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시행> 삭막한 대한민국 막전막후

끊긴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사라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김영란법’이 시행됐다.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벽이 세워질까 걱정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식당가는 한산했고 시범케이스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약속을 잡는 것조차 꺼렸다. 심지어 김영란법 적용 대상인 사람을 ‘왕따’시키는 풍조까지 생겨나는 추세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김영란법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란법’이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됐다. 김영란법은 2012년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추진했던 법안으로 정확한 명칭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공직자와 언론사·사립학교·사립유치원 임직원, 사학재단 이사진 등이 부정한 청탁을 받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상관없이 1회 100만원(연간 300만원)이 넘는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드디어 시작
앞서는 걱정

지난 2012년 제안된 이후 2013년 8월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2015년 1월8일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인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2015년 3월 3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해 3월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2015년 3월 김영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대한변협, 기자협회, 인터넷 언론사, 사립학교·사립유치원 임직원이 헌재에 네 건의 헌법소원을 냈으나 2016년 7월27일 헌법재판소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합헌으로 결정했다.

원래 제안된 법안에는 ‘이해충돌 방지’ 조항이 있었으나 이에 대해 여야가 막판까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의결 대상서 제외됐다. 법안이 시행되면서 공직자와 언론사 임직원, 사립학교와 유치원의 임직원, 사학재단 이사장과 이사는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상관없이 본인이나 배우자가 100만원을 넘는 금품 또는 향응을 받으면 무조건 형사 처벌을 받게 됐다.


다만 상조회, 동호인회, 동창회, 향우회, 친목회의 구성원 등 지속적 친분관계를 맺은 사람이 질병이나 재난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공직자에게 제공하는 금품이나 공직자 직무와 관련된 행사에서 주최자가 통상적인 범위서 참석자에게 제공하는 교통·숙박·음식 등은 수수 금지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한 공직자와 언론인, 사립학교 유치원 임직원, 사학재단 이사진 등이 직무 관련인으로부터 3만원 이상의 식사 대접을 받으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

현행 공무원 행동 강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3만원의 상한액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제정안은 또 공무원 등이 받을 수 있는 선물 가격을 5만원으로 정했다. 기존 공무원 행동 강령에는 선물 비용에 대한 상한액은 없었다. 선물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경조사 비용은 현행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렸다. 언론인이나 사립학교 교직원의 경우엔 민간인이라는 점을 고려, 직급별 구분 없이 시간당 100만원까지 사례금을 받을 수 있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식사와 선물 등 접대와 청탁이 모두 제재 대상이 됨에 따라 기존 접대 관행에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농수축산업계와 요식업계는 소비 위축에 따른 장기 경기 침체를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정청탁이나 직무 관련성 등에 대한 구체적 판례가 확립되기까지 2∼3년이 걸릴 것으로 보여 상당 기간 혼란이 예상된다.

인간관계 악화…살벌한 사회 우려
애매모호 조항 소송 잇따를 전망

김영란법이 본격 시행되자 직격탄을 맞은 고급 음식점들의 폐업과 업종 전환이 줄을 잇고 있다. 전국의 관공서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고급 음식점이 문을 닫거나 더 싼 메뉴 전문점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는 것.


한정식과 일식집 등 고급 음식점들은 김영란법 시행에 대비해 2만9900원짜리 ‘김영란 세트’를 준비해 뒀지만 손님들의 움츠러든 마음을 잡지는 못했다.

시행 첫날 한우고깃집, 한정식, 일식집 등 주요 고급 식당들은 빈 테이블이 곳곳에 넘쳐났다.

여의도의 한 고급 한정식 직원은 “예약 없이는 자리를 못 내드릴 정도였는데 손님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라며 “런치에는 1인당 3만원을 넘지 않는 메뉴도 충분히 있지만 고급 이미지 때문에 점심 때조차 찾지 않는 손님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서울청사 인근 한정식집 ‘두마’가 폐업했고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일식집 ‘학’도 문을 닫았다. 두마 관계자는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공무원들 접대문화가 점차 사라져 가던 중 김영란법까지 시행돼 드나들던 공무원들도 발길을 끊었다”고 말했다.

서민경제 타격
교육현장 삭막

서울 종로구의 유명 한정식집 ‘유정’은 60년 만에 문을 닫고 베트남 쌀국수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유정 관계자는 “정부 부처가 세종시로 옮겨가고 단골손님들도 정년퇴직하면서 계속 적자를 봤다”며 “김영란법 시행으로 영향이 더 클 것으로 판단해 주메뉴와 상호를 변경했다”고 말했다.

한국음식업중앙회 관계자는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법 시행으로 회원업소가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면서 “이대로라면 일반음식점과 유흥음식점들의 휴·폐업과 업종 전환이 꼬리를 물 것”이라고 내다봤다.
 

교육 현장의 분위기도 삭막하다. 대부분 입법 취지에 동감하며 법 시행 대비에 나서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천편일률적인 적용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제기되고 있는 것.

이와 관련 각 지방 교육청으로 최근 청탁금지법에 대한 문의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 특히 운동회 등 학교행사 때 학부모들이 교원들에게 제공하는 식사, 음료수 등을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정부가 사례집 등을 통해 불허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밖의 사례들에 대해서는 모호한 부분이 많아 학부모, 교원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실정이다. 청탁금지법에 대해 제기돼 온 다양한 우려들을 불식하기 위한 보다 명확한 법적 해석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교육청 관계자는 “유·초·중·고교를 대상으로 관련 가정통신문 발송 협조 요청, 법 내용 안내, 질의·응답 사례 안내 등의 공문을 전달했으며 관련 연수도 몇 차례 실시했다”며 “열심히 준비는 하고 있지만 시행 전부터 예견되는 여러 문제에 걱정이 앞선다”고 밝혔다.

교사들은 무엇보다 학교 내 관계가 전반적으로 삭막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 A씨는 현장체험학습에서 학생이 준 음료수를 거부하자 학부모로부터 “고마움의 표현인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왔다고 했다.


란파라치 극성
전문학원 호황

A씨는 “초등학교는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교육이 이뤄지는데 너무 삭막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학부모나 관련업체로부터 부정한 청탁을 거절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지만 교사로서 자긍심에 상처를 안기는 것도 사실이다.

A씨는 “서울시교육청이 이미 10년 전부터 업무 관련 청탁이나 금품 수수를 강력히 금지해 현장에선 거의 사라졌는데도 잠재적인 범죄집단처럼 인식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신고로 인해 공익을 증진한 경우에는 포상금이, 직접적인 수입의 회복·증대나 비용의 절감을 가져온 경우에는 보상금이 신고자에게 지급된다. 김영란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공직자뿐만 아니라 공직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민이 조심할 것은 바로 이 법이 아니라 이 법의 시행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이른바 ‘란파라치’라고 할 것이다.

김영란법을 위반한 경우는 형벌이나 과태료만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위반자에 대한 징계가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신고의 위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이미 김영란법 시행 전부터 기존 파파라치 학원들은 앞다퉈 ‘김영란법 특강’을 개설하며 수강생을 끌어모았다.

“누구 만나기가 두렵다”
고급식당 줄줄이 폐업


김영란법이 금지하고 있는 3만원 이상 식사, 5만원 이상 선물이 오가는 현장을 적발해 한몫 챙기는 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 학원들은 지금도 전단과 현수막을 통해 ‘월 300만원 안정적인 수입 보장’ ‘한 건 하면 억대 포상금’ 등으로 선전하고 있다. 업계에선 전국에 파파라치 양성 학원이 20곳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파라치 학원들은 이론 3시간, 실무 4시간 교육을 공짜로 진행한다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료 특강을 미끼로 수강생들을 끌어모은 뒤 초소형 몰래카메라(몰카)를 비싸게 팔아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수강생들은 지적한다. 10만∼50만원 상당 몰카를 한두 차례 강의와 묶어 100만∼200만원에 파는 식이다.

그동안 ‘식’파라치, ‘세’파라치 등으로 활동하던 이들도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란파라치’로 전업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학원의 불법 운영을 신고하는 ‘학’파라치로 활동해온 한 주부는 “학파라치의 포상금은 최대 200만원에 불과하지만 란파라치는 한도가 2억원이라서 파파라치 업계에서 ‘로또’로 통한다”고 말했다.

이에 공무원과 교원들은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안 된다”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해양수산부 등 정부 부처들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김영란법 교육’을 하고 있다. 법원도 란파라치의 신고가 몰릴 것에 대비해 규정 위반에 대해 어느 정도 과태료가 적정한지를 연구하는 ‘과태료 연구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구체적인 김영란법 위반 사례가 아직 없기 때문에 세부 규정을 만들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파라치 학원들은 “김영란법은 적용 대상이 공무원과 교원 등 총 400만명에 달하는 데다 법 위반자를 신고하면 최대 30억원 보상금과 2억원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보상금(포상금 포함) 지급 기준이 엄격하기 때문에 신고자가 억대는 고사하고 100만원을 받을 가능성도 굉장히 낮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신고 포상금을 받으려면 법을 위반한 사람들 이름과 직함, 근무 부서, 접대 및 수수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알고 신고해야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수사 권한이 없는 민간인이 구체적 범죄 정보를 파악해 신고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이런 정보를 갖춰서 신고해도 부정한 자금이 국고로 환수되지 않으면 보상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부작용은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법 적용은 서민경제를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사회를 삭막하게 한다는 지적이다. 애매모호한 조항 때문에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정작 비리를 저질렀던 사람들보다 일반 서민들의 피해가 더욱 클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국민권익위원회에 유권해석을 의뢰하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으나 딱 부러지는 답변을 듣기도 쉽지 않다.

부작용 속출
국민은 혼란

전문가들은 김영란법이 국민들의 공감을 받고 우리 사회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조항은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전문가는 “사회 투명성과 청렴도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영란법은 필요하다”면서 “시행착오로 인해 선의의 피해를 보는 국민이 나오지 않도록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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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