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 붙은’ 검찰-공정위 파워게임 내막

  • 김세훈 기자 space0122@naver.com
  • 등록 2018.07.02 10:58:49
  • 호수 1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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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김상조 밀리면 집으로

[일요시사 취재 1팀] 김세훈 기자 = 검찰이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김상조)를 압수수색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검찰과 공정위가 ‘전속고발권’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권력을 가진 기관들이 밥그릇 싸움을 할 때 상대방의 비리를 이용해 선수를 치는 방법은 흔한 레퍼토리다.
 

대한민국서 검찰은 기소권을 독점한 기관이다. 공정위 역시 재계서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재계 검찰’이라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어떤 곳일까? 공정위는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제해 기업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기관이다. 특정 기업의 불공정행위가 있으면 적발해 소비자를 보호한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기업에 독자적으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기 때문에 준 사법기관으로 분류된다.

불공정위원회?
달라진 공정위

이런 권한을 가진 기관임에도 지난 정권까지 공정위는 이렇다할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공정위의 위상은 다르다.

시작부터 '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갑질 근절'이란 강렬한 취임사로 화제를 모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재벌기업에 과도하게 몰려 있는 시장구조를 바꾸고 몇몇 기업의 편법적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주요 의제로 정해 활동했다. 

김 위원장이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공정위의 존재감은 이전과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두 기관이 최근 불편한 관계로 만났다. 지난달 20일, 검찰은 공정위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이번 압수수색의 명분은 두 가지다. 먼저 공정위가 기업 비리 혐의를 알고도 눈감아 줬다는 것. 둘째 기업이 공정위 고위 간부들에게 취업을 알선하는 방식으로 보은을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배임과 횡령 혐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서 부영그룹이 분양가를 부풀려 1조원대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포착했다. 검찰은 공정위가 부영그룹의 혐의를 미리 알았지만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사건을 덮었다고 보고 있다.

공정위가 기업비리를 알고도 검찰에 고소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된다. ‘전속고발권제도’라는 것 때문이다. 공정거래법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선 검찰이 독자적으로 기소할 수 없다. 

공정위가 먼저 검찰에 고발 조치해야 검찰은 해당사건에 대한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공정거래법 위반 사항에 관련한 사건은 이렇게 수사하도록 제도화돼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공정거래법 위반에 관하여 공정위의 입단속만 잘하면 불법으로 기업을 운영해도 괜찮은 상황이다.

“전면 폐지” vs “단계적 과정 필요”
논란 많은 전속고발권 두고 신경전

어째서 이런 권한이 공정위에게 있는 걸까?

공정위는 경제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집단이 기업 고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 형사고발제도처럼 경제관련 전문지식이 없는 집단이 기업 고발권을 가지면 고발권 남용으로 기업 경영활동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공정위의 주장이 시대착오적 이라는 논란이 거세지자 정부는 2014년부터 감사원, 중소기업청, 조달청에도 고발 요청권을 부여했다. 이들 기관장이 고발을 요청하면 공정위는 의무적으로 고발해야 한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두 수장 회동
엇갈린 주장

5월13일 서초동 대검 청사서 김 위원장과 문무일 검찰총장이 만났다. 그 자리서 양측 수장은 전속고발권 폐지에 대한 설전을 벌였다. 

5월29일 대검 관계자는 “김상조 위원장이 대검을 찾은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전속고발권의 전면 폐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양측은 공정위가 독점적으로 행사한 전속고발권의 범위를 축소하는 대신, 현행 공정거래법 가운데 형법 적용범위를 대폭 줄이는 방향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공정위는 전속고발권 전면 폐지는 어렵다는 뜻을 내비쳤다. 김 위원장의 발언은 전속고발권 폐지에는 동의하지만 단계적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공정위는 담합 행위 가운데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 제도)를 공정위에 그대로 남겨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정위 관계자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담합 사건의 경우 가담자의 형사 처벌을 감면해주는 자진신고 제도를 폐지하면 단속 효율성이 떨어지는 데다, 이 제도는 행정 처분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압수수색한 두 번째 명분은 부정 취업 청탁이다. 공정위 고위 간부들이 재취업하는 과정서 공정위의 비호를 받은 기업이 그 대가로 한국공정경쟁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같은 곳에 취업 알선을 해줬다는 것이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4급 이상의 공무원은 퇴직 전 5년, 퇴직 후 3년간 소속했던 부서 또는 기관의 업무와 관련성이 있는 곳에 취업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공정위가 이 같은 특혜를 관행처럼 여겨 취업한 사실을 묵인해 온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이번 수사가 공정위 흠집내기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검찰이 취업 특혜를 받았다고 지목한 지철호 공정위 부위원장은 중기중앙회 상임감사서 공정위로 오면서 청와대 인사검증을 거쳤고 김 위원장을 도와 재벌개혁 실무를 총괄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공정위는 중기중앙회가 공직자윤리법서 정한 취업제한기관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실제 지난해와 올해 퇴직공직자 취업제한 고시 명단에 중기중앙회는 포함돼있지 않았다. 기획재정부와 중소기업청 출신의 전현직 중기중앙회 간부 2명도 재취업 과정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경쟁연합회도 취업제한 규정이나 심사 과정서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검찰이 전현직 공정위 간부의 과거 재취업을 형사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무리하게 엮고 있다”고 반발했다. 
 

법조계의 한 인사도 “검찰이 전속고발권 폐지를 두고 공정위와 협상하는 도중 압수수색한 배경에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검찰은 오래 전부터 내사했고 공정위를 예우했으며 전속고발권과 수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턱밑으로 향한 칼날
다음달 최종안 발표

일각에서는 검찰이 김 위원장에게 직접 칼날을 들이민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의 취임 후 직접 구성한 기업집단국을 검찰이 압수수색 했기 때문이다. 

기업집단국은 4대 재벌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김 위원장의 정책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서다. 다만 기업집단국이 만들어진 시기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2013년부터 2015년까지 혐의가 있는 부영그룹 비리와 직접적으로 연관 짓기는 어렵다. 


검찰이 김 위원장을 타깃으로 압수수색을 진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얼마 전 이뤄진 검·경 수사권 조정과 연관이 있는지도 세간의 관심사다. 

지난달 20일 정부서울청사서 김부겸 행정안전부장관과 박상기 법무부장관은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에 서명했다. 합의안에 따르면 경찰이 수사하는 사건에 대해 검사의 수사지휘권한을 폐지하고, 경찰에 1차적 수사권과 종결권을 부여했다. 검사의 1차적 직접 수사는 특별히 필요한 분야로 한정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검찰과 경찰의 관계를 기존의 수직적 관계서 협력하는 수평적 관계로 설정했다는 평가다.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검찰이 공정위의 압수수색을 통해 검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로선 무리가 있다.

전속고발권을 놓고 양측이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까닭은 공정거래법 위반에 관한 사건들이 대부분 굵직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반에 대한 범죄는 주로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사건의 규모가 크다. 법률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기관 입장서 전속고발권은 매우 매력적인 권한임이 틀림없다.

현재 검찰과 공정위는 협상 끝에 전속고발권을 선별 폐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전속고발권 폐지를 두고 양측 간 이견이 많이 좁혀져 마지막 절차만 남았다”며 “다음 달 초 최종 결론이 날 것”이라고 밝혔다.

압수수색 배경에 힘겨루기?
 자칫 밥그릇 싸움으로 비칠라

현재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관련 법률은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 등 모두 6개다. 이 가운데 가맹법과 유통업법, 대리점법 같은 유통 관련 법안의 전속고발권은 선별적으로 폐지된다. 하도급법은 기술탈취 부문에 한해 폐지 방향으로 잠정 결론났다. 표시광고법은 폐지에 앞서 형벌조항 정비가 필요해 논의가 더 이뤄질 전망이다.
 

최대 쟁점인 공정거래법은 담합 조항 일부를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다만 공정위와 검찰은 공정거래법 위반에 관해 자진신고 시 처벌을 감면해주는 리니언시제에 대해선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정기관 특권의식
“당장 그만둬야”

전문가들은 이 사안이 한국경제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만큼 검찰과 공정위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권남훈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세부적인 조정이 많이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검찰과 공정위가 서로 협력하는 자세로 현명히 해결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공정위는 전속고발권 폐지 범위에 관해 토론회를 열고 다음달 최종안을 확정 발표할 예정이다.

지금에야 공정위가 재벌개혁의 분위기를 맞아 여론의 지지를 받지만 이전까지 공정위는 존재감 없는 기관이었다.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면 고발권 남용으로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공정위의 주장은 친기업성향의 정권서나 받아들여질 이야기다. 기업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공정한 거래를 하면 해결될 일이다. 

현재 여론은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다만 이것이 검찰의 권한을 더 강화해야한다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속한 조직서만 법률을 적용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특권의식으로 수사기관들은 몇 십년 째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공직자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기업을 잡아내는 일이 각 조직의 파워를 과시하는 게임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치해선 안 된다. 공직자는 파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kimsehun@ilyosisa.co.kr>


<기사속 기사> '김상조 포비아' 재계 초비상

“하반기 최대 경영불안요소는 공정거래위원회다”라는 말이 기업 간에 나돌 정도로 공정위의 칼끝이 매섭다. 재계에선 ‘김상조 포비아’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지난달 25일 공정위는 기업 사익편취 금지제도를 도입했다. 대기업 내부 거래 비중 증가에 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과 SK하이닉스는 경쟁사 직원들과 이메일, 메시지 교환을 금지하는 내용의 사내교육을 진행했다. 공정위로부터 반도체 가격을 담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수 차례 받은 탓이다.

현대차도 공정위 관련 이슈가 보도될 때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LG그룹의 사내 설문에는 '정도경영' 항목이 들어갔다. LG그룹 경영진들이 얼마나 공정한 경영을 하고 있는지 자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다. 

동국제강 등 철강업체들도 업계 특성상 협력업체와 접촉이 잦은 만큼 업무처리 방식과 금품수수방지에 관한 교육을 하고 있다.

올해 공정위가 기업에 부과한 과징금과 과태료는 6월까지 1258억2334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5%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공정위 처분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반발하는 사례도 늘었다. 삼성SDS 소액주주들은 지난달 18일 김 위원장이 대기업 SI 계열사 지분 매각을 지시한 이후 주가가 급락했다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항의하기도 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삼성SDS를 두고 한 발언이 아니었다"며 "비상장 계열사를 의미한 것"이라 해명했다.

내부거래 비중이 높아 공정위에 적발된 LS그룹은 공정위의 계열사 부당 지원 심사에 반발하며 소송에 나설 의사를 밝혔다.

몇 군데 기업을 제외한 재계의 반응은 '일단 공정위의 눈치를 보자'는 분위기다. 공정위가 ‘바이러스 99% 제거’라는 제품 홍보 문구를 사용한 삼성전자, 코웨이 등 7개 공기청정기 제조사에 15억6300만원 규모의 과징금, 경고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 기준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예정”이라며 “괜히 나섰다가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지 않겠냐는 것이 경영진 판단”이라고 전했다.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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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