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노의 남자들 아귀다툼

여의도가 온통 노란색으로

[일요시사 정치팀] 김정수 기자 = 선거제도 개혁이 9월 정기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최근 민주평화당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된 정동영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의 불씨를 키우는 모양새다. 이에 야당은 화답하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은 새로 선출될 당 대표에 따라 보다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던 인사들이 저마다 당 전면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선거제 이슈가 정국의 핵으로 부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지난 5일 민주평화당(이하 평화당)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된 정동영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의 고삐를 당겼다. 정 대표는 취임 일주일 뒤 열린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서 “목숨 걸고 선거제도를 바꿀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정 대표는 “정기 국회가 넘어가면 선거제도 개혁은 물 건너 간다”며 사실상 개혁 시기를 9월 정기국회로 못 박았다.

선거제 개혁
9월 정기국회로

정 대표가 제안한 선거제 개편은 갑작스럽지 않다. 선거제 개혁은 국회를 비롯한 여러 갈래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다. 특히 선거제 이슈는 20대 국회 전반기부터 개헌과 함께 동력을 얻기 시작했다.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다. 선거제 개혁 역시 그 궤를 같이 한다.

선거제 개편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핵심으로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 득표율에 따라 전체 의석수를 확정하는 방식이다. 이후 지역구 의석과 전국구 의석을 결정한다. 지역구 의석은 현행 방식대로 결정되고 나머지 의석은 배분된다. 

예를 들어 한 정당이 10%의 지지율을 얻었다면 30석이 배분된다. 해당 정당이 지역구서 10석을 획득했다면 나머지 20석은 비례대표제로 보완된다.


사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민의를 더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군소정당들의 국회 입성이 원활해질 공산이 크다. 현행 소선거구제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정 대표 역시 소선거구제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전환하고자 한다.

정 대표가 선거제 개편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피자 바른미래당(이하 바미당)은 이에 화답하는 모양새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역시 긍정적이다.

바미당 김관영 원내대표는는 지난달 선거제 개혁과 개헌을 연동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이어 김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국회서 열린 원내정책회의에 참석해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은 시대적 책무”라고 밝혔다. 바미당의 선거제 개편 입장은 다음달 2일 선출될 새 당 대표를 통해 선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바미당 전당대회 예비경선을 통과한 후보들 중 몇몇은 공식적으로 선거제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김영환 후보는 지난 5일, 국회 정론관서 “선거제도 개혁에 사활을 걸겠다”고 강조했다. 정운천 후보 역시 지난 7일,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을 열고 “소선거구제 개편 등 정치제도 개혁을 통해 진정한 동서화합의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밝혔다.

바미당 전당대회에서 가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손학규 후보도 선거제 개혁에 적극적이다. 손 후보는 지난 8일 국회 기자회견서 “선거제도를 비롯한 잘못된 정치제도를 바꾸겠다는 것이 손학규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호소했다.

정동영 연일 선거제 개혁 띄우기
김병준 “선거구제 이야기 가능”

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이하 김 위원장)도 선거제 개편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뒀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일 한국당 비대위원장실을 예방한 정 대표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정 대표는 “김 위원장의 한국당과 평화당이 선거제도 개혁의 우군이 됐으면 좋겠다”며 선거제 개편을 위한 연대를 제안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선거구제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룸을 열어뒀다”며 긍정적 의사를 밝혔다. 정 대표는 제1야당까지 우군으로 확보해 놓은 셈이다.

애당초 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함께 거대 양당의 축으로 자리하면서 선거구제 개편에 소극적이었다. 소선거구제 개편은 현행 의석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한국당이 전향적으로 입장을 선회한 까닭은 지난 6·13지방선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방선거 결과
한국당도 다급

한국당은 지난 6월 지방선거서 민주당에게 완패했다. 지방선거의 꽃이라 불리는 광역단체장 선거는 결정적이었다. 한국당은 보수텃밭이라 불리는 대구와 경북 단 두 곳서 승리했다. 겨우 체면치레한 셈이다.

한국당의 지방선거 참패는 오는 2020년 시행되는 21대 총선과 결부지어 볼 수 있다. 소위 지방선거는 정부와 정당의 중간평가로 여겨진다. 한국당이 이전과 달리 선거제도 개편에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지방선거 이후 당 내외에서 제기되는 위기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정의당도 선거제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정의당 최석 대변인은 지난 7일 오전 국회 정론관 브리핑을 통해 “민의를 제대로 담보하는 선거제도 개혁은 이미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이날 오후 정의당을 예방해 이정미 대표를 만나 선거제 개편과 관련해 협력을 촉구했다.

다만 정 대표는 민주당을 예방해 추미애 대표(이하 추 대표)를  만나는 과정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추 대표가 선거제 개편과 관련해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지난 10일 KBS 라디오 <최강욱의 최강시사>와의 전화 인터뷰서 “민주당 추 대표와 한국당 김 위원장을 만나 똑같이 (선거제 개편을) 강조했지만 추 대표가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좀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민주당은 선거제 개편 논의를 좌우할 수 있는 입지를 지니고 있다. 집권 여당인 데다 정당 지지도가 여타 정당에 비해 압도적이다. 지난 6월 지방선거서도 ‘싹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압승했다. 당 내외에선 21대 총선 전망도 지방선거 결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다.

민주당은 현행 의석수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거제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설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민주당은 선거제 논의를 전면 부정하고 있지 않다. 최근 여야 5당은 회동을 통해 올해 안에 선거제 개혁을 이뤄내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여야 5당은 지난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다당제 민주주의와 선거제도 개혁’ 토론회서 뜻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정당들이 많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면서도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을 마련할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선거제 개편에 뜻을 함께 했다. 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정 대표가 선거제 개혁의 당론 채택 여부에 대해 묻자 “문제없다”며 한국당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정 대표는 선거제와 함께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에 여야 모두 원론적인 입장에서부터 적극적인 화답에 이르기까지 동행의 뜻을 밝히고 있다. 최근 평화당 전당대회에 이어 민주당과 바미당도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민주당과 바미당은 각각 오는 25일과 다음달 2일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선거제 이슈가 힘을 이어간다면 각 당 수장들의 입장 표명이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민주당은 이해찬·김진표·송영길 후보가 막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 민주당 당 대표 여론조사에선 이해찬 후보(이하 이 후보)가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바미당에선 손 후보가 유력한 차기 당 대표 후보로 평가된다. 이에 타 후보들은 적극적으로 손 후보를 견제하고 있다.

최근 전당대회를 앞두고 등판한 이들을 향해 ‘노의 남자들’이 돌아왔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 후보와 김 위원장 그리고 정 대표는 모두 참여정부서 일한 경험이 있다. 손 후보 역시 정치적으로 얽혀있다. 

이들이 모두 각 당 대표로 자리한다면 ‘노의 남자들’이 당 전면에 포진하게 된다.

전대 이후
다시 재편?


이 후보는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창단기획단장으로 열린우리당 창단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그는 참여정부에서 3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정 대표는 참여정부서 31대 통일부장관으로 남북문제를 책임졌다. 이후 그는 열린우리당 초대 의장을 지냈다. 열린우리당은 노 전 대통령이 창당했다. 2007년 대선 때는 노무현정부의 여당이던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나섰다. 정 대표는 당시 대선 후보 경선서 이 후보와 손 후보와 경쟁했다. 정 대표는 대선서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크게 패했다.

손 후보는 이듬해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를 맡으며 당 수습에 들어갔다. 이 후보와 손 후보가 전당대회 이후 당 대표로 선출된다면 세 사람의 운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김 위원장은 2002년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의 정책자문단 단장을 지냈다.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분과위원회 간사위원과 대통령자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정책실장을 역임하다 7대 교육부총리에 임명됐다. 
 

그러나 취임 13일 만에 논문 표절 의혹으로 자진 사퇴했다. 네 사람 모두 참여정부 시절 정치권의 중심서 활약했다.

과거의 인연으로 얽혀있는 이들이 모두 당 대표에 안착하게 된다면 정 대표의 선거제 개혁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선거제 개편 공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 대표는 민주당과 바미당의 전당대회 이후 그 행보를 더욱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전당대회 이후 선거제 개편 논의는 치열해질 가능성이 있다. 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된 문희상 국회의장(이하 문 의장)은 취임 이후 개헌과 함께 선거제 개혁에 힘을 실었다.

문 의장은 지난달 18일 오전 국회 기자간담회를 통해 선거제도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문 의장은 이날 “선거제도의 개편이 따르지 않는 개헌은 의미가 없다”며 “선거제도만 개편한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정치개혁을 제대로 한 국회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문 의장 역시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이 닿아있다는 것이다. 문 의장은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민주당·바미당 전대 후 선명해질 듯
문 의장까지 가세…개편 가능성은?

전당대회 이후 새 당 대표를 주축으로 본격적인 5당 체제가 공고히 되면서 선거제 개혁이 어떤 흐름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민주당과 바미당 전당대회서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얽힌 이 후보와 손 후보가 당의 전면에 나설 수 있을지 역시 관전 포인트다.

선거제 개혁은 각 당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교차하는 곳으로 꼽힌다. 정쟁의 과열이 예상된다. 게다가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둔 상황서 의석수 확보를 위한 각 정당의 움직임이 선거제 개편과 맞물려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바미당은 의석수로 원내 3당 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지난 6월 지방선거서 참패했다. 바미당 소속 후보들의 99%가 낙선했고,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단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지방선거 이후 정계개편 시나리오의 중심에 선 것도 그 이유에서다. 

바미당은 다가올 총선을 대비하기 위해 선거제 개혁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만연하다. 유력한 차기 당 대표로 꼽히는 손 후보는 선거제 개혁을 ‘정치적 소명’이라 강조하며 만전을 기하고 있다.
 

평화당도 지난 지방선거서 한계를 보였다. 기초단체장은 5석 확보에 그쳤다. 호남서의 성과는 있었지만 외연 확장에는 실패했다. 또한 평화당은 정의당과 함께 ‘평화와 정의’라는 이름의 공동교섭단체를 결성했지만 정의당 노회찬 의원의 타계로 지위를 상실했다. 

2020 총선 결과에 따라 당의 존폐 여부가 좌우되는 상황이다. 정 대표가 평화당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선거제 개혁 카드를 꺼낸 것도 당의 현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다.

선거제 개혁의 키는 민주당에 달려있다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민주당은 연일 정당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가운데 6월 지방선거서 압승했다. 이어 2020 총선서의 승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민주당이 선거제 개혁 논의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는 새로 선출될 당 대표의 입장을 통해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개혁 어디까지
당 대표 입장은?

이 후보와 손 후보가 전당대회서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다면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이 닿아 있는 이들이 4당의 수장이 된다. 정의당과 후반기 국회를 이끄는 문 의장이 선거제 개편에 적극적인 가운데 이들의 정치적 결단이 선거제 개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노무현의 숙원, 선거구제 개편 이뤄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당선 직후 선거구제 개편을 언급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선거제를 바꾸겠다”며 “중대선거구제가 아니라도 좋다. 지역구도가 깨지면 대통령 권한을 그만큼 양보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선거구제 개편 제안에 수용 불가 방침을 내세웠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대연정 제안의 반대급부 내용은 선거제도를 고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노 전 대통령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대연정 등을 논의하기 위해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당시 박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선거구제 개편 제안에 행정구역 개편을 역으로 제안하면서 사실상 반대의사를 표했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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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