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판 ‘11월 괴담’ 총력 추적

11월에 떠난 기업총수 수두룩 ‘추도의 달’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연예계에서 11월은 ‘잔혹한 달’로 통한다. 이때만 되면 자살, 사망 등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11월 괴담’이라는 얘기가 회자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이에 따라 연예인들의 표정엔 올해 괴담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11월 괴담은 비단 연예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재계에도 11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달에 유독 많은 기업 총수들이 세상을 떠난 게 바로 그 이유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맨땅에서 국내 1위 그룹’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은 1987년 11월19일 타계했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고 이병철 회장은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1934년 중퇴했다.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첫발을 들였으며,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뒀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면서 삼성그룹 육성의 발판을 만들었고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했다.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했으며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세웠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했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 사업의 다각화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고 최종건 SK그룹 회장
‘5년만에 대기업 일으켜’

SK그룹의 창업자인 고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15일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 출신인 최종건 회장은 수원 신풍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나와 선경직물주식회사 수원공장 공무부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6·25전쟁 중 정부로부터 폐허가 되다시피한 공장을 매수해 낡은 직기 4대를 조립, 선경직물주식회사를 재건했다. 1953년 직기 4대로 출범한 이 회사는 불과 5년 만에 1000대의 직기를 보유한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도 이 회사는 계속 성장,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 최초로 합성직물인 나일론, 데드론을 생산한 데 이어 1960년대 들어서는 크레폰·앙고라·깔깔이·스카이론 등 각종 직물을 개발해 국민의류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특히 1962년에는 한국 직물 사상 최초로 레이온 태피터를 홍콩에 수출하면서 우리 섬유산업 발전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경이 오늘날 국내 유수 재벌기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건 1966년부터다. 당시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69년 9월에는 선경합섬주식회사를 설립, 아세테이트원사공장과 폴리에스테르원사공장을 건설했다. 또 섬유산업의 계열화를 위해 석유산업으로 사업을 넓혀 1973년 5월 선경유화주식회사를, 같은 해 7월에는 선경석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수송보국·인재양성’

한진그룹 창업자인 고 조중훈 회장은 2002년 11월17일 영면에 들었다.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난 조중훈 회장은 15세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정규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진해 선원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소 직공생활을 했다. 해방 뒤 조중훈 회장은 귀국해 트럭 한대로 인천 해안동에서 수송업체인 한진상사를 차렸다. 이후 57년 동안 오로지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외길만을 걸어왔다.

조중훈 회장은 베트남 파병 당시인 1966년 베트남 군수품 수송사업에 뛰어들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에 힘입어 한진관광, 동양화재, 대진해운등 많은 계열사들을 설립?인수하면서 재벌급 기업 반열에 들어섰다. 특히 1969년 정부의 강권과 내부의 강한 반대 속에서 인수한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세계적 민간항공사로 키우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재계 9위의 든든한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조중훈 회장은 항상 국가 이익이 기업 이익에 우선한다는 생각에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소명의식과 자부심으로 국익을 위한 민간 외교 활동에 적극 나서 우리나라를 비롯해 프랑스, 독일, 벨기에, 몽골 등 각 국으로부터 수많은 공로 훈장을 받았다.

또 기업 경영에서 인재 양성을 최우선시했고 육영사업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인하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의 인수는 물론, 평생교육, 평생직장 분위기 조성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내대학을 개설하기도 했다.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
‘선친 뜻 이어 받아’

조중훈 회장의 삼남인 고 조수호 회장은 2006년 11월26일에 세상을 떠났다. 고 조수호 회장은 인천에서 태어나 1979년 미국 남가주대(USC)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졸업과 동시에 대한항공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1985년 한진해운 상무를 시작으로 한진해운과 인연을 맺은 조수호 회장은 1994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03년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한 이래 국내외 해운산업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진해운이 세계적인 선사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수송보국’이라는 조중훈 회장의 뜻을 이어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성장을 목표로, 어려운 판단을 할 때 ‘공동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아 온 것으로 전해진다. 조 회장은 이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진해운이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최대의 해운 기업이자 세계 7위권 규모의 선사로 성장시켰다.

인재양성과 육성사업을 중요시 한 선친의 뜻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1994년 제9대 한국해양소년단 연맹 총재에 선임되면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해양입국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1997년 2월부터 2000년 초까지 한국선주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해운관련 금융 및 세제, 국제선박등록제도 등의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대형선사와 중소선사의 공존?공영의 기틀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데 힘썼다.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
한국 프로야구 반석에

고 박용오 성지건설 회장은 2009년 11월4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6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난 박용오 회장은 경기고등학교, 뉴욕 대학을 나와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했다.

이후 두산산업 사장과 동양맥주 사장, OB베어스 사장, 두산그룹 부회장, 두산산업 대표이사 회장 등을 거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마침내 지난 1996년 두산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2004년까지 8년8개월 동안 두산을 이끌었다.

박용오 회장은 재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박 회장은 회장 취임 전인 1995년 당시 두산그룹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또 2000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전격 인수하는 등 공격경영의 기치를 올린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는 현재 두산그룹의 알짜 계열사로 성장했다.

대외활동도 활발히 했다. 한-이집트 경협위원장과 국제상공회의소 국내위원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8년 이후 만 7년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금탑산업훈장, 스페인 민간공로훈장, 벨기에 왕실훈장, 한국능률협회 ‘2003년 한국의 경영자상’ 등 수많은 수상경력도 그의 경영능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2008년 성지건설을 인수했으나, 차남 박중원씨가 횡령 혐의로 구속되고 경영실적이 곤두박질치는 등의 이유로 큰 스트레스를 받아오다 집안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함으로써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 허영섭 녹십자그룹 회장
‘한국 의약품의 아버지’

고 허영섭 녹십자그룹 회장은 2009년 11월15일 작고했다. 한일시멘트의 창업주인 고 허채경 명예회장의 차남인 허영섭 회장은 1964년 서울대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독일 아헨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1970년 박사과정을 마쳤다. 같은 해 녹십자에 입사한 허영섭 회장은 1980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1992년부터 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왔다. 같은 해 녹십자에 입사한 고인은 1980년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1992년부터 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왔다.

평생을 국내 필수의약품 분야를 개척해 수입에 의존하던 값비싼 의약품을 국산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과거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한 B형 간염백신, 세계 최초로 개발한 유행성출혈열 백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수두백신 등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바이오 의약품 분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사회공헌 활동도 빼놓지 않았다. 허 회장은 선천성 유전질환인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돕는 사회복지법인 ‘한국혈우재단’을 설립해 진료비 지원, 환자 조사 및 등록, 재활, 재단부설 병원 운영 등 지원사업을 펼쳐 왔다. 또 민간연구재단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국내 생명공학 연구기반 조성과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
‘해운업계의 거목’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부친인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은 2006년 11월24일 명을 달리했다. 1948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현영원 회장은 1950년 한국은행에 입사해 5년간 도쿄지점 외국부에 근무했다.

현영원 회장은 이후 장인이 된 김용주 전방그룹 회장의 권유에 따라 1956년부터 신한제분과 근해상선의 전무로 자리를 옮겨 해운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대한제철의 사장을 역임한 뒤 1964년 신한해운을 창업해 독자적으로 해운업체를 경영하게 됐다.

현영원 회장은 신한해운은 1984년 해운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현대상선에 합병될 때까지 해몽호, 해금호, 해정호, 해수호 등 7척의 선박과 203명의 임직원을 보유한 중견 해운업체로 키웠다. 그래서 ‘해운업계의 거목’ ‘영원한 해운인’으로 불렸다.

현영원 회장이 나중에 사돈이 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인연으로 1984년 현대상선 회장으로 활동하게 됐다. 해운 실무에 해박했던 현 회장은 1995년까지 회장직에 있으면서 오너 경영자인 당시 정몽헌 사장을 잘 이끌어 현대상선을 세계적인 해운업체로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96년 현대그룹의 경영이 정몽구 회장-정몽헌 부회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창업 1세대 경영인들이 대거 경영일선에서 퇴진할 때 현영원 회장도 현대상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대북사업에 전념할 때 조언자 역할을 해오다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고 전낙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
‘한국 카지노의 대부’

‘한국 카지노의 대부’ 전락원 전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2004년 11월3일 세상을 등졌다. 전락원 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1948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학업을 마치지 못하다가 1997년 명예졸업을 했다.

1950∼1960년대 중반까지 미군부대 군속으로 일하며 사업기반을 닦았다. 이후 오림포스 관광호텔 대표이사로 관광업계에 뛰어든 뒤 1973년 관광공사로부터 워커힐 카지노를 인수하며 국내 카지노 사업의 대표주자로 활약했다. 워커힐 카지노를 통해 막대한 부와 인맥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차례로 부산, 제주, 도고, 인천, 아프리카 케냐 등에 파라다이스 호텔을 설립하고 부산과 제주, 인천에도 카지노를 개장했다.

이후 면세점, 건설, 소방용스프링클러 제조, 미디어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부산, 파라다이스건설, 파라다이스미디어아트 등 11개 영리법인과 학교법인 계원학원 등 5개 비영리법인을 거느린 파라다이스 그룹을 일궈냈다.

1993년 외화밀반출 혐의로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기업의 사회공헌을 강조하여 2000년 국세청 모범납세인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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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