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운 좋은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9.11 10:26:46
  • 호수 11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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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좋다고 웃을 때가 아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한국 축구가 우여곡절 끝에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획득하며 9회 연속 본선 진출의 꿈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번 최종예선서 보여준 전력이라면 내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서도 지난 2014년 브라질대회 때처럼 예선탈락이 자명하다. 신태용 감독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FIFA랭킹 49위)은 지난 6일 0시(이하 한국시각)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위치한 분요드코르 스타디움서 열린 우즈베키스탄(FIFA 랭킹 64위)과의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A조 10차전서 0-0 무승부를 거뒀다.

K리그 슈퍼스타
대표팀은 글쎄

이날 무승부로 한국은 4승3무3패(승점 15점)를 기록, 이미 본선 진출에 성공한 이란(승점 21점)에 이어 조 2위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우즈베키스탄은 4승1무5패(승점 13점)를 기록, 이란과 2-2로 비긴 시리아(3위)에 밀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지난 2014년 9월 브라질월드컵 예선서 한국축구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 한국은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서 1무2패로 조 최하위에 그치며 탈락했다. 이후 전열을 갖추기 위해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2015 호주 아시안컵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갓틸리케’라는 찬사를 받았다. 상승세를 살려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뿐만 아니라 본선 무대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그러나 지난해 9월1일 최종예선으로 돌입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중국과의 1차전부터 삐걱거렸다. 3-0으로 앞서고 있다가 후반 집중력 부족을 노출하며 2골을 내리 내줬다. 자칫 비길 수도 있는 경기였다. 

이후 A조 최약체로 분류된 시리아와의 제3국 원정 경기서 득점 없이 0-0으로 비겼다. 이어 지옥의 이란 테헤란 원정에선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한 끝에 0-1로 패했다. 슈틸리케를 향한 시선이 급싸늘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후 지난해 11월 안방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서 2-1 승리를 거두며 급한 불을 끄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경기력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대표팀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2017년 3월 치른 첫 최종예선 경기서 창샤로 원정을 떠나 0-1 참패를 당하고 왔다. 곧바로 시리아를 안방서 1-0으로 물리치긴 했으나 6월에는 카타르 원정서 2-3으로 패했다. 결국 슈틸리케 감독은 사실상 경질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팀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한국 축구가 떠안아야 했다. 한국의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 무산될 수도 있는 위기서 소방수 신태용 감독이 나섰다.

우여곡절 끝 러시아 본선티켓 획득
최악의 최종예선…이대론 3패 탈락

대승적인 차원서 K리그 각 구단들이 조기 소집에 응하는 등 적극 협조했다. 손발을 맞출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이란과의 홈경기에선 0-0으로 비겼다. 수적 우위. 그리고 6만 관중이 넘는 홈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도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 우즈벡전은 자칫 월드컵서 떨어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벼랑 끝에 몰린 한국 축구는 배수진의 각오로 이번 우즈벡 원정에 임했다. 그리고 0-0 무승부로 승점 1점을 따내며 천신만고 끝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1년 간의 최종예선이었다. 

하지만 대표팀의 불안전한 경기력 때문에 벌써부터 신 감독의 경질설까지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거스 히딩크 부임설’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대한축구협회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못 박은 상태다. 

신 감독이 2018 러시아월드컵까지 임기를 보장 받은 상황에서 때 아닌 루머로 대표팀은 곤욕을 치르게 됐다. 

신 감독이 해결해야 할 숙제도 산적하다. 그중에서도 무딘 공격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우즈베키스탄전서 무득점 무승부를 거뒀다. 20세 이하(U-20) 월드컵서 화끈한 공격축구로 16강에 올랐던 신 감독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한국은 이란과 우즈베키스탄 2연전서 한 번도 득점하지 못했다.

이란전서도, 우즈벡전서도 손흥민과 황희찬 조합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번 우즈벡전서 신 감독은 손흥민과 황희찬 그리고 이근호를 공격 전방에 배치했다. 활동량이 좋은 세 선수를 전반에 배치해 상대를 흔들겠다는 계획이었다. 

구원투수 등판 
두게임 낙제점

결과는 실패였다. 크로스는 잦았지만 부정확했고 몇 차례 얻어낸 기회 역시 결정력이 부족했다. 오히려 염기훈의 후반 교체 투입 후 공격 전개가 살아난 모습을 보여줬다. 이동국 역시 중요한 기회를 만들어내며 베테랑다운 활약상을 펼쳤지만 2% 부족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신 감독은 지난 7월4일 울리 슈틸리케 감독 후임으로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다. 대표팀은 클럽과 다르다. 소집이 제한적이며 훈련 시간도 짧다. 신나게 공격하는 신 감독 스타일을 마음껏 활용하기에는 2경기가 주는 무게감이 컸다. 
 

어쩌면 신 감독 스스로 작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수비를 강조했고 무실점을 입에 올렸다. 열흘의 절반을 수비 조직력을 다듬기 위해 혈안이었던 이유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2경기서 원하던 무실점을 통해 월드컵 진출을 달성했다. 

하지만 수비 역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수치로 보면 나쁘지 않다. 슈틸리케 감독 체제서 8경기서 10골을 내줬던 수비력과 비교하면 분명 좋아졌다.

그러나 무례한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던 수비수 김영권. 우즈벡전서 스리백의 중앙 수비수로 나선 장현수 모두 불안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무리한 볼 돌리기와 백패스로 상대에 기회를 내줄 뻔했다. 

수비진용서의 압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상대에 공간을 허용했다. 우즈벡 선수들이 조금만 더 결정력을 높였다면 충분히 실점할 수 있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표팀은 이란이 시리아와의 경기서 비긴 덕분에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자력 진출이지만, 이란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칫 월드컵 9회 연속 본선 진출에도 적신호가 켜질 뻔한 상황이었다. 

여러 문제점이 드러난 만큼 남은 기간 동안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 이대로라면 월드컵 본선서도 힘든 경쟁을 이어갈 것이 뻔하다. 

신 감독의 어깨가 무겁다. 남은 9개월 간 대표팀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큰 숙제를 떠안게 됐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여전히 신 감독에게 기대를 걸어볼만한 구석은 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을 비춰볼 때 충분히 이번 숙제도 풀어갈 수 있을 거라는 평가가 나온다. 

신 감독은 1969년 10월 경북 영덕군서 태어났다. 대구공고, 영남대를 거쳐 1992년 일화 천마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프로 생활은 화려했다. 

데뷔 첫해 영리한 플레이로 일화의 공수를 조율하며 신인상을 받았다. 신 감독이 합류한 일화 천마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년 연속 우승 위업을 달성한다. 


1995년 신 감독은 20득점 20도움을 기록해 20-20 클럽에 가입, 리그 MVP를 차지했다. 또한 연말에 열린 1995-1996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마저 제패하며 일화 천마는 명실상부한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한다. 그해 포항 아톰즈와 벌인 챔피언결정전은 지금도 K리그의 대표적인 명승부로 꼽힌다.

1996년 일화 천마는 암흑기에 들어간다. 천안시로 연고지를 옮기며 상부와 불화를 겪은 박종환 감독이 해임됐다. 이장수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을 맡았는데 이 때부터 리그 최하위권을 맴돌게 된다. 

하지만 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K리그 MVP를 수상하는 등 신 감독의 활약은 변함없었다. 특히 MVP 2회 수상은 신 감독만 갖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1998년 개인 통산 30득점 30도움을 기록. 이 때 독일 분데스리가의 한자 로스토크의 영입 제의를 받아 유럽에 진출할 듯했으나 무산됐다. 이듬해인 1999년 차경복 감독이 천안 일화를 맡는다. 이때 첫 FA컵 우승을 맛본다.

지금 같으면
세계적 망신

2000년 개인 40득점 40도움을 기록한다. 그해 일화 천마는 천안서 성남으로 다시 옮기며 상위권으로 도약한다. 신 감독은 2001년 50득점 50도움을 달성했다. 그리고 성남 일화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또 K리그 3년 연속 우승의 전설을 남긴다. 

이때도 초호화 멤버를 자랑했는데 우승 청부사 샤샤를 비롯해 김대의, 김상식, 김영철, 김도훈, 윤정환, 이싸빅, 이성남 등이다. 실제로 K리그의 골수팬들 사이에선 2003년의 성남 일화 천마를 K리그 역사상 최강의 스쿼드로 거론하기도 한다.

2004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으나 성남과 재계약하지 못하며 K리그를 떠났다. 2005년 호주로 떠나 퀸즐랜드 로어 FC에 입단해 1경기에 출장한 후, 발목 부상을 입고 그 해 9월에 완전히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K리그 통산 401경기 99득점 68도움 2실점을 기록했다. 또 최초 4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현역 시절 신 감독의 국가대표로서의 경력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청소년 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을 거친 엘리트 선수였지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선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1993년과 1997년까지 A매치서 23경기 3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K리그서 신 감독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상당히 아쉬운 기록이다. 1996년 AFC 아시안컵 8강 이란전서 2:6 참패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는 국가대표팀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는 일이 없었다. 이 대회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후 월드컵 명단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휘청거리는 태극호…숙제 산적 
급기야 히딩크 부임설까지 부상

차범근 감독 체제에선 1997년 상반기까지는 뽑혔으나 최종예선 때부터는 제외됐다. 이후 허정무 감독과 거스 히딩크 감독 때에도 소속팀과 함께 엄청난 활약을 보였는데도 발탁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국가대표 축구의 조직력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감독들은 신 감독 대신 다른 젊은 선수들을 발탁해 세대교체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거나 대표팀의 리더를 맡을 고참 선수들로는 황선홍과 홍명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월드컵 출전 경력만 있었으면 K리그서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될 수 있기에 아쉬운 부분이다.

신 감독은 은퇴 직후인 2005년 호주로 넘어가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그가 첫 지휘봉을 잡은 건 2008년이었다. 김학범 감독의 후임으로 성남 일화 감독 대행을 맡아 첫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는 특유의 ‘형님 리더십’을 발휘해 K리그와 FA컵,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지도력은 대표팀서 더욱 빛났다. 신 감독은 각급 대표팀이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지휘봉을 잡아 ‘구원투수’로서 맹활약했다. 

그는 축구대표팀 코치 재직 시절이던 2015년, 리우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던 고 이광종 감독이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자 중책을 이어받았다. 초반에는 우려를 표했지만 그는 와일드카드 손흥민(토트넘) 등 23세 이하 대표팀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11월 두 번째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다. 20세 이하(U-20) 대표팀이 아시아 예선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다시 한 번 태극마크를 달고 팀을 변화시켰다. 이승우, 백승호(이상 FC바르셀로나) 등 개성 넘치는 선수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태용식 패스 축구로 강호들을 잇따라 격파했다.

남은 9개월
처음부터 시작

U-20 월드컵 본선 무대에선 조별리그서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파란을 일으키며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젊은 선수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권위적인 모습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도모한 신 감독 특유의 리더십이 빛났다는 평가다. 축구협회 기술위원회는 신 감독의 용병술과 형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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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판 흔들 최대 변수 다섯

대선판 흔들 최대 변수 다섯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 구도는 여전히 ‘1강’ 체제로 흘러가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시작으로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쳐 조기 대선에 이르는 과정서 지지층이 결집한 결과로 보인다. 그의 대형 ‘리스크’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당선’이 상수가 된 걸까? 12일, 본격적인 대선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됐다. 이날부터 대선후보들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탄핵안 인용으로 인한 대통령 궐위로 치러지는 보궐선거라 대선후보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다. 짧은 시간, 최고의 선택을 위한 빠른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20일 남은 결정의 순간 여론조사로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독주 중이다. 어떤 후보와 맞붙어도 지지율 격차가 10~15%p가량 나고 있다. 당락을 가른다는 중도층서도 이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과반인 상태다. 현재 분위기로는 대권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후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모래주머니’처럼 발목에 매달려 있던 사법 리스크도 일단 털어냈다. 서울고등법원이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 기일을 대선 이후로 바꾸면서다. 지난 1일 대법원이 항소심서 무죄를 준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내면서 이 후보는 위기를 맞았다. 대법원은 판결 과정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1심의 취지를 받아들였다. 파기환송심이 진행됐다면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형이 나올 가능성이 컸던 것. 파기환송심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량을 받고 재상고심서 확정되면 이 후보는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다. 이 후보는 물론 민주당 입장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 셈이었다. 실제 민주당은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 이후 다양한 방법으로 사법부를 압박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탄핵 예고, 대법관 수를 늘리는 내용의 법안 발의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진행 중인 재판을 중지할 수 있는 내용의 법안과 선거법 위반 사건의 핵심인 ‘허위 사실 공표죄’의 일부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법안도 발의했다. 지난 7일 서울고법은 이 후보의 선거법 사건 파기환송심 기일을 다음 달 18일로 변경한다고 밝히면서 “대통령 후보인 피고인에게 균등한 선거운동 기회를 보장하고 재판의 공정성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배경을 밝혔다. 그러면서 “법원 안팎의 어떠한 영향이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적으로 공정하게 재판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원 기일 연기로 사법 리스크 해소 법원이 정치에 휘둘린다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법원의 결정으로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가 해소됐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변수로 여겨졌던 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 후보로선 안 그래도 독주 상황서 날개를 단 격이 됐다. 그러면서도 일각에서는 ‘정치는 생물’이라 추가 변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먼저 보수 결집 가능성이 꼽힌다. 국민의힘은 이번 대선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원죄’를 짊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통령이 또다시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배경엔 45년 만에 재현된 비상계엄 사태까지 있다. 헌재는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보수 진영의 결집력은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이 역대 선거서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 등이 대형 선거 때마다 보수 진영을 떠받쳤다. 지금보다 지역 갈등이 강했던 과거에는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과 비교해 표밭이 큰 편이었다. 진보 진영은 보수세가 강한 지역서 일정 정도의 표를 얻어야 보수 진영과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실제 이번 대선과 똑같은 이유로 치러진 19대 대선 결과를 보면 대통령은 진보 진영서 나왔지만 전체 표수는 보수 진영이 더 얻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진행된 19대 대선은 투표 전부터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싱거운 싸움이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자유한국당 후보였던 홍준표 전 대구시장 간의 표차는 무려 557만표였다. 17대 대선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전신) 정동영 후보 간의 표차인 531만표를 넘어서는 수치였다. 하지만 당시 출마한 후보들의 득표율을 뜯어보면 양 진영의 표 크기가 대략 보인다. 풀린 족쇄 훨훨 날까 19대 대선서 문 전 대통령에 이어 홍 전 시장,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현 국민의힘 의원),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전 국민의힘 의원), 정의당 심상정 후보(전 정의당 의원) 순으로 표를 얻었다. 총 15명의 후보가 출마한 선거서 5% 이상 득표한 후보들이다. 문 전 대통령과 심 후보는 진보 후보로, 홍 전 시장과 안 후보, 유 후보는 보수 후보로 크게 묶인다. 단순 계산으로 보면 범진보 후보는 1544만1258표, 범보수 후보는 1705만9962표를 얻었다. 150만표가량 보수 진영이 많이 득표했다. 제3당 후보의 사퇴로 1 대 1 구도로 치러진 18대 대선서도 박 전 대통령이 1577만3128표(51.2%), 문 전 대통령이 1469만2632표(48%)를 얻었다. 108만표 차이다. 당시 투표율은 75.8%였다. 17대 대선보다 12%p 오른 수치로 양 진영에서는 ‘총력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표심 잡기’에 혈안이 된 상태였다. 양 진영 모두 투표장에 나올 만큼 나왔다는 뜻이다. 이번 선거는 ‘이재명이냐, 이재명이 아니냐’는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의힘은 ‘반명연대’의 선봉에 서서 이 후보 외에 모든 후보를 끌어안는 방식으로 선거전략을 짜는 모양새다. 이 후보에 맞설 단일 후보를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 후보가 출마했던 20대 대선 때는 역으로 진보 진영의 표가 더 많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1639만4815표(48.6%)를, 이 후보는 1614만7738표(47.8%)를 득표하면서 24만표(0.7%p) 차이로 당락이 갈렸다. 당시 제3당 후보로 출마했던 정의당 심 후보가 얻은 표는 80만3358표였다. 단일화가 이뤄졌다면 대통령이 바뀔 수도 있었던 수치다. 생각보다 복잡하다 결국 표심이 나뉘는 걸 얼마나 저지하느냐에 따라 대통령 당락이 바뀌기도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단일화 이슈가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선거 때마다 나오는 이유다. 이번 대선은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서 1명의 후보만 나와 1대 1 구도로 치러질 가능성,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와 함께 3자 구도로 치러질 가능성 등이 제기되고 있다. 이준석 후보가 완주하면 지난 대선 때와 달리 보수표가 갈릴 가능성이 나온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는 지난 5~7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국지표조사(NBS) 결과를 지난 8일 발표했다. 이날 조사에서 이준석 후보는 가상 대결서 6~7% 지지율을 보였다. 민주당 이 후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의 3자 대결에서는 6%, 국민의힘 후보를 한덕수 전 국무총리로 바꿨을 때는 7%였다. 조사는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전화 면접으로 이뤄졌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 ±3.1%포인트다. 응답률은 22.1%였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국민의힘에서는 이준석 후보와의 단일화도 필요하다는 뜻을 여러 차례 드러냈지만 이 후보는 뜨뜻미지근한 상태다. 정치공학적 단일화는 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투표 용지에 후보 이름이 찍히는 오는 25일까지 국민의힘 후보와 이준석 후보 간의 단일화 여부가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20~30대 청년층의 표심도 변수로 떠오를 수 있다. 20대와 30대는 지난 대선서 성별에 따라 투표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세대다. 남성은 윤 전 대통령을, 여성은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다. 20대에서는 그 격차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여성의 과반이 이 후보를, 남성의 과반은 윤 전 대통령에 표를 던졌다. 보수 결집하고 단일후보 누가 더 지지층 끌어오나 30대 역시 남녀 간 차이를 보였지만 그 격차는 20대보다 작았다. 반면 40~50대는 이재명 후보, 60대 이상은 윤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이번 대선도 비슷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윤 전 대통령 탄핵 관련 집회서 20~30대 여성은 탄핵 찬성 쪽에, 남성은 반대 쪽에 선 사례가 많았다. 실제 지난 대선, 탄핵 반대 집회 등을 보고 20~30대 남성의 ‘보수화’를 조명하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민주화운동 시절 그 선봉에 대학생이 섰던 때와 비교하면 한 세대 만에 젊은 남성이 보수 진영을 지지하는 쪽으로 이른바 ‘전향’이 이뤄진 부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투표율도 관건이 될 전망이다. 앞선 세 번의 대선은 투표율이 모두 75% 이상으로 나타났다. 유권자 4명 가운데 3명은 투표를 했다는 뜻이다.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 진영이 유리하고 낮으면 보수 진영이 유리하다는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보수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높은 중년, 노년층은 적극적으로 투표하는 반면 청년, 장년층은 상대적으로 투표 의지가 약하다는 과거 사례서 비롯됐다. 하지만 투표율이 75% 이상 나온 세 번의 대선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은 한 번씩 대통령을 배출했다. 단순히 전체 투표율이 높은 걸로 당락을 가를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세대별, 성별로 투표 양상이 달라지고 있는 만큼 세부 투표율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제기된다. 진보 진영 입장에서는 ‘다 된 밥’이라는 인식을 깨야 하고, 보수 진영은 ‘어차피 진 싸움’이라는 생각을 깨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결국 투표 포기층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누가 더 많이 투표장으로 지지 세력을 끌고 올 수 있느냐에 대선 결과가 달린 셈이다. 삐끗하면 골로 간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말실수’를 하나의 변수로 꼽았다. 선거 기간이 짧은 만큼 후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도층의 표심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역대 선거서 후보의 말실수가 낙선으로 이어진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대선 토론회 등 주목도가 높은 자리에서의 말실수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