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형 외톨이’ 실태 충격보고 ②사회·경제적 손실 계산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은 엄청나다. 인터넷중독, 실업, 범죄 등 부작용이나 병폐로 이어져 엄청난 비용을 유발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나아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국가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비용으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수십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하고 있다.

잠근 방문 열어야 나라 살림 열린다

방에만 콕 박혀있는 ‘은둔형 외톨이’가 늘수록 사회·경제적 비용도 증가한다. 인터넷중독, 실업, 범죄 등 엄청난 비용을 유발하는 부작용과 직결되는 탓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행동이 사회적 손실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생산성 저하를 가중시킨다고 지적한다.
2002년 8월 국내 최초로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 측은 “점점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적지만 가정붕괴와 학업 포기, 취업 의욕 상실 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사회·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은둔형 외톨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을 계산한 전체적인 통계나 보고서는 없다.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유에서다. 다만 은둔형 외톨이를 유발할 수 있는 일부 경로를 통해 짐작만 가능하다.
은둔형 외톨이의 가장 큰 요인은 ‘인터넷 중독’이다. 인터넷 중독은 개인의 사회 부적응과 심리적 불안 등을 부추겨 결국 사회적으로 소외시킨다. 그중에서도 한 번 빠지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게임 중독’은 더욱 그렇다.
청소년위원회(현 보건복지가족부 아동청소년정책실) 관계자는 “인터넷 중독 사례 중 게임 중독이 가장 심각하다”며 “게임중독 증상을 그대로 방치하면 은둔형 외톨이 증세로 악화될 위험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지난해 조사한 게임 중독 실태에 따르면 청소년의 14.4%, 성인의 6.5%가 온라인 게임 등으로 인해 중독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미 수백만명이 게임 중독이거나 중독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는 셈이다. 이들이 은둔형 외톨이가 될 위험에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일부 전문기관에선 게임중독자 수가 이같은 통계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한다. 많게는 30%까지 게임 중독이란 보고도 있다. 이를 사회·경제적 손실과 비용으로 환산하면 최소한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법무부, 보건복지가족부, 교육과학기술부 등 정부부처가 인터넷중독 치료 등 위기청소년 대처에 투입하는 비용도 한해 약 1천2백억원이 넘는다.
은둔형 외톨이는 국가 실업률과도 무관치 않다. 은둔형 외톨이는 거의 1백%가 실직자 신세다. 취업활동은 물론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다.

인터넷중독, 실업, 범죄 등 부작용 직결…비용만 수십조원
1백만명 이상 위험 경고 “국가적 실업 손실 한해 20조원”

2005년 청소년위원회가 발표한 ‘사회부적응 청소년 지원방안’에서 정의한 은둔형 외톨이는 정신병적 장애 또는 중증 이상의 정신지체가 없이 최소한 3개월 이상 집안에 머물러 있고, 진학·취업 등의 사회 참여활동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청소년위원회가 ‘은둔형 외톨이 위험군’고교생들을 조사한 결과 그 수가 4만3천여명(2.3%)에 달했고, 이 가운데 학업까지 포기한 고위험군은 5천6백여명(0.3%)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상태다. 니트족은 직장도, 학교도 다니지 않으면서 가사일을 포함해 일할 의지도 없는 15∼34세 사이의 ‘청년 무업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일자리를 구할 의욕이 아예 없기 때문에 일할 의지는 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실업자나 구직자와는 다른 개념이다.
청소년위원회 측은 “은둔형 외톨이 고위험군들은 취업 의욕도 없고 일도 하지 않는 니트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인적자원 손실로 연결돼 국가 실업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었다.
최근 통계청의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비경제활동인구는 총 1천5백23만6천명. 이중 청년 무업자는 무려 1백만명에 육박한다.
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2003∼2007년 청년 무업자의 생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말 15∼34세 전체 인구 1천4백75만9천1백93명 가운데 청년 무업자가 95만1천8백51명(6.9%)에 달한다고 밝혔다. 개발원 측은 청년 무업자가 2003년 83만5천1백51명에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청년 무업자는 고스란히 국가 경제에 큰 손실로 이어진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을 통해 계산할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03년 9월 GDP 대비 15∼29세의 청년실업에 따른 경제적 비용을 산출한 결과 전국의 실업으로 인한 총 비용은 2000년을 기준으로 약 20조5천억원이었다. 산업구조 변화 등 비경기적 요인에 의한 실업 비용은 16조6천억원, 경기적 요인에 의한 실업비용은 4조원가량으로 조사됐다. 서울지역 청년실업의 경우 서울지역 총생산(GRDP)의 2.0%에 해당하는 1조9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가 실업 문제에 매년 쏟아 붓는 돈도 어마어마하다. 정부는 2004년 2월 13개 부처 합동으로 ‘일자리 창출 종합대책’을 발표, 재정을 부담하는 다양한 일자리 창출에 나섰다. 여기에 2003년∼2007년 5년간 총 12조원이 투입됐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정부는 실업 해소를 위해 일자리 창출 등에 매년 수조원씩 퍼붓고 있지만, 실업률은 제자리에서 심지어 갈수록 악화되는 실정”이라며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는 보다 구체적이고 전방위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은둔형 외톨이는 범죄 등 사회불안 요소로 번질 위험 또한 크다. 외톨이는 ‘은둔형’(기본적인 사회활동조차 거부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과 ‘활동형’(기본적인 사회활동은 하는 사람) 등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2000년 1월∼2002년 5월 한 정신과의원에서 치료받은 외래환자 2천4백9명중 외톨이로 진단받은 85명을 조사한 결과 31명(36%)이 ‘은둔형 외톨이’, 나머지 54명(64%)은 ‘활동형 외톨이’로 나타났다.
특히 외톨이 증상이 심할 경우 ‘울분형’으로 악화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방콕’기간이 장기화되면 피해의식이 쌓여 폭력·공격적 성향이 강해진다는 것. 울분형 외톨이는 겉으론 조용하나 내적으로 분노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한순간 외부로 표출, 결국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캠퍼스 총기 살인으로 꼽히는 ‘조승희 사건’이 대표적이다. 재미교포 1.5세인 조승희씨는 2007년 4월 버지니아 공대 27명의 학생과 5명의 교직원 등 32명에게 총을 난사해 살해한 후 스스로 자살해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조씨는 학교에서 철저한 외톨이였다. 그의 가족들은 “조씨가 내성적인 성격과 특이한 발음 때문에 중학교와 고교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따돌림과 조롱 등 ‘왕따’를 당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최근 잇따라 일어난 강력 사건의 범인 중 일부가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했다는 정황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김모씨는 서울 홍제동에서 길가던 40대 남성을 아무런 이유 없이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경찰은 김씨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5년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고 밝혔다. 앞서 4월과 7월 강원도 양구에서 운동을 하던 여고생과 강원도 동해시청 민원실 공무원이 각각 ‘묻지마 칼부림’으로 숨지기도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처럼 얼굴도 모르는 제3자가 주된 범행 대상자가 되는 ‘묻지마 살인’은 2006년 전체 살인 사건 중 21.6%를 차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친족 간 살인은 18.6%, 보복성 살인은 9.0%, 가정불화 살인은 7.4% 등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묻지마 살인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로부터 고립돼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감 등을 불특정 다수에 분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며 “은둔형 외톨이를 방치할 경우 제2, 제3의 조승희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양래 휴 신경정신과 김양래 원장은 “최근 일어난 ‘묻지마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 일부가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왔다는 보도를 통해 이들에 대해 선입견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이고, 오히려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또는 가족이나 친구, 주위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라며 “이들의 경우 자신의 스트레스나 불만 등을 해소할 방법이 없어 언제 그 불만들이 밖으로 표출될지 모르지만, 이들을 모두 마치 예비 범죄인들처럼 몰고 가는 것은 오히려 더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은둔형 외톨이가 증가하는 주된 요인은 역시 경제난이다. IMF 재연 조짐마저 보일 정도로 악화일로인 국내 경제 상황에서 외톨이들이 부각되는 이유다. 반대로 경제가 어렵다고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특히 사회·경제적 손실과 사회안전망 차원에서라도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다.

 
일본삼성 ‘은둔형 외톨이’지원사업
“방문 박차고 나오세요”
삼성은 일본에서 은둔형 외톨이들의 사회 진출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일본삼성은 지난 5월 일본보조견협회와 제휴해 기업으로는 세계 최초로 은둔형 외톨이가 유기견 훈련을 통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1990년대부터 급증해 1백60만여명에 달하는 일본 사회의 은둔형 외톨이가 유기견을 직접 사육하고 훈련해 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고 사회 진출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이다.
일본삼성은 이번 제휴에 따라 요코하마시의 일본보조견협회 시설 내에 약 60평 규모의 ‘아스나로학교’를 건축해 기증했고, 학생 3명과 청각도우미견 후보 3마리의 입학식도 개최했다. 삼성은 은둔형 외톨이 지원 프로젝트를 2년 전부터 추진해 왔다. 앞으로 청소년 관련 전문가와 동물 애호 센터, 청소년 자립 시설, 아동양호 시설, 견훈련 전문학교 등과 협력해 운영하게 된다.
청각도우미견 육성에는 삼성에버랜드가 훈련사 파견과 15년간의 훈련 노하우를 제공하게 된다. 삼성에버랜드는 미국 맥클라렌 소년교도소의‘POOCH(Positive Opportunities Obvious Change with   Hound)프로젝트’를 모델로 2006년 12월 천안소년교도소에 치료도우미견센터를 설립해, 소년 재소자들의 교정을 돕고 있다.
삼성은 1993년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 사업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백13마리의 맹도견, 4백88마리의 인명구조견, 17마리의 마약·폭발물 탐지견, 42마리의 청각도우미견 등 특수견을 양성해 장애인 및 정부기관 등에 무상으로 분양했다. 일본삼성 임직원들은 자원봉사로 프로젝트에 참가해 학생들을 위한 비즈니스 강좌, 커뮤니케이션 실습 등 자립을 위한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된다.
이창렬 일본삼성 사장은 “미국 맥클라렌 소년교도소에서 개를 키운 소년범들의 재범률이 0%였다는 사실을 참고해 개를 통한 사회복귀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며 “훈련과정을 통해 실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명나면 오사카와 한국에도 프로그램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