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새로운 영웅 정현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8.01.29 11:07:10
  • 호수 1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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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스물한 살…앞날 창창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 새 역사를 썼다. 22세 테니스 소년, 자신의 우상이자 한때 세계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 마저 꺾으며 8강에 올랐다. 한국 테니스 역사의 신기록이다. 하지만 테니스 소년의 라켓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상대도 꺾으며 4강(준결승)에 진출했다. 그의 아름다웠던 도전은 4강전서 멈췄지만 온 국민은 테니스 왕자 정현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58위·한국체대)이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정현은 지난 24일 호주 멜버른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총상금 5500만호주 달러·약 471억원) 남자단식 8강(준준결승)서 테니스 샌드그렌(97위·미국)을 3-0(6-4 7-6(5) 6-3)으로 완파하고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4강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영원한 영웅
조코비치 넘다

1905년 출범한 호주오픈서 남자단식 4강에 오른 아시아 선수는 1932년 사토 지로(일본) 이후 86년 만이다. 프로 선수들의 메이저 대회 출전이 허용된 1968년 이후로는 아시아 선수가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에 진출한 적은 없었다. 

대만계 미국인 마이클 창이 1996년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여자 단식에서는 리나(중국)가 2014년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서 정현은 연일 강자들을 격파하며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대회 3회전서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를 제압했고 16강전에선 2년 전 같은 대회서 0-3 완패 굴욕을 당한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까지 물리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8강서 정현과 맞붙은 샌드그렌 역시 이번 대회서 무서운 상승세를 보였던 선수다. 세계랭킹은 낮지만 대회 9번 시드 스탄 바브린카(8위·스위스)와 5번 시드 도미니크 티엠(5위·오스트리아) 등 톱10 선수를 잇따라 제압했다.   

이번 대회 돌풍의 주인공끼리 맞붙은 대결은 시작 전부터 관심 대상이었다. 

정현은 이날 1세트 게임스코어 1-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3-1로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자신의 서브 게임을 착실히 지키며 1세트를 6-4로 따낸 정현은 2세트서도 게임스코어 2-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 자신의 서브 게임을 두 차례나 내주며 샌드그렌에게 3-5까지 뒤졌다. 정현은 9·10번째 게임서 승리하며 반격에 나섰고, 강력한 스트로크로 상대의 범실을 유도하며 두 번째 세트마저 제압했다. 

2세트 고비를 넘긴 정현은 3세트 게임스코어 2-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2시간30여분 만에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파죽지세’ 호주오픈 이변·돌풍
단숨에 세계랭킹 20위권 ‘껑충’


준결승 진출로 정현은 88만호주달러(약 7억5600만원)의 상금을 확보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정현의 총상금은 170만9608달러(약 18억3200만원). 남자복식 16강 상금 4만9000호주달러(약 4200만원)까지 더하면 이번 대회서만 누적상금의 43.5%를 벌어들였다. 

만약 정현이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만 해도 200만호주달러(약 17억1800만원)를 받을 예정이었다. 이번 호주오픈의 우승상금은 400만호주달러(약 34억3500만원)에 이른다. 

정현은 이번 한국 테니스 역사상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됐다. 현재 랭킹 포인트 857점인 정현은 이번 승리로 랭킹 포인트 615점을 추가로 확보했다. 합계 1472점. 

향후 발표될 남자프로테니스(ATP) 세계랭킹을 발표할 때 1472점으로 세계 29위에 오른다. 이는 이형택이 2007년 8월6일 기록한 36위를 뛰어 넘는 한국 선수 최고 기록이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최초로 세계랭킹 3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김봉수다. 그는 1988년 1월4일 300위를 기록했고, 1998년 12월11일 129위까지 랭킹을 끌어올렸다. 김봉수는 총 189주 동안 한국 선수 최고 랭킹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형택(631주)에 이어 한국 선수 가운데 두 번째로 긴 기간이다.

정현의 파죽지세에 세계도 놀랐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정현의 놀라운 활약은 호주오픈 준결승에도 계속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계랭킹 58위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다”며 “2004년 호주오픈 준결승에 진출한 마라트 사핀 이후 준결승행에 성공한 가장 낮은 랭커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만 21세인 정현은 2010년 호주오픈 마린 칠리치 이후 그랜드슬램 준결승에 진출한 가장 어린 선수”라며 정현의 진기록에 놀라움을 표했다. 

테니스 집안
약시가 계기

정현은 8강전 경기 직후 이뤄진 코트 내 인터뷰서 ‘4강서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잠시 난감해하다 “50대 50”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정현의 화술이 능숙하다고 평가하면서 “그는 탁월한 젊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도 정현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4강 진출을 집중 조명했다. 

일본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은 스포츠 섹션 메인에 정현의 기사를 배치했다. 일본 스포츠 종합 매체 <THE ANSWER>는 정현의 승리 후 “초신성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했다. 아시아권서 니시코리 케이 이후 쾌거”라고 보도했다. 

니시코리는 현재 아시아 테니스의 최강자다. 세계랭킹 24위에 지난 2014년 US오픈 결승에 올라 준우승을 거두며 역대 아시아 선수 최고 성적을 냈다. 


하지만 니시코리는 2018 호주오픈에는 불참했으며 지난해 8월 손목 부상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현은 이날 승리 후 공식 기자회견서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4강전에 임할 자세를 밝혔다. 또 22세의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경기 운영과 관련해서도 솔직히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정현은 “운동선수는 속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배웠다”며 “들키면 상대에게 기회를 주게 되는 만큼 모든 선수가 속마음을 숨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정현은 동행하는 사람들 일부는 결승 진출, 나아가 우승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날 8강전에는 바짝 긴장한 모습도 드러냈다. 경기 직전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려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일부는 대피하려 자리서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경기에 임했다고 했다.

튼튼한 허벅지가 외국 기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질문에는 “따로 허벅지 훈련을 하지 않고 있다”며 “시합을 많이 하고 있으며 시합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서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비교될 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실감한다고도 했다.

그는 “요즘 하루에 300개의 메시지를 받는다”며 “꼭 답변해주는 성격이라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근 활약상으로 후원업체가 더 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러길 희망하고 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현재 정현에겐 5개 업체가 후원하고 있다. 영어가 부쩍 늘었다는 말에 “특별히 영어 인터뷰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괄목할 만한 성적에 관해 “한국의 주니어가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현이 테니스를 시작한 것은 약시를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1996년생인 정현은 7세에 약시 판정을 받았고 녹색을 많이 보라는 의사 권유를 받아 들여 테니스를 시작하게 됐다. 

약시는 안과적 검사 상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 교정시력(안경이나 콘택트렌즈 등으로 교정한 시력)이 잘 나오지 않는 시력을 말한다. 시력표서 양쪽 눈의 시력이 두 줄 이상 차이가 있을 때 시력이 낮은 쪽을 약시라고 한다. 

또 정현은 아버지와 형 모두 테니스 선수 출신인 ‘테니스 집안’ 막내다. 특히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선수의 길에 입문했다. 친형도 테니스 선수로 활동 중이다. 

여담이지만 형인 정홍은 국내 대학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넘버 원을 다투는 실력을 가졌는데 둘은 공식경기서 두 번 만나 정현이 2승을 거뒀다.

이렇게 테니스 선수 가족이지만 정현의 부모님은 두 아들 중 한 명은 테니스 대신 공부를 시킬 생각이어서 처음에 정현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정현은 테니스 선수로서의 시작은 본인의 고집과 신체적인 이유와 겹친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의 아버지가 실업 테니스 선수였다가 은퇴한 후에 테니스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형인 정홍을 자연스럽게 테니스 선수로 키웠다. 

한국 테니스 
새 역사 쓰다

집에선 차남인 정현이 테니스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했는데 형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공부보다 테니스를 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여기에 정현 본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상당히 심한 약시(정확하게는 원시, 난시, 약시가 모두 있었다고 한다)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과 함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치료를 위해 시작했지만 이후 정현은 2008년 주니어급 테니스 대회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오렌지볼 12세부서 우승,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학창 시절에는 수원북중학교의 시즌 전관왕을 이끌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는 삼일공고로 진학했다. 특히 2013년 7월에는 그랜드슬램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014년에는 퓨처스 대회 3번과 창삿 방콕 오픈 대회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방콕 오픈은 첫 챌린저급 대회다. 이후 2014년 미국 오픈 대회에 데이비스 컵 한국 대표팀으로 나서 두 번의 경기서 이겼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서 복식 금메달까지 거머쥐어 군면제까지 받았다. 특히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단식/복식 금메달, ATP 가오슝 챌린저 테니스 단식 우승 등 정현은 매 경기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세계 테니스계서 주목받는 선수로 거듭났다.

정현의 맹활약으로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베이스라이너’.

조코비치와 경기서 안정적인 스트로크와 절묘한 패싱 샷으로 그를 여러 차례 수세로 몰았다. 특히 시합 도중 33번의 랠리 접전 끝에 포인트를 따냈던 것은 이날 경기의 백미. 정현은 냉정하리만치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수차례의 랠리서 조코비치에 우위를 점했다. 

86년 만에 아시아인 남단식 4강
역대 한국 선수 중 최고 신기록 

평소에도 정현은 빠르게 네트에 접근하기보다는 스트로크 플레이를 통한 안정적 경기 운영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코트 뒤 베이스라인(Baseline) 근처 깊숙한 곳에서 그라운드 스트로크를 통한 랠리를 이어가는 타입의 선수를 '베이스라이너(Baseliner)'라고 한다.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위해서는 코트 전반을 커버할 수 있는 빠른 발과 강인한 체력을 필수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플레이 스타일 상 경기 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코트를 전반적으로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도 갖춰야 한다. 긴 스트로크와 리턴을 통해 상대의 범실을 유발하는 것도 베이스라이너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다. 

정현과 조코비치는 물론, 강철 체력을 과시하는 현 세계 랭킹 1위 라파엘 나달(호주 오픈에선 8강전서 마린 칠리치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도 대표적인 베이스라이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미남 스타 안드레 애거시도 베이스라이너의 교과서 같은 선수다. 베이스라이너와 대비되는 ‘서브 앤 발리(Serve & Volley)’ 플레이어도 있다. 서브 앤 발리는 강한 서브를 통해 상대방을 흔들고, 네트 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리턴된 볼을 발리로 마무리 짓는 스타일이다. 

서브 앤 발리는 서브가 빠른 속도로 상대방 구석에 정확히 꽂힐 경우 경기를 순식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볼의 속도가 빠른 잔디 코트서 위력을 발휘한다. 

대개 강력한 서브 능력을 장착한 선수들이 즐겨 사용한다. 최근 정현과의 호주오픈 단식 1회전서 기권했던 미샤 즈베레프가 서브 앤 발리를 자주 구사한다. 또 1990년대 세계 테니스를 석권했던 피트 샘프라스도 전형적인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최근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의 비율은 크게 감소하는 추세다. 이는 라켓 기술 발전 및 경량화로 선수들의 서비스 리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테니스 공식 사용구 크기 확대에 따른 범실 가능성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열광
외신도 흥분

베이스라인 및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올 라운더(All Rounder)’ 타입의 선수도 있다. 사실상 대부분 선수들이 이에 속하며, 기술의 숙련도에 따라 특색이 없는 선수가 될 수도 있고, 매우 강력한 선수가 될 수도 있다.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손꼽히는 현 세계 랭킹 2위 로저 페더러는 대표적 무결점 올 라운더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페더러는 경기 흐름에 따라 베이스라인과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현 신드롬’ 아이템 찾는 사람들

최근 ‘정현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 정현에 대한 관심은 그가 경기서 착용한 의상, 고글에도 관심이 쏠릴 정도로 뜨겁다. 놀라운 체력과 감각적인 플레이로 한국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정현의 패션 아이템을 소개한다.

정현이 경기서 착용한 의상은 프랑스 스포츠 브랜드 ‘라코스테’(LACOSTE)의 제품이다. 

라코스테는 프랑스의 전설적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가 설립한 스포츠 브랜드다. 라코스테는 보다 편안한 테니스 경기를 위해 세계 최초로 피케 소재 반소매 셔츠를 개발하기도 했다. 정현이 2016년 라코스테와 5년 간의 공식 후원 계약을 맺으면서 그의 유니폼엔 라코스테의 로고 ‘악어’가 함께하게 됐다.

정현이 지난 23일 호주오픈 8강에 진출한 뒤 가진 인터뷰서 착용한 시계도 화제다. 이날 인터뷰서 정현은 라코스테의 블랙 점퍼에 굵직한 밴드의 손목시계를 착용했다. 

이는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라도(Rado)의 하이퍼크롬 캡틴쿡 45㎜로, 가격은 286만원이다. 오버사이즈 인덱스와 두툼한 화살형 바늘, 1960년대 라도 스타일인 닻 장식이 있다. 

정현은 차세대 테니스 스타를 발굴해 후원하는 라도의 ‘라도 영스타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어릴 때 고도근시와 약시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정현은 테니스 선수들이 잘 착용하지 않는 고글을 애용, ‘교수’라는 별명도 붙었다. 

테니스 코트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고글' 스타일은 정현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됐다. 정현이 이번 경기 때 착용한 고글은 아이웨어 브랜드 오클리의 ‘플락 베타’로, 렌즈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20만원 중반대 제품이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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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 충돌’ 검찰개혁 엇박자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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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추석 연휴 전에 검찰개혁을 진행하려던 더불어민주당이 신중한 입장에 들어갔다. 검찰개혁 초안을 발표하려던 당의 의견에,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수장 정성호 장관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다. 정 장관의 의견에 대해 여권 관계자들은 공개적으로 비판까지 했다. 당정 간 불협화음으로 검찰개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다. 당 지도부와 정부는 뒷수습에 나섰지만, 완전히 진화될지 관심이 모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계속 강조해 온 ‘검찰개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공언대로 ‘추석 전 검찰개혁 입법 마무리’를 목표로 속도전에 돌입한 가운데 친명(친 이재명)계 좌장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민주당 지도부와 결이 다른 의견을 연일 내놓으며 당정 간 불협화음이 나타났다. 속도전 앞두고… 민주당 국민주권 검찰 정상화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6일, 회의를 열고 검찰개혁의 대원칙인 수사권·기소권 분리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확정할 방침이었다. 민주당은 이번 개정안으로 수사권·기소권의 분리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검찰청을 폐지한다. 그리고 기존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이관하기 위해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설치할 예정이다. 공소청은 기존 검찰의 기소권을 이관받아 기소와 공소 유지, 영장 발부 등 검찰의 고유 업무를 도맡는다. 중수청의 경우, 검찰의 수사 대상이었던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의 수사를 담당한다. 이 외에도 국수위 설치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수위는 국무총리 산하 기관으로 경찰을 비롯해 중수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 국가 수사 기관 전체를 통솔하는 시스템이다. 이번 검찰 조직 재편으로 수사 기능을 갖게 될 중수청을 행정안전부와 법무부 중 어느 소속으로 할지 등의 쟁점 현안들도 정리돼 개정안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은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있다. 이들은 각각 행안부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소속돼있다. 이 같은 초안에 대해 당 안팎에선 우려를 제기했다. 특히 국수위의 권한이 자칫 과도해지면, 정부의 수사 통제와 외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앞서 밝힌 것처럼 행안부 산하에 이미 경찰이라는 수사기관이 있는 상황에서 중수청까지 포함될 경우, 행안부의 수사 기능이 자칫 과도하게 커지는 것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공소청의 보완수사권에 대한 당과 정부의 이견도 걸림돌이다. 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 대원칙 측면에서 공소청에 보완수사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법무부는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가진 상황에서 원활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공소청에 보완수사권 부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6일 초안 발표 예정이었지만 구체안 두고 특위·법무부 입장 차 지난달 25일 민주당 검찰정상화특위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었지만 최종안을 내지 않았다. 민형배 특위위원장은 지난 7일 비공개 당정대 협의 후 기자들과 만나 “속도 조절론은 없다”며 이날 회의를 최종안 확정을 위한 데드라인으로 예고했지만, 180도 달라졌다. 대신 이날 회의는 법안의 완결성에 집중했다고 한다. 특위 간사인 이용우 의원은 "초안이 사실상 나왔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그야말로 특위안이고, 당정대 간의 논의 과정이라든지 국민적 공론화를 해 나가는 과정이라든지 이 과정이 여전히 많이 남아서 최종적으로 가다듬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속도조절 배경에는 개혁의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입장이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송기헌 의원은 정 장관에게 ‘검찰개혁의 핵심이 수사와 기소의 분리냐’고 물었다. 이에 정 장관은 “그렇다”면서 “검찰이 수사를 개시하거나 인지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은 분리해낸다는 게 1차적인 목표”라고 답했다. 다만 정 장관은 “현재는 (검찰이) 보완수사 요구 또는 재수사를 할 수 있는데, (사건이) 핑퐁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과거보다 사건 처리 기간이 2배 이상 늘었다”며 “이런 문제가 심화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사건) 전건 송치를 할 것인지, 전건 송치를 하지 않는다면 수사지휘권을 줄 것인지, 송치된 사건에 대한 보완 수사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부연했다. 정 장관은 민주당이 중수청을 행안부 산하에 두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경찰·국가수사본부·공수처·중대범죄수사청 4개 수사기관이 모두 행안부 밑에 들어가면 권한이 집중된다”고 우려했다. 또 기존 검찰청을 공소청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검찰은 헌법상 검찰총장 임명 관련 규정들과 검사 관련 규정들도 있기 때문에 위헌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 장관의 다른 의견 국수위에 대해서는 “지금 나와 있는 안에 의하면 국수위가 경찰의 불송치 사건에 대한 이행을 담당하게 돼있는데 최근 통계에 4만건 이상 된다”며 “독립된 행정위원회가 4만건 이상 사건을 다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26일 예결위 전체회의에서도 국민의힘 정점식 의원이 ‘검찰 조직을 폐지하는 것이 적절하냐’고 묻자 정 장관은 “검찰을 해체한다고 표현하지만 저는 검찰이 수행해오던 기능을 재분배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에 대해 “민주당의 당론은 아직 아니”라며 “1차 수사기관, 특히 경찰의 부실·봐주기 수사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이 ‘검찰청 폐지로 검찰의 전문 수사 역량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질문하자 정 장관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주가조작 등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금융 범죄 또는 조세 사건은 굉장히 난이도가 높아 고도의 수사 기법이 필요하고 법리적 쟁점들이 많다”며 “이런 전문 수사 역량을 중수청에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은 회의 당일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의 수사개시권과 인지수사권은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검찰개혁의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견설 진상은? 그러면서 “수사기관과 공소기관 사이의 ‘핑퐁’ 등 책임 떠넘기기, 수사 지연, 부실 수사로 인해 국민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현실적이고 촘촘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며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성공한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정 장관의 발언 이후 당 안팎에서는 정 장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 검찰개혁 특위 위원장인 민형배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검찰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입장에 관한 질문에 “당 지도부는 장관께서 좀 너무 나가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민 의원은 “특위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고, 당정에서 합의됐거나 의논해서 한 건 아니”라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 의견을 말씀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이 행안부 산하 중수청 설치 방안에 우려를 밝힌 데 대해서도 “당에서 입장을 내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장관 본분에 충실한 건가, 이런 우려가 좀 있다”면서 “(장관이) 저희 특위 초안을 모르는 상태 같다”고 지적했다. 당 지도부의 의견을 내세워 정 장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이른바 ‘검찰개혁 4법’을 발의하고 관련 논의를 주도해 온 김용민 의원 역시 이날 페이스북에서 “바꾼다고 모든 것이 개혁은 아니다”라며 “개혁을 왜 하려고 하는지 출발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도부·정부 나서 진화 “당 결정대로 따라갈 것” 민주당과 정 장관의 의견이 갈리면서 ‘당정이견’설이 분출한 가운데, 당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28일 오후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에서 열린 국회의원 워크숍 지도부 인사말에서 “개혁의 작업은 한 치의 오차·흔들림·불협화음 없이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며 “이 과정에서 당정대는 원팀 원보이스로 굳게 단결해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김병기 원내대표도 “국민주권정부의 실질적 성과는 당정대 원팀 정신이 그 중심에 있다”며 “다음 주부터 우리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첫 정기국회가 시작된다. 이재명정부 국정 기조와 국정 과제의 실천을 (당이)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당정 일치 기조를 강조했다. 정부와 대통령실에서도 수습·진화에 나섰다. 이날 워크숍 현장에 방문한 정 법무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이견은 없다”며 “어쨌든 입법의 주도권은 정부가 아니라 당이 갖고 있다. 당에서 잘 결정되는 대로 잘 논의해서 따라갈 것”이라고 한발 물러났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도 당과 법무부 사이 이견에 대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전체적인 로드맵을 합의했다. 정부와 당이 각자 검찰개혁안에 대한 여러 가지 각론에 대한 의견들을 제기하기도 하고 수렴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당과 정부의 의견만 다른 게 아니라 당 내부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각각의 의견들이 다 도출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론화 과정에 이제 들어간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 내용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다만 바라건대 내용 자체의 토론에 좀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특정인과 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공격 같은 건 하지 말고 이렇게 내용 토론으로 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법조계 의견은? 한편 법조계에선 정 장관이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평소 소신과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검사장 출신 한 법조인은 “정 장관은 외골수처럼 직진하기보다 남의 편을 설득하고 내 편을 혼내가면서 합의점을 찾는 정치를 해온 사람”이라면서 “강성 개혁에 집착하기보다는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