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사 ‘레드펜 작전’ 내막

'2인3각'처럼…경찰이 왜?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얼마 전 군 사이버사령부(이하 사이버사)가 정부 비판 성향의 아이디를 대량 수집해 온라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집중 관리한 사실이 밝혀졌다. 일명 ‘레드펜’ 작전. 이런 가운데 경찰이 레드펜 작전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발견돼 논란이 되고 있다. 정치개입과 무관한 것으로 알려졌던 경찰이 보안사이버수사대를 만들어 군 사이버사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 온 정황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이재정 의원실이 제시한 국방부·경찰청의 각종 문건에 따르면 사이버사와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는 ‘2인3각’처럼 함께 작전 협조를 진행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버사와 경찰청의 부적절한 업무 협조 정황은 2009년 12월24일 경찰청이 보안국 보안사이버분석계를 보안사이버수사대로 확대 개편하면서 시작된다.

정부 비판 누리꾼
일반인 블랙리스트

군 사이버사는 창설 직후부터 총선과 대선 때마다 온라인 선거 개입을 주도해온 심리전단 내에 ‘검색팀’과 ‘리스트 관리 담당’을 두고 ID와 닉네임, 사이트 주소 등을 모아 특별관리대장을 만들었다. 

‘레드펜’ 작전은 공식적으로는 북한 선전물이나 이에 동조하는 세력을 수집해 보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부를 적극 비판하는 누리꾼 리스트를 작성해 대응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레드펜’ 작전의 시작은 사이버사 창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이버사 사정을 잘 아는 전직 군 관계자는 “(군은) 2008년 봄에 시작된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온라인 여론이 정권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라 온라인 여론을 주도하는 유력한 아이디를 골라 이를 추적 관찰하고, 해당 게시물에 대응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관리 대상 아이디의 글이 올라오면 더 독하게, 집요하게 (댓글)작전을 폈다. 군 내부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던 작전이 공식 조직을 통해 대대적으로 이뤄진 것은 사이버사가 창설된 2010년 이후다”라고 덧붙였다.

2010년 1월 사이버사가 창설되며 ‘레드펜’ 작전은 사이버사 심리전단 내 20명 내외의 검색팀에서 하루 24시간 내내 실행됐다. 

검색팀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과 작성자 ID를 갈무리해 보고하면, 따로 정해진 2명의 담당이 작성자 성향 파악과 리스트 작성·관리 업무를 맡았다. 이 팀의 존재는 이미 2013년 사이버사 수사 당시 ‘정보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 있다.

다만 당시 정보대는 현안 이슈를 심리전단장에게 보고하고 단장의 작전 지시를 운영대에 전달하는 일종의 지원조직으로 파악됐을 뿐, 이 팀에서 수행한 ‘레드펜’ 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레드펜 작전의 대상은 네이버, 다음 등 주요 포털 사이트와 트위터, 블로그, 정부에 비판적인 누리꾼들이 모여들던 ‘오늘의 유머’ ‘엠엘비파크’ 불펜, ‘82쿡’ 등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망라했다. 

사이버사는 자신들의 작전 대상을 “북한 및 적대세력이 직접 운용 또는 간접 활용하는 일체”라고 정의했다.

담당 만들어 일반인 ‘특별관리대장’ 작성
경찰청 보안국 간부가 꾸준히 방문해 공조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의 출장 관련 문건 등을 살펴보면, 경찰과 군의 교류는 경찰청 보안국 산하 보안사이버수사대장이 직접 사이버사를 방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전직 군 관계자는 “(이 작전지침에 따라)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 인원이 수시로 국방부 내 사이버사령부를 방문했다. (경찰청의)방문이 공식 확인되지 않을 만큼 보안이 철저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보안국과 협조
창설 이전부터…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전직 군 관계자는 “(이 작전지침에 따라) 경찰청 보안사이버 수사대 인원이 수시로 사이버 사령부를 방문해 협의하고 업무를 공조했다”고 밝혔다. 경찰청 보안국이 군과 업무협조를 한 시점은 2010년 이전부터였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는 “경찰청 보안국의 한 팀장급 간부(경감)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꾸준하게 군을 방문해 업무 공조를 하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국방부의 문건서도 이런 협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은 곳곳에도 발견됐다. 

최근 군사 2급 기밀서 해제된 국방부 ‘2012년 사이버심리전 작전지침’을 보면, 제2장 4조(작전운영) 4항에 “작전협조는 국방부, 합참, 기무사, 청와대, 국정원, 경찰청 등과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보안유지 하에 정보를 공유한다”고 규정돼있다. 

이에 앞서 국방부는 같은해 1월20일 청와대에 올린 ‘청와대(BH) 현안업무보고’서 “청와대, 국정원, 경찰청, 기무사 등 유관기관과의 실시간 정보공유, 공동 대응체계 유지”를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군이 ‘레드펜’ 작전으로 관리한 온라인 블랙리스트의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관리 대상 누리꾼의 리스트를 담은 ‘레드펜’ 대장은 ID 특별관리대장이라 불리며,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검색팀조차 존재를 명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됐기 때문이다.

다만 리스트 규모를 가늠해볼 수는 있다. 2017년 10월 국방부가 내놓은 ‘사이버사 댓글 재조사 태스크포스(TF)’ 중간조사 보고를 보면, 국방부는 “이명박정부 당시 사이버사가 문재인 대통령, 이효리 가수, 박원순 서울시장 등 유명인사 33명의 SNS 동향을 파악한 뒤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당시 33명의 동향을 담은 청와대 보고서가 군 내부 전산망에 남아 있다고 제보했던 한 전직 군 관계자는 “33명은 ‘레드펜’의 일부다. 이는 최소한의 숫자로 실제 유명인사가 아닌 유력 아이디를 더하면 수천개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관계자가 언급한 ‘수천개’라는 추정치는 당시 사이버사가 작전 대상으로 삼았던 종북 핵심 세력의 규모에 근거한다. 


이 관계자는 “처음 (레드펜은) 10명을 대상으로 시작했고, 이후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지휘계선 말고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지만, 사이버사 내부적으로는 종북 핵심 세력(3만여명)과 종북 조직(80여개 단체)을 (레드펜) 작전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당시 사정을 잘아는 전직 군 관계자는 “온라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레드펜’ 작전의 대상이 민간인이고, 경찰이 민간에 대한 수사권을 가졌기 때문에 업무협조가 중요했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즉, 사이버사가 정부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는 누리꾼들의 아이디(닉네임, 누리집 주소 등 포함)를 모아 관리한 ‘특별관리대장’(레드펜 작전)을 경찰에 전달하면 경찰이 넘겨받아 이 명단에 포함된 민간인에 대한 직접 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군의 작전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민간인 사찰?
자료 USB 저장

사이버사는 ‘레드펜’ 작전의 성과를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사이버사는 그날 불거진 주요 이슈에 대한 찬반 동향과 변화 수치를 담은 대응 작전 결과를 국방부 지휘부와 청와대 등에 제출할 때 ‘레드펜’ 작전 결과를 별도로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사이버사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레드펜’서 성과를 내면 곧바로 포상을 받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사이버사의 한 요원이 2010년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서 받은 표창 공적서에서 “유관기관(경찰청)과 주요 첩보활동을 93회 278건 실시해 사이버 첩보능력 및 부대인식 제고에 기여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레드펜’은 작전 초기 사이버사 핵심 간부들 사이에 갈등을 낳기도 했다. 이런 리스트 관리가 불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전 사이버사 핵심 관계자는 “(‘레드펜’ 작전은)불법이었고 (군이)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경각심이 없었다. 아이디를 포함한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하는 과정이나 이를 분석한 뒤 반정부 세력으로 분류해 관리하는 과정 모두 불법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사이버사의 레드펜 작전 활동 관련 경찰 개입 의혹 등에 대해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할 계획이라고 지난 12일 밝혔다. 

경찰청 보안국이 진상조사팀(TF)을 자체 구성·조사한 결과, 지난 2011년 당시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 직원들이 당시 상사로부터 정부정책에 대한 지지 댓글을 게시하도록 지시를 받아 일부 실행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총경급 이하 관련직원 32명을 상대로 조사 과정서 포착된 것으로 경찰관 한 명과의 대화 과정서 정부 지지 댓글 개제 사실을 전해들었지만 이후 조사에서는 해당 경찰관이 “공식적인 업무 일환”이라며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2010년 당시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장이던 A 경정은 사이버사로부터 2년 가까이 ‘레드펜’ 자료를 넘겨받아 휴대용저장장치(USB)에 보관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기관끼리 아닌 개인 간 협조차원”주장
개인정보 1646개 정리된 214개 파일 전달

A 경정은 2010년 12월15일 경찰청 주관 유관기관 워크숍서 사이버사 직원으로부터 레드펜 자료가 담긴 서류봉투를 전달받은 후, 그때부터 2012년 10월5일까지 아내 명의로 개설한 이메일을 통해 인터넷 댓글 게시자의 ID·닉네임·URL 등 1646개가 정리된 214개 파일(한글파일 209개·엑셀파일 5개)을 전달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A 경정이 받은 파일은 언론기사 관련 157건, 화면캡처 사진 관련 47건으로, 성격별로 국보법 관련 140건, 정부정책 관련 43건, 군 관련 21건 등이라고 경찰청 보안국은 설명했다. 

진상조사팀이 블랙펜 자료를 분석한 결과, 경찰의 내사 1건 및 통신 조회 26건과 정보가 일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에도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장이던 A경정은 댓글자료를 소속 직원들에게 제공, 댓글 게시자에 대한 내사를 진행했다.

이에 경찰청은 치안감 이상급을 단장으로 하는 ‘경찰청 특별수사단’을 구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수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와 관련해 이철성 경찰청장은 “관련한 의혹과 전혀 관계 없고 수사 경험이 많은 치안감 이상을 단장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사단이 구성되면 수사는 본격적으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이뤄질 전망이다. 

우선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 요원들이 사이버사로부터 넘겨받은 아이디나 닉네임 등의 정보를 대공 관련 수사나 내사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민간인 사찰 등에 위법하게 활용했는지 여부다.

또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 요원들이 국정원 사이버심리전단 요원처럼 조직적으로 상부의 지시를 받아 정치적으로 편향된 성격의 댓글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게재했는지 여부를 가려내는 게 핵심이다. 

경찰청 보안국 관계자는 “2010~2013년 동안에는 본인들이 A 경정에게 자료를 받아 내·수사를 진행할 사실이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며 “A 경정은 기관대 기관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 간 업무 협조차원서 (자료를)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가 없어 사용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전했다.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군과의 업무 협조는 일부 인정하면서도 군과 함께 민간인 사찰 등을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군과 세미나를 하며 대공업무 노하우를 축적하고 친북 사이트 140개 차단과 관련된 자료를 받거나, 사이버사가 아닌 기무사로부터 손에 꼽을 정도의 (친북 관련) 누리꾼 아이디를 건네받은 적 있을 뿐”이라며 “군으로부터 그런 자료를 주고 받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개인간 협조 차원”
경 모르쇠로 일관

이철희 의원은 “청와대까지 제출된 국방부 문서에 나온 근거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찰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재정 의원도 “국정원과 사이버사의 역할이 위축된 상황서 경찰의 보안사이버수사 조직이 확대 개편돼왔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때 이번 사안은 더욱 엄밀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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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