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새로운 영웅 정현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8.01.29 11:07:10
  • 호수 1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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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스물한 살…앞날 창창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 새 역사를 썼다. 22세 테니스 소년, 자신의 우상이자 한때 세계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 마저 꺾으며 8강에 올랐다. 한국 테니스 역사의 신기록이다. 하지만 테니스 소년의 라켓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상대도 꺾으며 4강(준결승)에 진출했다. 그의 아름다웠던 도전은 4강전서 멈췄지만 온 국민은 테니스 왕자 정현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58위·한국체대)이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정현은 지난 24일 호주 멜버른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총상금 5500만호주 달러·약 471억원) 남자단식 8강(준준결승)서 테니스 샌드그렌(97위·미국)을 3-0(6-4 7-6(5) 6-3)으로 완파하고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4강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영원한 영웅
조코비치 넘다

1905년 출범한 호주오픈서 남자단식 4강에 오른 아시아 선수는 1932년 사토 지로(일본) 이후 86년 만이다. 프로 선수들의 메이저 대회 출전이 허용된 1968년 이후로는 아시아 선수가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에 진출한 적은 없었다. 

대만계 미국인 마이클 창이 1996년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여자 단식에서는 리나(중국)가 2014년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서 정현은 연일 강자들을 격파하며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대회 3회전서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를 제압했고 16강전에선 2년 전 같은 대회서 0-3 완패 굴욕을 당한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까지 물리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8강서 정현과 맞붙은 샌드그렌 역시 이번 대회서 무서운 상승세를 보였던 선수다. 세계랭킹은 낮지만 대회 9번 시드 스탄 바브린카(8위·스위스)와 5번 시드 도미니크 티엠(5위·오스트리아) 등 톱10 선수를 잇따라 제압했다.   

이번 대회 돌풍의 주인공끼리 맞붙은 대결은 시작 전부터 관심 대상이었다. 

정현은 이날 1세트 게임스코어 1-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3-1로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자신의 서브 게임을 착실히 지키며 1세트를 6-4로 따낸 정현은 2세트서도 게임스코어 2-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 자신의 서브 게임을 두 차례나 내주며 샌드그렌에게 3-5까지 뒤졌다. 정현은 9·10번째 게임서 승리하며 반격에 나섰고, 강력한 스트로크로 상대의 범실을 유도하며 두 번째 세트마저 제압했다. 

2세트 고비를 넘긴 정현은 3세트 게임스코어 2-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2시간30여분 만에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파죽지세’ 호주오픈 이변·돌풍
단숨에 세계랭킹 20위권 ‘껑충’


준결승 진출로 정현은 88만호주달러(약 7억5600만원)의 상금을 확보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정현의 총상금은 170만9608달러(약 18억3200만원). 남자복식 16강 상금 4만9000호주달러(약 4200만원)까지 더하면 이번 대회서만 누적상금의 43.5%를 벌어들였다. 

만약 정현이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만 해도 200만호주달러(약 17억1800만원)를 받을 예정이었다. 이번 호주오픈의 우승상금은 400만호주달러(약 34억3500만원)에 이른다. 

정현은 이번 한국 테니스 역사상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됐다. 현재 랭킹 포인트 857점인 정현은 이번 승리로 랭킹 포인트 615점을 추가로 확보했다. 합계 1472점. 

향후 발표될 남자프로테니스(ATP) 세계랭킹을 발표할 때 1472점으로 세계 29위에 오른다. 이는 이형택이 2007년 8월6일 기록한 36위를 뛰어 넘는 한국 선수 최고 기록이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최초로 세계랭킹 3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김봉수다. 그는 1988년 1월4일 300위를 기록했고, 1998년 12월11일 129위까지 랭킹을 끌어올렸다. 김봉수는 총 189주 동안 한국 선수 최고 랭킹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형택(631주)에 이어 한국 선수 가운데 두 번째로 긴 기간이다.

정현의 파죽지세에 세계도 놀랐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정현의 놀라운 활약은 호주오픈 준결승에도 계속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계랭킹 58위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다”며 “2004년 호주오픈 준결승에 진출한 마라트 사핀 이후 준결승행에 성공한 가장 낮은 랭커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만 21세인 정현은 2010년 호주오픈 마린 칠리치 이후 그랜드슬램 준결승에 진출한 가장 어린 선수”라며 정현의 진기록에 놀라움을 표했다. 

테니스 집안
약시가 계기

정현은 8강전 경기 직후 이뤄진 코트 내 인터뷰서 ‘4강서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잠시 난감해하다 “50대 50”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정현의 화술이 능숙하다고 평가하면서 “그는 탁월한 젊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도 정현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4강 진출을 집중 조명했다. 

일본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은 스포츠 섹션 메인에 정현의 기사를 배치했다. 일본 스포츠 종합 매체 <THE ANSWER>는 정현의 승리 후 “초신성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했다. 아시아권서 니시코리 케이 이후 쾌거”라고 보도했다. 

니시코리는 현재 아시아 테니스의 최강자다. 세계랭킹 24위에 지난 2014년 US오픈 결승에 올라 준우승을 거두며 역대 아시아 선수 최고 성적을 냈다. 


하지만 니시코리는 2018 호주오픈에는 불참했으며 지난해 8월 손목 부상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현은 이날 승리 후 공식 기자회견서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4강전에 임할 자세를 밝혔다. 또 22세의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경기 운영과 관련해서도 솔직히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정현은 “운동선수는 속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배웠다”며 “들키면 상대에게 기회를 주게 되는 만큼 모든 선수가 속마음을 숨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정현은 동행하는 사람들 일부는 결승 진출, 나아가 우승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날 8강전에는 바짝 긴장한 모습도 드러냈다. 경기 직전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려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일부는 대피하려 자리서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경기에 임했다고 했다.

튼튼한 허벅지가 외국 기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질문에는 “따로 허벅지 훈련을 하지 않고 있다”며 “시합을 많이 하고 있으며 시합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서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비교될 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실감한다고도 했다.

그는 “요즘 하루에 300개의 메시지를 받는다”며 “꼭 답변해주는 성격이라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근 활약상으로 후원업체가 더 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러길 희망하고 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현재 정현에겐 5개 업체가 후원하고 있다. 영어가 부쩍 늘었다는 말에 “특별히 영어 인터뷰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괄목할 만한 성적에 관해 “한국의 주니어가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현이 테니스를 시작한 것은 약시를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1996년생인 정현은 7세에 약시 판정을 받았고 녹색을 많이 보라는 의사 권유를 받아 들여 테니스를 시작하게 됐다. 

약시는 안과적 검사 상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 교정시력(안경이나 콘택트렌즈 등으로 교정한 시력)이 잘 나오지 않는 시력을 말한다. 시력표서 양쪽 눈의 시력이 두 줄 이상 차이가 있을 때 시력이 낮은 쪽을 약시라고 한다. 

또 정현은 아버지와 형 모두 테니스 선수 출신인 ‘테니스 집안’ 막내다. 특히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선수의 길에 입문했다. 친형도 테니스 선수로 활동 중이다. 

여담이지만 형인 정홍은 국내 대학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넘버 원을 다투는 실력을 가졌는데 둘은 공식경기서 두 번 만나 정현이 2승을 거뒀다.

이렇게 테니스 선수 가족이지만 정현의 부모님은 두 아들 중 한 명은 테니스 대신 공부를 시킬 생각이어서 처음에 정현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정현은 테니스 선수로서의 시작은 본인의 고집과 신체적인 이유와 겹친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의 아버지가 실업 테니스 선수였다가 은퇴한 후에 테니스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형인 정홍을 자연스럽게 테니스 선수로 키웠다. 

한국 테니스 
새 역사 쓰다

집에선 차남인 정현이 테니스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했는데 형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공부보다 테니스를 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여기에 정현 본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상당히 심한 약시(정확하게는 원시, 난시, 약시가 모두 있었다고 한다)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과 함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치료를 위해 시작했지만 이후 정현은 2008년 주니어급 테니스 대회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오렌지볼 12세부서 우승,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학창 시절에는 수원북중학교의 시즌 전관왕을 이끌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는 삼일공고로 진학했다. 특히 2013년 7월에는 그랜드슬램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014년에는 퓨처스 대회 3번과 창삿 방콕 오픈 대회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방콕 오픈은 첫 챌린저급 대회다. 이후 2014년 미국 오픈 대회에 데이비스 컵 한국 대표팀으로 나서 두 번의 경기서 이겼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서 복식 금메달까지 거머쥐어 군면제까지 받았다. 특히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단식/복식 금메달, ATP 가오슝 챌린저 테니스 단식 우승 등 정현은 매 경기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세계 테니스계서 주목받는 선수로 거듭났다.

정현의 맹활약으로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베이스라이너’.

조코비치와 경기서 안정적인 스트로크와 절묘한 패싱 샷으로 그를 여러 차례 수세로 몰았다. 특히 시합 도중 33번의 랠리 접전 끝에 포인트를 따냈던 것은 이날 경기의 백미. 정현은 냉정하리만치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수차례의 랠리서 조코비치에 우위를 점했다. 

86년 만에 아시아인 남단식 4강
역대 한국 선수 중 최고 신기록 

평소에도 정현은 빠르게 네트에 접근하기보다는 스트로크 플레이를 통한 안정적 경기 운영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코트 뒤 베이스라인(Baseline) 근처 깊숙한 곳에서 그라운드 스트로크를 통한 랠리를 이어가는 타입의 선수를 '베이스라이너(Baseliner)'라고 한다.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위해서는 코트 전반을 커버할 수 있는 빠른 발과 강인한 체력을 필수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플레이 스타일 상 경기 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코트를 전반적으로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도 갖춰야 한다. 긴 스트로크와 리턴을 통해 상대의 범실을 유발하는 것도 베이스라이너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다. 

정현과 조코비치는 물론, 강철 체력을 과시하는 현 세계 랭킹 1위 라파엘 나달(호주 오픈에선 8강전서 마린 칠리치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도 대표적인 베이스라이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미남 스타 안드레 애거시도 베이스라이너의 교과서 같은 선수다. 베이스라이너와 대비되는 ‘서브 앤 발리(Serve & Volley)’ 플레이어도 있다. 서브 앤 발리는 강한 서브를 통해 상대방을 흔들고, 네트 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리턴된 볼을 발리로 마무리 짓는 스타일이다. 

서브 앤 발리는 서브가 빠른 속도로 상대방 구석에 정확히 꽂힐 경우 경기를 순식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볼의 속도가 빠른 잔디 코트서 위력을 발휘한다. 

대개 강력한 서브 능력을 장착한 선수들이 즐겨 사용한다. 최근 정현과의 호주오픈 단식 1회전서 기권했던 미샤 즈베레프가 서브 앤 발리를 자주 구사한다. 또 1990년대 세계 테니스를 석권했던 피트 샘프라스도 전형적인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최근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의 비율은 크게 감소하는 추세다. 이는 라켓 기술 발전 및 경량화로 선수들의 서비스 리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테니스 공식 사용구 크기 확대에 따른 범실 가능성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열광
외신도 흥분

베이스라인 및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올 라운더(All Rounder)’ 타입의 선수도 있다. 사실상 대부분 선수들이 이에 속하며, 기술의 숙련도에 따라 특색이 없는 선수가 될 수도 있고, 매우 강력한 선수가 될 수도 있다.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손꼽히는 현 세계 랭킹 2위 로저 페더러는 대표적 무결점 올 라운더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페더러는 경기 흐름에 따라 베이스라인과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현 신드롬’ 아이템 찾는 사람들

최근 ‘정현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 정현에 대한 관심은 그가 경기서 착용한 의상, 고글에도 관심이 쏠릴 정도로 뜨겁다. 놀라운 체력과 감각적인 플레이로 한국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정현의 패션 아이템을 소개한다.

정현이 경기서 착용한 의상은 프랑스 스포츠 브랜드 ‘라코스테’(LACOSTE)의 제품이다. 

라코스테는 프랑스의 전설적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가 설립한 스포츠 브랜드다. 라코스테는 보다 편안한 테니스 경기를 위해 세계 최초로 피케 소재 반소매 셔츠를 개발하기도 했다. 정현이 2016년 라코스테와 5년 간의 공식 후원 계약을 맺으면서 그의 유니폼엔 라코스테의 로고 ‘악어’가 함께하게 됐다.

정현이 지난 23일 호주오픈 8강에 진출한 뒤 가진 인터뷰서 착용한 시계도 화제다. 이날 인터뷰서 정현은 라코스테의 블랙 점퍼에 굵직한 밴드의 손목시계를 착용했다. 

이는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라도(Rado)의 하이퍼크롬 캡틴쿡 45㎜로, 가격은 286만원이다. 오버사이즈 인덱스와 두툼한 화살형 바늘, 1960년대 라도 스타일인 닻 장식이 있다. 

정현은 차세대 테니스 스타를 발굴해 후원하는 라도의 ‘라도 영스타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어릴 때 고도근시와 약시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정현은 테니스 선수들이 잘 착용하지 않는 고글을 애용, ‘교수’라는 별명도 붙었다. 

테니스 코트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고글' 스타일은 정현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됐다. 정현이 이번 경기 때 착용한 고글은 아이웨어 브랜드 오클리의 ‘플락 베타’로, 렌즈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20만원 중반대 제품이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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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