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기 잡은 배명고 김경섭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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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17.07.28 18:57:20
  • 호수 12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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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을 믿었다. 그리고 그들이 해냈다”

지난 2015년11월 배명고 야구부 감독으로 갓 부임했던 김경섭 감독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진로에 대한 결정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배명고 야구부는 20년이 넘도록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배명고 출신의 전설적인 스타였던 김동주(전 두산 베어스)가 활약하던 1992년 3관왕(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전국체전)을 차지한 이후 전국대회 우승과는 점차 멀어져만 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전임 윤여국 감독의 뒤를 이어 부임한 게 된 김 감독은 직전까지 배명중 야구부의 감독을 20년 이상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며 수많은 우승과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했던 지도자로서는 매우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의 배명고 야구부 감독으로의 취임이 본인의 의지보다는 학교 당국과 재단, 그리고 동문들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로 인한 본인의 고뇌는 더욱 깊었을 것이다.

그의 선택은 ‘Go’였다. 부임 직후 코칭스탭진을 새로 구축하고, 그들에 대한 보직 분담과 보고체계를 확립했다. 선수들에 대한 새로운 훈련프로그램과 개별적인 면담을 진행하며 내부의 전력도 점검했다. 

외적으로는 학교 당국과 재단, 동문들을 접촉하며 훈련장내 시설 확충과 야구부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의 노력은 전통에 빛나는 배명고 야구부의 저력을 살려냈다. 감독 부임 첫 번째 시즌이었던 2016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의 성적을 올렸고, 두 번째 시즌인 올해 2017년 제72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으로 결실을 거뒀다.
 

청룡기 우승 직후 다시 찾아간 김 감독은 한결 확신에 가득한 모습이었다. 청룡기 제패에 대한 모든 공을 제자들에게 돌리며 그들 모두를 자랑스러워했다. 때마침 배명고 출신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한국프로야구 원년 MVP였던 박철순(전 OB 베어스)이 모교를 방문해 후배들을 격려 하고 있었다.

-청룡기 우승을 축하한다. 소감은?

▲이번 우승은 전적으로 모든 선수들의 공이다. 경기에 투입됐건 투입이 안됐건, 그리고 투입이 됐어도 아주 작은 역할만 수행한 채 경기장을 나왔건 간에 모든 선수들이 자신이 해야 할 역할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수행해줬다. 선수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독직을 수행하는 데 벅찬 보람을 느낀다. (배명)중학교 감독일 때도 우승을 많이 해봤는데 고등학교 감독으로 우승을 해보니 또 다른 느낌과 보람을 가지게 된다.

-배명고 집중력이 이전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 전국대회의 결승전서 서울고라는 강팀을 상대로 1점 차의 승부를 겨루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준비 과정서부터 우리의 선수들을 믿었다. 우승하자는 열망 아래 팀워크로 뭉쳤고, 누구 하나 긴장을 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모두가 전부 희생을 할 각오였고 팀 동료들을 믿고 있었다.

-우승까지 비하인드가 있다면?


▲예를 들면 박종현 같은 투수다. 그는 경기 전 나를 찾아와 자기를 투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의견을 밝히더라. 3학년 선수가 자신의 진로와 대학 진학을 위해 경기에 나가서 성적을 쌓고 싶은 마음이 컸었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시합서 감독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한 선수들의 마음가짐에 나 역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박종현은 결승전서 서울고 핵심 전력이었던 강백호를 상대로 원포인트 맞춤형 투수로 나가 커브 4개를 던져 그를 잠재우는 공을 세웠다. 마음가짐이 훌륭한 선수다.

김성주 같은 선수 역시 마찬가지다. 맞춤형의 원포인트 투수로 나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줬다. 원래 야수 출신인데 투수 역할도 충실히 잘 해주고 있다. 성민종 또한 타격에 재질이 많은 선수인데 투수로도 9개월 정도 훈련하고 마운드에 올라간다. 대타로 나가면 꼭 안타를 쳐주는 훌륭한 선수다.

-결승전 서울고를 상대로 대비했던 전략은?

▲사실 내심으로는 덕수고가 결승전에 올라오기를 바랐었다. 작년 청룡기대회서 우리가 4강전에 만나 무릎을 꿇었었고, 다시 한 번 승부해 설욕하고 싶었다. 그런데 서울고가 올라오더라. 현재 서울고서 투타의 핵을 이루고 있는 선수는 투·포수로 뛰고 있는 강백호고, 우리 전략의 핵심은 그러한 강백호를 투타서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타격 시 강백호의 약점은 느린 공을 공략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투수로는 선발이 아닌 구원이나 마무리 투수로 올라올 것이라는 예측으로 그가 마운드에 오르기 전에 선취점이나 점수를 미리 뽑아내는 전략으로 경기에 들어갔는데, 고맙게도 그러한 시프트와 전략에 따라 투입됐던 선수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줬다. 

사실 그 동안의 감독 경험에 비춰볼 때 상대팀이 우리를 쉽게 볼수록 오히려 우리는 대처하기가 편하고 여러 가지 전략과 전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서울고와의 결승전에선 아주 단순하게 서울고의 핵심이었던 강백호를 대상으로 준비를 했었다.

-에이스 곽빈이 마운드에 올라 폭투로 1점을 주며 승부를 긴박하게 만들었다. 이때 무엇을 지시했나?

▲당시 서울고 주자가 루상에 있던 상황서 그냥 1점을 줄 생각으로 편하게 투구하라고 지시했다. 우리의 투수들은 모두 정신력이 최고 수준인 선수들이고 나 역시 그들을 믿었을 뿐이다. 더구나 곽빈은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에 1차로 지명돼 이미 자신의 진로가 결정이 난 상황이었는데도 조금의 나태함이나 게으름 없이 대회 기간 내내 팀을 위한 희생과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곽빈이 무너지면 그 후 어떤 카드가 있었나?

▲만약에 곽빈이 무너지면 이후에는 준결승전서 안산공고를 상대로 위력을 보여 주었던 이재승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곽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재승 또한 150km/h의 강속구를 던지는 또 하나의 카드였다.

-사실 곽빈과 이재승은 올 시즌 투수로써 혜성같이 등장한 선수들이다. 그동안 왜 주목받지 못했나?


▲작년 시즌에 곽빈은 투수로는 단 한 경기에만 투입됐었다. 타격에도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선수이기에 1루수를 맡으며 그의 어깨를 보호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었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작년에도 투수로 기용했으면 많은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올해와 같은 활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내 욕심을 누린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재승은 훌륭한 신체조건을 갖춘 곽빈 못지 않은 강속구 투수인데, 지난 두 시즌 동안 부상에 따른 재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완쾌해 올 시즌부터 투수로 투입했는데, 오랜 공백기 때문인지 시즌 초반부터 이번 대회 초반기까지 경기감각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준결승 상대인 안산공고와의 시합 때부터 그의 힘을 동반한 강속구가 제구력이 따라주며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줄 선수들이다.

-감독으로 부임 이후 배명고의 팀컬러가 많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선수들, 특히 3학년 선수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그들의 진로와 대부분 대학 진학과 연관된 본인 자신들의 개인성적이다. 감독의 역할 중 하나는 그러한 부담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해주며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서도 감독은 또한 이들을 기용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우리 팀에는 현재 12명의 고3 수험생인 투수들이 있고, 올 시즌 전반기 주말리그부터 지금까지 이들을 어떻게 기용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개인성적을 올리게 해줄 수 있나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또한 팀의 성적을 높이는 것에도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평소 선수들과 어떠한 소통을 하나?

▲나 역시 야구를 해왔던 내 인생에 비추어 야구 후배들인 선수들에게 그들의 인생에 관한 충고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인생서 야구가 잘 안 풀릴 때도 있지만, 항상 또 다른 터닝포인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야구로써 성공을 못할 수도 있지만 항상 또 다른 기회가 인생에서는 찾아온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야구뿐만 아니라 많은 공부를 미리 해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야구 이외에 직업적인 선택의 폭도 매우 넓다는 것을 항상 얘기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진로를 잘 선택해 인생이 잘 풀릴 수 있도록 감독인 나 역시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것, 그러니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엇이든 미리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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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