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1주년 특집6> ‘창업정신’ 지키는 기업들

불황타개, 초심이 답이다

위기입니다. 대한민국 경제가 벼랑 끝에 있습니다.
서민들의 곡소리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자연스레 시선은 재계로 돌아갑니다.
나라의 경제에서 기업을 빼곤 얘기가 안 됩니다.
이들 기업에 우리 주머니가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일요시사>는 창간21주년을 맞아 경제 선봉에 선 주요 기업들의 청사진을 공개합니다.
초심, 창업정신서 길을 찾아보고 희망을 꺼내봤습니다. <편집자주>

 

<삼성> ‘사람’에 아낌없이 투자

삼성은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대표 기업이다. 삼성의 매출 규모가 국내 총생산의 20% 수준이니 무리한 평가는 아니다. 삼성은 끊임없는 혁신으로 대한민국 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밑바탕에 호암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있었다. 

이 창업주는 1938년 29세의 나이에 삼성상회를 세워 그룹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창업주의 경영이념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사람’이다. 이 창업주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인재 등용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그는 평소에도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재 중심의 경영철학

그는 “일생의 80%를 인재 육성에 힘썼다”고 말할 만큼 사람을 중시했다. ‘물건을 내줘도 사람은 내줄 수 없다’는 그의 어록에서 인재 중심의 경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결정적 장면은 후계 승계였다. 통상의 장자승계 원칙에서 벗어나 3남이었던 이건희 회장을 파격적으로 낙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경영철학은 옳았다. 이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지난 3월 기준 삼성그룹의 대표 계열사 삼성전자의 시총은 세계 16위를 기록하며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창업주의 인재를 중요시하는 사내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재라고 판단되는 인사의 파격 등용은 삼성에서 특별한 이슈가 아니다. 삼성이 여전히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다.
 

<현대차>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국내 수출 효자상품을 꼽으라면 자동차는 항상 거론된다. 업계 맏형 현대자동차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지난해에만 22조3000억원이 넘는 제품을 수출해 나라살림에 보탬이 됐다. 완성차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몇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랑스러운 우리 기업 가운데 하나다. 

현대차가 치열한 세계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창업 초기부터 내려오는 경영 철학 덕분이다. 창업주인 아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정 명예회장의 삶 자체가 ‘도전의 역사’였다. 1915년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도전’은 현재진행형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 명예회장은 끊임없이 도전했다. 정 명예회장은 막노동부터 쌀집 배달원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도전의 과정은 험난했다. 1941년 빚을 내 시작한 자동차수리 공장은 사업 시작 한달 만에 화재가 발생해 접었다. 

그나마 다시 빚을 내 차린 자동차수리 공장마저 일제강점기 ‘기업정리령’으로 일본에 빼앗겼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현대자동차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을 통해 현대그룹으로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다. 

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그의 아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계승했다. 정 명예회장 곁에서 도전의 가치를 배운 그이기에 현대차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SK> 끊임없이 혁신 또 혁신

SK에 흐르고 있는 경영 이념은 ‘혁신’다. SK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은 혁신적인 사업가였다. 최 회장은 1953년 SK의 기반이 되는 선경직물을 창립했다. 폐허의 직물공장이 혁신적인 기업가를 만나자 성장했다. 

최 회장은 ‘남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경쟁이 안 된다’며 혁신을 경영에 접목했다. 그는 자금 압박에도 품질 혁신과 신제품 개발에 공을 들였다. 제품제일주의자라는 평가는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아울러 최 회장은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 기업가였다. 그는 “자신이 기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공장과 재산은 내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의 것으론 경쟁이 안돼”

회사 운영에 있어서 나와 상대방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사업가로서의 열정을 보였다. 그의 나이 48세.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최 회장이 닦아 놓은 기반을 통해 SK는 재계 3위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그의 경영 이념은 2대 최종현 회장과 현 최태원 회장을 거치면서 더 세련되고 공고해졌다. 최태원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새해 우리는 더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혁신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심을 유지하는 SK의 성장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LG> 소비자 마음을 움직이다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은 LG는 우호적이지 않은 경영 환경 속에서도 지난해 150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70년이란 긴 시간동안 성장한 데는 소비자와의 신뢰가 있었다.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이 소비자에게 통한 것이다.

 구 회장의 부친은 그에게 “남과 화복하게 지내 신용을 얻는 사람이 돼라”고 조언했다. 이는 구 회장의 경영이념이 됐다. ‘럭키치약’ 일화는 구 회장의 철학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구 회장은 광복 후 일본이 버린 화학공장을 인수해 LG의 모태가 되는 ‘락희화학공업사’를 1947년 세웠다.

신뢰·신용이 돈 버는 길

구 회장은 자사의 제품 ‘럭키치약’이 국내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도 “이윤이 많지 않아도 좋다.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면 럭키의 신용이 소비자에게 남고, 그것이 진실로 돈을 버는 길이 될 것”이라며 무리한 가격인상을 자제했다. 구 회장의 경영철학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LG는 이후 소비자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 재계 상위 그룹이 됐다. LG의 신뢰 경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LG를 이끌고 있는 구본무 회장은 창립 70주년 기념 최고경영진과의 자리에서 “창업 정신을 고취해 더욱 더 신뢰와 존경을 받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존경은 신뢰서 나온다. 초심을 이어간다면 불가능한 꿈이 아니기에 기대가 모아진다.

 

<롯데> 화려함 버리고 실리를


롯데는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로 국민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 덕분에 5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만에 재계 5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거화취실’(화려함 대신 실리를 취한다) 경영전략이 먹혀든 셈이다.

 192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신 총괄회장은 배움을 갈망하던 1942년 관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해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해 한국의 큰 기업가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00년 향해 거침없이 항해

전시였던 당시 일본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껌이 인기를 끌었다. 신 총괄회장은 이를 통해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 규모의 롯데를 1948년 설립했다. 1967년에는 롯데제과를 창립하며 모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창립 후 50년동안 롯데는 끊임없이 고객의 니즈를 찾아다녔다. 유통, 건설, 화학, 금융, 호텔 등 많은 분야에 걸쳐 고객의 필요한 아이템을 공략했고 준수한 성공을 거뒀다. 그 배경에는 화려함보다는 실리를 취하는 경영전략이 있었다. 

현재는 그의 아들 신동빈 회장이 그의 경영이념을 발전시켜 롯데그룹을 이끌고 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롯데는 고객과 함께 일상의 가치를 창조하는 롯데로 거듭날 것을 천명했다. 100년 기업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고 있는 롯데의 행보에 눈길이 쏠린다.

 

<포스코> 대충 대충은 없다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회사다. 세계무대서 포스코의 제품은 고급 이미지가 있다. 창립 초기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홀대 당하던 당시와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올해로 49주년을 맞은 포스코는 국내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뚝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68년 창립 당시 포항제철소(현 포스코)에는 자본, 기술, 경험, 자원이 없는 상황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완벽주의로 포스코를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특히 박 명예회장은 대충대충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완벽주의로 한국산업 이바지

 “나는 ‘대충 일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는 포스코 정신을 만들었다. 이후 종업원들의 일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고 황홀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부실 공사현장을 폭파시킨 이야기는 그의 완벽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박 명예회장은 1977년 제3기 기초 공사 현장을 시찰하던 도중 부실 공사의 흔적을 발견했다. 확인 결과 시공사와 감독책임자가 공모해 부실공사를 진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박 명예회장은 시공사와 감독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그들 눈앞에서 부실한 기초 공사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다. 

이런 뚝심과 완벽주의 정신은 오늘의 포스코를 있게 만들었다. 포스코는 그의 공로를 기려 포스코청암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의 정신을 잊지 않는 한 포스코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한화> 국민을 먼저 생각

한화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방위산업 기업이다. 한화그룹 창업주 고 김종희 회장이 1952년 한국화약을 설립해 한화의 기틀을 닦았다. 사업이 한국의 국방과 직결되는 기업이니 만큼 김 회장은 국민과 국가에 대한 마음이 컸다.

 이리(현 익산)서 발생한 사건은 그가 국민을 생각하는 진정성을 보여준다. 1977년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호송원의 부주의로 익산에서 폭발했다. 당시 사고로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함께 성장하는 진정성 유지

김 회장은 책임 유무를 떠나 진정으로 국민들에 대한 보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 90억원을 헌납하기로 한 것. 당황한 것은 정부 관료들이었다. 정부 관료들은 한국 방위산업이 흔들리까 우려해 김 회장을 설득했다. 

오랜 설득 끝에 김 회장은 90억원을 30억원씩 3년에 걸쳐 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도 마음의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는 과로와 병환으로 1981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국민을 생각하는 창업정신은 한화에 남아 여전히 대한민국의 방위산업을 책임지고 있다.
 

<한진> 나눔을 바탕으로 동행

한진은 1945년 인천서 한진상사로 출발했다. 운수업을 중심으로 재계 10위권까지 올랐다. 한진의 창업주 고 조중훈 회장은 인간존중과 나눔경영을 강조했다. 이 같은 경영철학은 그의 삶에서 나왔다. 

조 회장은 6·25전쟁 직후 도로서 차가 고장나 애를 먹는 외국인 여성을 발견했다. 그는 측은지심이 들었고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들여 차를 수리해줬다. 여성이 그에게 사례비를 건네려고 했으나 그는 “이런 친절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흔한 일”이라며 거절했다. 

인간존중·인간중심의 경영

하지만 그 여성이 주소라도 알려달라고 사정했다. 주소를 알려줬더니 그 여성과 남편이 찾아와 답례를 하고 싶다고 또다시 간청했다. 알고보니 여성의 남편은 미8군 사령관이었다. 조 회장은 답례를 원한다면 미8군의 폐차를 인수할 권리를 줄 수 있느냐고 그에게 부탁했다. 여성의 남편에게는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그는 조 회장의 부탁을 들어줬고 그것이 한진의 시작이었다. 이 같은 배경서 한진은 인간존중과 나눔을 바탕으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한진은 자산 37조(2014년 기준), 매출액 23조의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선대의 가르침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두산> ‘최장수’ 비결은 진화

지난해 창립 120주년을 맞은 두산은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한국 기업의 평균수명이 30년이 채 안 되는 환경에서 120년 넘게 경영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 비결 자체가 재계의 관심이다. 

두산은 고 박승직 창업주가 1896년 서울 종로4가에 설립한 ‘박승직 상점’을 모태로 성장했다. 그는 노력정신을 강조했다. 박 창업주는 노력하면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뀐다고 믿었다. 노력은 혁신으로 이어졌다. 두산은 이 정신을 120년 동안 잊지 않았다.

꾸준히 미래 성장동력 발굴

화장품 박가분의 인기로 사업기반을 닦은 두산은 맥주사업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991년 페놀오염 사태가 터지면서 변화가 필요했다. 소비재 중심 기업에서 중후장대 사업 중심 기업으로 변화를 꾀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를 시작으로 중공업 중심 그룹으로 변신했다. 현재까지도 이 같은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현 두산을 이끌고 있는 박정원 회장은 미래 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가스터빈 등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낙점해 진행하고 있는 것. 

국내 최고(最古)기업 두산. 더 멀리 가기 위해서 두산은 박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잊지 않고 있다.

 

<부영> 내실 우선 ‘세발자전거론’

1983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부영은 30년 남짓 시간이 흘러 재계 순위 16위, 총자산 20조원 기업으로 팽창했다.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앞세워 대형 부동산 자산을 사들이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기 불황에 대기업들이 줄줄이 투자를 줄이고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부동산 자산을 매각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부영 고공행진의 밑바탕에는 창업주인 이중근 회장의 경영철학인 ‘세발자전거’론이 녹아 있다. 세발자전거는 두발자전거보다 느리고 투박하지만 잘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 위험에 대처했을 때 손쉽게 정치하기도 용이하다.

안정적으로 한걸음씩 전진

세발자전거론은 이 회장이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이 회장은 기업의 목표와 책무는 성장보다는 존재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업은 직원들의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조심스러운 경영을 통해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해왔다. 

세발자전거론서 알 수 있듯이 부영은 급속한 성장보다는 안정적이고 내실 있는 경영이야말로 실패 없는 기업을 만드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1등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치우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한다는 생각 즉, 최고보다는 최선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발자전거는 부영의 사업영역인 부동산, 금융, 건설의 세 축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림> 기본과 원칙의 ‘한숲정신’

1939년 인천 부평에서 부림상회로 출발한 대림은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사촌형 이석구 전 대림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 등 3명의 손에서 탄생했다. 창업 당시 3만원의 자본금으로 7명의 직원과 함께 출발한 부림상회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복구사업, 1960∼70년대 경제개발계획, 1970∼80년대 중동신화와 중화학공업 개발사업을 거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설사로 우뚝 섰다. 

대림의 경영철학은 ‘한숲’ 정신이다. 사명(대림·大林)의 순 우리말인 한숲은 ‘쾌적하고 풍요로운 삶을 창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격변하는 경영환경에 적응

1947년 부림상회에서 ‘대림’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부터 창업정신의 발로였으며 격변하는 경영환경에 적응하며 규모를 키워오는 동안 한숲정신은 대림의 근간이 됐다. 대림은 1962년 건설업체 시공능력평가제도가 생긴 이래 55년 연속 10대 건설사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재계는 이런 대림에 대해 ‘한숲정신’을 바탕으로 한 내실 경영이라고 평가한다. 한숲정신에 입각해 대림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불확실한 투자에 매진하기보다 기본과 원칙에 입각한 위기관리와 환경분석을 통해 수많은 국내외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국내 최초 해외 건설 외화 획득, 업계 최초 기술연구소 설립, 국내 최초 아파트 브랜드 론칭 등 대한민국 건설 혁신의 역사를 이뤘다.

 

<금호아시아나> 역경에 굴하지 않는다

금호아시아나의 역사는 고 박인천 창업주가 1946년 광주택시를 설립, 운송업에 뛰어들면서 시작됐다. 박 창업주는 4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운송업에 도전장을 던지면서 제 2인생을 설계했다.

박 창업주의 호에서 사명을 딴 금호아시아나는 광복 후의 피폐한 경제상황과 6·25 전쟁 등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육상 및 항공운송·건설·레저 등을 아우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박 창업주는 정도경영을 바탕으로 종업원과 이웃을 배려하는 인간존중 경영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 속에서도 끝없는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집념과 불굴의 기업가정신을 대표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가치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기업

금호아시아나는 박 창업주의 뜻을 받들어 ‘기업을 통한 국가공헌 및 사회기여’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금호아시아나 이해관계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여기서 이해관계자는 직원, 주주, 협력사, 사회를 지칭하며 이를 통해 업계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가 말하는 아름다운 기업이란 지탄을 받지 않고 약속한 바를 지키며 건실하고 신뢰받는 기업이다. 사회적 책임과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공헌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이 같은 기조를 바탕으로 금호아시아나는 창립 이래 수많은 시련에 봉착하면서도 집념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난관을 이겨냈다. 

 

<효성> 기술이 곧 경쟁력

효성은 1962년 만들어진 효성물산이 시초다. 조홍제 창업주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함께 일제 강점기 삼성물산에 공동 투자 후 삼성물산 부사장, 제일모직 부사장, 제일제당 사장을 역임했으나 삼성을 떠나 효성물산을 독자경영하며 독립했다. 

효성의 경영철학 밑바탕에는 ‘기술’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 조 창업주는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는 지론 하에 당시 울산에 최신시설의 공장을 준공, 세계 정상급 나일론 원사 생산기지를 건설했다. 1970년에는 한일나이론을 인수합병 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섬업체라는 위상을 확보했다.

“선도해야 나아간다” 강조

창업주의 뒤를 이은 조석래 전 회장은 재계 오너 가운데서 손꼽히는 기술 경영인이었다. 조 전 회장은 ‘기술이 곧 경쟁력’이라는 신념 아래 수많은 일류 기술을 개발해 효성이 세계선도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효성이 100년 기업으로 나아가려면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이 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지론을 펼쳐왔다. 

지난해 말 조석래 전 회장의 뒤를 이어 받은 조현준 회장 역시 기술을 최우선하던 선대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취임사에서 “선대부터 이어진 기술 중시 경영철학과 기술 경쟁력이 효성 임직원들을 통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코오롱> 모두 잘사는 ‘상지상론’

“나는 동포에게 헐하고 질긴 의복을 입히고, 부녀자를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생애로 전환시키려 했다” 섬유산업의 선구자였던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은 이 신념을 가지고 코오롱의 기반을 닦았다. 

1954년 아들 우정 이동찬을 통해 개명상사를 설립해 나일론을 유통하면서 코오롱의 역사가 시작됐다. 사업이 커지자 이 회장은 직접 공장을 세워 나일론사를 생산했다.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고 그룹은 60년을 쉼 없이 달려오며 섬유산업을 이끌었다. 이 회장은 상대방과 내가 모두 웃는 경영을 지향했다.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이 회장은 ‘상지상’론을 펼쳤다. 국가와 개인이 모두 이익이 되는 경영을 상지상으로 분류했다. 국가와 개인이 모두 피해를 입는 경영은 하지하로 판단했다. 그러면서 국가와 개인에 모두 이익이 되는 경영을 펼칠 것을 임직원들에게 강조했다. 

그의 경영 철학은 단순히 한 기업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조성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코오롱은 현재 고객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경영 이념아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패션, 건설, 유통, 환경, 자동차 부품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 회장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SPC> 정도경영과 품질경영

SPC는 1945년 상미당으로 시작해 제빵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SPC는 정도경영을 최고의 경영원칙으로 삼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창업주 고 허창성 회장의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1963년 삼립제과 공장서 허 회장은 새로 출시할 빵의 원가를 놓고 직원들 간 격론이 벌어지자 원가가 오르더라도 품질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허 회장은 원가를 높여 품질이 좋아지면 소비자의 만족도가 올라가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믿었다.

정직·혁신·협업이 핵심 가치

허 회장의 판단은 옳았다. 허 회장이 내놓은 빵은 고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허 회장의 경영철학은 SPC를 제빵업계 1위 그룹으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차남인 허영인 회장도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정도 경영의 핵심 가치는 정직, 혁신, 협업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변화를 추구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면 근본적으로 고객과 회사가 동반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SPC의 이 같은 경영철학 덕분에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난해 경쟁업체의 역성장에도 불구하고 나홀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SPC는 고객 만족 최우선이라는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한샘>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1970년 부엌가구 전문 회사로 출발한 한샘은 국내 홈인테리어부문 시장을 선도해나가고 있다. 한샘의 저력은 창업주 조창걸 명예회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부엌이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부엌에 가구라는 개념을 추가하면서 시장을 선도했다. 

이후 한샘은 침실, 거실, 욕실 등 주택의 각 공간에 가구와 기기, 소품, 페브릭 등을 제공하는 토탈 홈 인테리어 기업으로 거듭났다. 현대인에게 집은 재충전의 공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말이다. 고객의 반응이 좋았다. 

현재 한샘은 부엌가구는 물론 종합 가구 인테리어 분야에서 1위 기업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부엌가구는 이미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믿음이 바탕…합리성 중시

조 명예회장은 합리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이라는 것이 재계의 평이다. 한샘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전문경영인 경영을 고수하고 있다. 1994년부터 조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최양하 회장이 한샘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는 평가다. 최 회장 체제에서 한샘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2013년 기준 1조를 간신히 넘기던 매출은 현재 2조에 육박하고 있다. 조 명예회장이 전문경영인을 믿고 신뢰한 결과라는 것이 재계의 평가. 

합리성을 중시하는 한샘의 기업문화가 있는 한 향후 미래가 밝다.

 

<bbq> 치킨으로 한식 세계화

치킨은 한류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1995년 설립된 제너시스bbq(이하 bbq)는 국내 치킨업계 1위를 고수하며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bbq는 창업주 윤홍근 회장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윤 회장은 기업가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고,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상생의 경영을 바탕으로 bbq는 성장했다. 그 결과 회사 설립 1년 만에 100호점, 2년만에 500호점, 4년만에 1000호점을 돌파했다.

가맹점주와 쌍방 무한신뢰

10년 이상 계약을 유지하는 가맹점주들도 많다. 가맹점주들과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울러 위기 앞에서 과감한 판단을 통해 시장을 선점했다. 그는 “위기라는 단어에 위험과 기회가 존재한다”며 “이 위험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희망을 붙잡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 그는 창업 얼마 뒤 찾아 온 IMF 당시 외연을 축소하는 업계 분위기와는 달리 공격적인 TV광고를 통해 외연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2020년까지 전세계 5만개의 매장을 내는 것을 목표로 올해도 발 빠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애경> 애인경천 정신으로

1954년 창립된 애경은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이 담긴 기업이다. 채몽인 창업주가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경영철학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1970년 채 창업주가 사망하자 기업은 일대 위기를 맞았다.

해결사로 나선 것은 장영신 회장이었다. 채 창업주의 아내인 그가 회사경영에 나섰다. 그는 채 창업주의 사망 전까지 경영인으로의 삶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정과 기업을 위해 장 회장이 나서야했다. 전업주부에서 기업가로 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내·결기로 힘든 시기 버텨

장 회장은 인내와 결기로 힘든 시기를 버텨냈다. 기업 내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회사 중역을 이끌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85년 영국의 세계 최대 브랜드 유니레버사와 유리한 조건에 합작사를 설립하자 주변의 평가가 바뀌었다. 결국 1987년 호평 속에서 애경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애경은 창립 후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채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후 장 회장이 회사를 안정화시킬 때까지 많은 위기를 극복해야했다. 그 사이 애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 애인경천 사상이다. 애경은 아 사명처럼 창업초기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향후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서희건설> 느림의 미학

서희건설은 1983년 영대운수로 사업을 시작했다. 1994년 서희건설로 상호명을 바꾸면서 건설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대표 브랜드는 아파트 브랜드인 스타힐즈다. 서희건설의 창업주는 포항제철(현 포스코) 출신의 이봉관 회장이다. 

이 회장은 느림의 미학을 아는 경영인이었다. 2000년 초 부동산 호황기 때 주택개발 사업으로 수혜를 볼 수 있었지만 이 회장은 안정을 택했다. 쉽게 돈을 버는 만큼 위험도 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영행보는 다른 경영인들과 구별된다. 

빠름을 중시하는 경영인들 사이에서 그는 느림을 추구했다. 덕분에 서희건설은 정도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안정적인 성장에 방점

느림의 미학이 결코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서희건설의 지난 1분기 매출은 243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 줄었지만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33.3% 늘어난 128억원을 기록했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준 것이 경영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실제 서희건설에는 정년퇴직이 없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정년퇴직이라는 제도로 나이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입장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스스로 체력이 다했다고 느껴질 때 물러나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직원들은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일한다고 믿는 것이다. 

남다른 경영철학으로 건설업계을 누비고 있는 서희건설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오뚜기> 선행이 먼저다

지난해 오뚜기의 창업주 함태호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함 명예회장이 떠난 뒤 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소비자들은 오뚜기를 갓뚜기(god+오뚜기)라고 부르며 홍보해주고 있다. 결정적인 장면은 오뚜기 주식의 상속이었다. 

함 명예회장이 현재 오뚜기를 이끌고 있는 함영준 회장에게 남긴 오뚜기 주식은 46만5543주(43.53%)로 당시 주가로 3500억원 규모였다. 예상되는 상속세는 1750억원 수준이었다. 함 회장은 이 돈을 군말 없이 냈다. 물론 상속을 받았으니 상속세를 내는 것이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러나 편법 절세가 난무하는 재계에서 묵묵히 상속세를 내는 오뚜기의 모습에서 소비자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 아름답다며 오뚜기의 홍보대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비자가 홍보대사 역할

오뚜기의 ‘선행 경영’은 연혁이 깊다. 1992년부터 시작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후원 사업을 통해 2016년까지 4242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선물했다. 1996년 설립한 오뚜기재단은 500여명에게 25억원의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함 명예회장은 별세하기 전 1000억원 규모의 주식을 기부하기도 했다. 회사의 이미지가 제고되니 기업의 매출도 올라가는 모양새다. 오뚜기는 지난해 2조원을 돌파했다. 충성 고객의 확보는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 

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는 자산으로 성장을 이어갈지 눈길이 쏠리는 대목이다.

 

<동원> 성실하면 성공한다

1969년 자본금 1000만원으로 창립한 동원은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창업이념으로 하고 있다. 경영이념은 고객에게 기쁨을 주는 경영, 사람을 존중하는 경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경영이다. 이는 20대 때부터 바다를 누벼온 김재철 동원 회장의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23세였던 1958년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의 실습항해사로 참치잡이를 시작해 27세부터 선장 자격으로 원양어선을 이끌고 인도양과 남태평양을 누볐다. 그는 사소한 실수도 놓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작은 실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원양어선에서의 경험이 그를 완벽주의자로 만들었다.

미래 비전을 그물질

김 회장은 ‘무대론’을 통해 자신의 경영방식을 강조했다. 그는 “회사를 무대에 비유해 경영자는 일종의 연출자로서 뛰어난 연출과 무대를 제공하고, 임직원과 구성원들은 일종의 배우 역할로 무대에서 성실한 연기를 통해 고객인 관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어 낸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김 회장을 두고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미래의 비전을 그물질하는 생명현장인 바다에서 시를 썼고 그 배위에서 어떤 연기자도 흉내 내지 못하는 드라마의 주연이 됐다”고 평가했다. 

완벽주의자의 무대론에 입각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이트진로> 거품 뺀 실용주의

“밖으로 드러내는 허세가 기업의 최대 악덕” 창업주 고 박경복 하이트진로 명예회장은 이 같은 경영철학으로 30여년간 하이트진로를 이끌었다. 주류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박 명예회장은 1967년 한국맥주판매 대표이사로 오르면서 맥주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968년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로 자리를 옮긴 후 한국 맥주산업을 정상으로 올려놨다. 박 명예회장은 2001년 뇌졸중이 악화되기 전까지 경영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의 경영지론은 ‘내실경영’이다. 

2000년 초반 회사를 찾은 외국 애널리스트들이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허름한 3층 콘크리트 슬래브 구조의 본사 건물을 보고 놀랐다는 얘기는 그의 소탈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허세가 기업의 최대 악덕”

박 명예회장은 현장에서 직접 직원을 격려하는 ‘스킨십 경영’을 중시했다. 현역 시절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생산 현장을 돌아보며 직접 제품 생산과 출고 현황을 챙기기도 했다. 1주일에 3일은 전북 전주, 강원 홍천, 경남 마산의 공장을 찾았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공장 관계자는 “박경복 명예회장은 공장 가동과 제품 생산 현황 등도 직접 파악하는 등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했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그의 소탈함과 열정이 하이트진로를 주류업계 1위로 올려놓은 것 아니겠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농심> 실패+정직은 자산

한국인의 사랑하는 라면 리스트에 농심 신라면은 가장 위에 있다. 이는 판매량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며 30년 넘게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라면의 ‘맛’은 한국인들만 인정한 것이 아니다. 

신라면은 지난해 식품업계 최초로 ‘1억불 수출’의 탑을 무역협회로부터 받았다. 수출의 탑은 연간 수출액을 집계해 해외시장 개척 및 수출증대에 기여한 업체에 주는 상이다. 농심은 신라면의 인기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창업주 신춘호 회장의 경영철학이 담겼다. 농심의 기업이념은 신 회장의 경영철학인 이농심행 무불성사다. 농심을 갖고 일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뜻이다. 

새로운 도전과 사명감으로

농심은 우직하고 성실하게 땀의 숭고함을 믿었다. 농부가 자연의 섭리 속에서 땅을 일구듯 새로운 도전과 사명감으로 오늘의 농심을 이뤘다. 이는 신 회장의 경영 방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 회장은 실패에 너그러웠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닌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지혜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1965년 창립이래 꾸준히 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평이다. 

50년 넘는 장수기업에 30년 넘는 메가히트 상품의 첫 번째 비결로 꼽히는 배경이다.

 

<동아제약> 국민건강에 이바지

“좋은 의약품을 생산해 국민건강에 이바지한다” 동아제약 창업주 고 강중희 회장의 창업이념이다. 동아제약은 1932년 창립돼 이 이념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헬스케어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동아제약의 대표 제품 박카스가 1961년 시장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창업이념이 제품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강 회장의 장남 강신호 명예회장이 창업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기업을 운영했다. 

창업이념 제품에 녹아

강 명예회장은 “내가 의사로서 제약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의사는 개인을 살릴 수 있지만 제약기업은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라며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독일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그가 현장에서 느낀 부분을 그대로 경영에 접목한 것이다. 

그는 이 지론하에 연구개발(R&D) 투자에 큰 힘을 쏟았다. 회사의 크고 작은 위기에도 R&D 부문의 비용은 아끼지 않았다. 창립 84년주년을 맞는 동아제약은 3세 경영으로 넘어갔다. 

현재 강신호 명예회장의 아들 강정석 회장이 아버지의 정신을 계승해 회사를 이끌고 있다. 동아제약의 ‘100년’ 기업 도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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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