 전 대표에게 전권을 넘겨줬다간 자신들의 설 땅이 사라질 것이란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박 전 대표를 간판으로 내세우되 공천권 등은 분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MB와의 차별화’에 대해서도 미온적이다.
 
공천 과정에 자신들이 배제될 경우 이들은 분당도 불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럴 경우 박 전 대표 자신이 상처를 입고 대선가도에도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주도권 잡기 위한
잠룡들의 세력싸움


이처럼 오세훈의 저주는 정국을 뒤흔들 만큼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

문제는 이 저주의 끝이 여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10·26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그의 저주가 언제 어떤 사건으로 또 다시 터질지 모르는 데다 지금 현재도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한나라당을 바짝 긴장케 하고 있다.
 
만약 한나라당에 오세훈의 저주가 계속된다면 총선 패배는 불 보듯 훤하고 대선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 마디로 그의 저주가 한나라당 전체를 태풍 속에 몰아넣은 것이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오 전 시장이 원흉으로 여겨질 법도 하다. 끝나지 않은 오세훈의 저주, 그 끝은 어디일지 사뭇 궁금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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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