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데뷔 50주년’ 조용필

반세기 감동 선사 ‘영원한 가왕’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가왕’(가요계의 제왕) 조용필이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국민들은 그와 함께 울고 웃었다. 그는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이는 곧 고스란히 국내 가요계의 역사가 됐다. 반세기 동안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그의 활동 발자취를 확인했다.
 

“영미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임진모 평론가)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 (이무원 평론가)

콘서트 따라
지하철 변동

조용필은 국내 가요 역사서 제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줄여서 가왕 조용필. 그런 그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조용필은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서 7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다. 

화성서 염전업을 하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면서 화성 최고의 부잣집 막내아들로 나고 자랐다. 


별다른 금전적인 고민은 없었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잘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형을 데리고 사냥을 즐겨 나가곤 했는데 그때 어린 조용필은 하모니카를 불고 놀았다. 이런 모습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 조용필은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고교 2학년 때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는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8년부터 록그룹 애트킨즈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그의 음악인생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그는 기라성 같은 가수를 배출해낸 미8군의 마지막 가수로 기억됐다. 

조용필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한 뒤 1980년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으로 국내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가왕 탄생의 서막을 연 셈. 

눈길을 끄는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용필이 처음 부른 노래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다른 가수들이 발표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못 받다가 조용필의 목소리가 얹어지면서 국민가요가 됐다. 이후 그는 수많은 히트곡을 부르면서 가왕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대표곡으로는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꿈’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단발머리’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 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미지의 세계’ ‘바운스’ ‘서울 서울 서울’ ‘어제, 오늘, 그리고’ ‘여행을 떠나요’ 등으로 한 번 언급하기에도 숨이 차다. 

세종문화회관서 그의 히트곡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한 번 부르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는 일화는 팬들 사이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1968년부터 활동 미8군서 음악인생
숱한 히트곡으로 국민들 울고 웃어

조용필은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풍운아 이미지의 신해철은 조용필의 전화를 받자마자 두 손으로 전화기를 고쳐잡는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후배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가요계의 거장 이승철이나 이은미도 그 앞에서 겸손한 후배가 된다는 전언이다.

조용필은 모든 세대에서 보기드문 인기를 누렸다. 그와 비견되는 가수는 대중가요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서태지 정도지만 조용필이 더욱 폭넓고 다양한 팬층에게 사랑받았다.

조용필은 다양한 장르에 대한 음악적 도전을 했다. 그가 시도한 장르는 록 음악(미지의 세계), 팝(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 등이다. 

이들 중 다수의 곡들이 히트하면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가 잠실종합운동장서 콘서트를 열면 지하철 배차 간격이 바뀌어 막차시간이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록만으로도 그의 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음악순위 차트 1위에 자신의 곡을 모두 올려놨다. 특히 80년대 1위를 너무 많이 해 순위 프로그램의 1곡당 1위 횟수를 제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길게 1위를 한 곡은 고추잠자리다. 

무려 24주동안 1위를 고수하면서 가왕의 면모를 과시했다.

노력형 순정파
최초 오빠부대

그는 인기순위 자신의 곡을 가장 많이 진입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TV 차트에는 4곡, 연예지에는 6곡을 순위에 올려놨다. MBC 10대가수 가요제서 가수왕을 6차례(80, 81, 83, 84, 85, 86년) 수상했다. 

KBS ‘가요대상’에선 최고인기가수상을 4차례(81, 82, 83, 85년) 수상했다. 그 외 많은 가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었으며, 2000년 가수 최초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다.


그는 한류의 원조이기도 하다. 1985년 도쿄서 열린 제14회 도쿄세계음악제를 기점으로 일본에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일본 내 대표적인 공연기업 교토도쿄와 독점 계약을 맺을 만큼 이름값을 인정받았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서 인기곡이 됐다.
 

그가 일본 활동 기간동안 판매한 음반은 공식 600만장, 비공식 800만장으로 전해진다. 또 현재 일본 내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87∼90년)으로 출연했다. 그는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익숙하게 만든 인물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부대에 대한 보도를 할 정도였다.

음악인생이 마냥 달콤했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적인 시련도 있었다. 2000년에는 저작곡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조용필은 자신의 곡 가운데 31곡 저작권이 지구레코드의 임정수 사장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용필은 1986년 지구레코드사와 계약할 당시 ‘지적재산권 일부 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조용필은 방송권과 공영권을, 복제권과 배포권을 지구레코드 측이 가져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조용필은 소송을 벌였지만 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된 끝에 패소로 마무리됐다. 이후 조용필과 제작사는 합의점을 찾아 곡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소유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곡은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너무 짧아요, 여행을 떠나요 등이다.

조용필의 감성은 세대를 아울렀다. 지난 2013년 조용필은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 ‘헬로’를 발매했다. 타이틀곡 ‘바운스’는 그가 여전히 음악계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포효’와 같았다.

음원이 공개되자 가요계는 들썩거렸다. 예순 넘어 발매한 신곡은 전 세대를 감동시켰지만, 특히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엠넷, 네이버뮤직, 다음뮤직, 벅스 등 주요 음원사이트에서 젊은 뮤지션의 노래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바운스’는 멜론 등 다수의 음원사이트에서도 5위권 내를 유지했다. 환갑을 넘긴 가수가 아이돌과 경쟁해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유례없던 일이 일어났다.

신곡 공개 때마다 가요계 들썩
남녀노소 세대 아우르는 감성

그의 도전에 젊은 뮤지션의 존경담긴 극찬이 이어졌다. 

랩퍼 주석은 “조용필 19집 신곡 대박이네요. 이건 형용하기 힘든 여러 가지가 응축된 느낌. 곡이 소리의 질감서부터 짜임새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데다가 극도로 절제되고 정돈되면서도 화려함이 있는 목소리. 조 선생님은 월드 ‘스타’가 아닌 진정한 한국대표 월드 ‘클래스’ 뮤지션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수 태양은 “조용필 선배님, 미리듣기 음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두근대”라고 전했다. 그룹 ‘샤이니’의 종현은 “말이 필요 없지요. 들어보세요. 존경해요. 선생님”이라고 감탄했다.

해외서도 주목했다. ‘강남스타일’로 빌보드차트 2위에 오른 월드스타 싸이의 ‘젠틀맨’ 누르고 음악차트 1위에 오르면서 해외서도 그를 주목했다. 빌보드는 당시 ‘조용필이 싸이를 K팝 핫 100차트 1위에서 끌어내렸다’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의 활약을 조명했다.

빌보드닷컴은 “조용필은 한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며 “1980년대부터 여러 장의 LP를 발표해 각종 시상식을 휩쓰는 등 패권을 지켰다”고 보도했다.

이어 “조용필은 팝이나 록 장르부터 한국 전통 음악, 트로트까지 폭넓은 음악적 시도를 했다”고 덧붙였다. 조용필의 ‘바운스’는 빌보드 K팝 차트 1위로 뛰어오르며 싸이의 ‘젠틀맨’을 밀어내며 가왕의 면모를 드러냈다.

음악 창작자로서 조용필도 훌륭했다. 조용필이 작사하거나 작곡한 히트곡은 50곡에 달한다. ‘단발머리’ ‘모나리자’ ‘여행을 떠나요’ 등은 지금도 후배 가수들을 통해 수없이 리메이크 되며 사랑받고 있다.
 

이는 편견없는 그의 음악 열정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소에도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 그가 소장하는 음반은, 비틀즈나 마빈 게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핑크 플로이드, AC/DC, 폴리스, 스팅, 퀸 나아가 메탈리카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한다. 

가왕 조용필이 아닌 인간 조용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동안 조용필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눠주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기 위해 전남 소록도서 2년 연속으로 공연했다. 조용필은 첫 공연 당시 내년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이다. 재방문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가수는  그가 유일했다. 자신의 콘서트 수익금 전액을 소아암 환자 500명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인기 순위에 
가장 많은 곡

조용필은 두 번의 결혼을 했다.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씨의 딸 박지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기간을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4년 만에 합의 이혼을 했다. 조용필은 이혼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대부분의 재산을 위자료로 주고 원만하게 이혼했다. 

이후 1994년 미국 사업가 출신 안진현과 재혼하며 화제를 낳았다. 1993년 미국 공연 당시 친누나의 소개로 안진현씨와 사랑에 빠졌다. 안진현은 그의 음악 세계를 존중했다. 조용필 역시 아내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러나 결혼 5년 만에 안진현은 심장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2003년 사망하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안씨의 유해는 조용필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안장됐다. 

조용필의 아내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망 이후 받은 상속액은 전액 심장병을 앓는 환자를 위해 기부했다. 2003년 18집에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진’이라는 노래를 수록해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틈틈이 먼저 떠난 아내 산소를 찾곤 한다.

조용필은 2016년 아내의 생일을 맞아 묘소를 찾은 사실이 처제인 제니퍼 안씨의 남편 SNS를 통해 알려졌다. 제니퍼 안씨는 남편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형부는 지금도 틈틈이 언니 산소를 찾는 순정파”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기수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겪은 희노애락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조용필은 가수로서 50년간 활동을 팬들과 함께 기념하려 한다. 오는 5월 열리는 그의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그의 절친이자 대배우 안성기가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안성기는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가 진행하는 50인 축하 영상 ‘50&50인’을 통해 ‘땡큐 조용필’이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응원했다. 두 사람은 서울 경동중학교 동창으로 무려 54년간 우정을 이어왔다.

지난 13일 조용필 공식 채널을 통해 공개된 ‘50&50인’ 영상에서 안성기는 “집에 놀러다니고 했던 아주 친한 친구였다. 예전에 사진을 보면 모범생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키가 지금 키와 같다. 작은 거인이 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키는 더 이상 커지질 않았다”고 웃었다.

또 “신만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누구도 그런 기미를 채지 못했고 자기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하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지금의 가왕 조용필을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친구 조용필은 자연인 그대로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수 조용필은 어마어마하다. 진짜 거인”이라며 “가창력은 물론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창작의지, 이런 것들은 정말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안성기는 조용필의 많은 곡을 즐겨부른다면서 애창곡 중 하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한 소절을 직접 불러주기도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도 몸과 마음이 푸근하게 젖어든다고 그럴까? 너무 많이 알려졌지만 너무 좋아하는 노래”라고 꼽았다. 

또 조용필의 음악이 50년간 사랑받은 비결로는 “노래를 들었을 때 동화가 되고 공감이 되고 아직까지도 어떤 음악을 내놓을지 모른다는 어떤 기대감이 있는 가수이기도 하고. 그런 모든 여러 가지 요소가 조용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용필은 5월12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을 시작으로 5월1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 6월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등지서 50주년 기념 투어 ‘Thanks to you’를 개최하며, 서울공연 티켓은 20일부터 인터파크를 통해 오픈될 예정이다. 

반세기 넘어 전세대가 주목하는 가수는 매우 드물다. 조용필은 예전에도 가왕이었고 지금도 가왕이다. 다가올 콘서트서 앞으로도 변치 않을 가왕으로서 위용을 드러낼 것이다.

현재 조용필은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방송 출연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지를 소비시대로 변모하고 있는 음악계에 오르지 음악으로만 평가받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대중가요 역사상 
또 한 번 이정표

한동윤 음악평론가는 “과거 명성만 갖고 안주해 온 가수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라고 그를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 또 다시 그의 목소리에 온 국민이 빠져들 것으로 예상된다. 조용필의 데뷔 50주년은 대한민국 대중가요 역사상 또 한 번의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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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검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때 정부의 ‘칼’ 역할을 맡아 위세를 떨쳤던 검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또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검찰청이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유예기간은 1년. 검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봤다. 검찰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그 쓰임새가 달라졌다. 개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적도 있다. 칼로 쓰이면서 동시에 고쳐야 할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검찰의 존재 자체를 지우진 못했다. 견제 기관을 만들어 권한을 축소한 적은 있지만 ‘폐지’를 가시화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의지 당이 화답? 지난달 26일 검찰청을 폐지하고 기획재정부를 분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라 검찰청은 설립 78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검찰청 업무 중 수사는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 기소는 공소청이 맡는다. 중수청은 행정안전부 장관, 공소청은 법무부 장관 소속으로 정해졌다. 검찰청 폐지와 중수청·공소청 설치에는 1년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지난달 30일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검찰청 폐지는 내년 10월로 정해졌다. 내년 10월1일에 법률안이 공포되고 이튿날인 10월2일 중수청·공소청이 설치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재명정부에서 검찰 폐지를 결정하면서 진보 정부의 숙원이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정부 출범 직후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검찰의 수사‧기소 업무를 분리하고 수사권 등은 신설 기관으로 이관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취임한 이후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 선거 전부터 “추석 전 처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검찰이 되도 않는 것을 기소해 무죄를 받고 나면 면책하려고 항소하고, 상고하면서 국민한테 고통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형사소송법에 ‘10명의 범인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혹시 무죄거나 무혐의일 수 있으면 기소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검찰이) 마음에 안 들면 기소해서 고통을 주고 자기 편이면 죄가 명확한데도 봐주면서 기준이 다 무너졌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1심이 무죄라고 했는데 (검찰이) 무조건 항소해서 유죄로 바뀌면 타당한가”라며 “검찰이 1심에서 무죄 난 사건을 항소해서 유죄로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라고 물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통과 내년 10월 폐지 확정돼 정 장관이 ‘5% 정도’라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95%는 무죄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항소심으로 생고생한다는 말”이라며 “나중엔 무죄는 났는데 집안이 망했다, 이거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 아닌가”라고 했다. 또 “국가가 왜 이리 국민한테 잔인한가”라며 “인류 수천년 역사에서 경험으로 정한 역사가 있다. 의심스러우면 피고인 이익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검찰청 폐지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검찰개혁을 숙원으로 여겼던 여권에선 일제히 ‘환영’의 뜻을 보였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일방 독주’라고 비판했다. 실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국민의힘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퇴장하면서 민주당 주도로 표결이 진행됐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본회의 의결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노무현 대통령님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정권의 칼, 검찰은 이제 사라졌다”며 “역사적인 날이다. 검찰청이 78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대변인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진행한 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78년이라는 세월 사이 우린 여러 번에 걸친 개혁의 후퇴, 개혁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며 “이제는 그 길을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개혁 의지가 제대로 발현된 정부조직법”이라고 개정안을 평가했다.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이재명정권이 끝내 검찰청을 없앴다. 이는 간판을 바꾼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던 마지막 사법 안전망을 무너뜨린 폭거”라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사회적 약자”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그러면서 “그 공백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동 학대, 장애인 대상 범죄, 노인 학대 사건은 피해자가 말문을 열기 어렵고 증거는 금세 사라진다”며 “예전에는 빠진 단서를 보완하고 잘못된 수사를 되돌릴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이 닫혔다”고 비판했다. 검사들은 집단 반발 하루아침에 조직이 사라지게 된 검찰 내부는 참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노 대행은 지난달 29일 검찰 구성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78년간 국민과 함께해 온 검찰이 충분한 논의나 대비 없이 폐지되는 현실에 총장 직무대행으로서 매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어 “헌법상 명시된 검찰을 법률로 폐지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역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들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명백한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헌법은 89조에서 검찰총장 임명에 대해, 또한 제12조와 제16조에서는 검사의 영장 청구권에 대해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규정은 헌법의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정부의 준사법기관인 검찰청을 둔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을 통해 발동한 특검에 파견된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3대 특검팀에는 110명의 검사와 99명의 검찰 수사관이 파견돼있다. 김건희 특검팀에는 40명, 내란 특검팀과 채 상병 특검팀에는 각각 56명, 14명의 검사가 근무하고 있다. 김건희 특검팀과 내란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 수를 보면 웬만한 일선 검찰청 검사 정원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이 “검찰청으로 복귀하겠다”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집단 반발로 해석된다. 위헌 주장 헌재 가나 검사들은 지난달 30일 민중기 특검에게 입장문을 제출했다. 입장문에는 정부여당의 검찰개혁 핵심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 ‘검찰의 직접 수사 금지’인데 특검에 검사들이 남는 건 모순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권이나 시민사회 단체 등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칼을 휘두르면서 현재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권력의 방향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검찰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줄 수 없다는 의지가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실제 진보 정부에서는 오랜 시간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시도해 왔다. 본격화된 것은 문정부 때부터지만, 그 시발점은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라고 봐야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립 등 검찰개혁의 핵심 방안들은 다 그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검찰의 반발이 대단했고 당시 정치권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들의 위세도 엄청났다. 실질적인 검찰개혁이 이뤄진 건 문정부 들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검찰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국민 여론도 정부에 힘을 더했다. 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개혁 대상으로 지목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고 공수처가 출범했다. 문제는 검찰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내부 출혈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이후 한직으로 좌천돼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연이어 영전시켰다. 진보 정부의 숙원 노·문 거쳐 결말 이는 향후 문정부를 뒤흔들었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갈등, 윤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당선 등의 불씨가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구기도 했다. 조 전 장관의 뒤를 이어 취임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출동했다. ‘추·윤 대전’이라는 표현이 1년 내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검찰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법안이 급하게 처리되면서 ‘누더기’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공수처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두고 기관끼리 갈등을 빚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에 수사가 몰리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정부의 검찰개혁을 ‘반쪽짜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이정부는 아예 검찰청을 없애겠다는 뜻을 품고 임기를 시작했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 윤석열정부 시기 내내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검찰에 대판 비판적인 시각을 줄곧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뜻은 민주당을 거쳐 법안을 통해 실현됐다. 물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당장 보완수사권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고 중수청과 공소청을 어떻게 운영할지 세밀하게 구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보완 수사권을 존치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검사가 경찰의 기록만 갖고 기소 여부를 판단하면 부실 기소, 불기소 남발 등으로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주장의 배경이다. 또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기관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일각에서는 이름만 다른 ‘검찰’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검찰이 정권의 칼로 기능했던 것처럼 다른 이름의 ‘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걱정이다. 산적한 과제 후폭풍 남아 검찰은 꽤 오랜 시간 외줄 위에 서 있던 상황이다. 이정부가 그 줄을 끊으면서 검찰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검찰에 대한 경고는 늘 있었고 전조도 뚜렷했다. 이제 후속조치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가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검찰 해체가 가져올 후폭풍은 국민에게 언제쯤 닿을 것인가.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