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대 대기업 돈사고 횡령왕 백태

“몇 년만 들어가 살면 다 내돈”

[일요시사 취재1팀] 안재필 기자 = 대규모의 영업 손실을 기록하고, 임직원들에게 고액의 성과금을 지급해 비리의 온상 취급을 받던 대우조선해양이 이제 안팎으로 비판을 받는 상황이 됐다. 오너, 임원진이 아닌 ‘차장’이 수년간 저지른 비리에 국민들은 경악하고 있다.

지난 17일 8년간 공금 180억여원을 빼돌린 대우조선해양 임모(46) 전 차장이 검찰에 송치됐다. 이 사건은 대중들로 하여금 기업들의 자금관리에 대한 안일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허술한 관리
새어나간 자금

어떻게 180억원이나 되는 사내 자금 횡령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면서 정부는 이러한 회사에 공적자금을 계속해서 투자해도 되는 것이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임 전 차장은 기술자의 숙소 임대차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허위 계약을 통해 9억여원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처럼 재계의 부정, 비리는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그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 굴지의 기업들도 자금이 사라지고 나서야 때 늦은 조취를 취하는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지난 2012년 12월 ‘삼성전자’ 대리급 직원이 100억원대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도마에 올랐다. 삼성전자 경리부서에서 근무하던 대리 박모(30)씨는 자신이 속한 부서의 이점을 통해 은행전표 등 입출금 관련 서류를 위조해 자금을 몰래 빼돌려 개인적 용도로 대부분 탕진한 것이 드러났다.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일선으로 복귀한 뒤 계속해서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던 시기이기에 더 큰 논란으로 불거졌다. 박씨는 횡령한 돈을 '마카오 원정도박' '인터넷 도박' 등으로 대부분 탕진한 상태였다. 이 회장은 이후로 “회사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 문화가 훼손됐다”며 “감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감사팀을 보강토록 했다.

임원도 아닌데…‘억’소리 나는 횡령·사기
간큰 실무자들 회사 공금 빼돌려 사적 유용

2009년 1890억원을 횡령한 간 큰 부장도 있다. 동아건설 재무경제과에서 근무하던 박모(48)씨는 2004년부터 4년간 하자보수보증금 명목으로 건설공제조합에 ‘질권설정’을 한 뒤, 예치한 통장에서 477억원을 빼냈다. 돈이 예치된 하나은행 차장 김모(49)씨는 박씨의 고등학교 선배로 서류상으로만 질권설정을 하고 전산에는 입력하지 않았다.

질권설정은 자기 또는 제삼자의 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담보의 목적물을 채권자에게 제공하여 질권을 설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어 박씨는 2008년부터 예금청구서에 법인인감을 미리 찍어두는 수법으로 회사자금 523억원을 횡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고교 후배인 동아건설의 자금과장 유모(36)씨가 눈을 감아줘 가능했다. 박씨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회계법인의 감사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2013년 경남 통영시의 사량수협에서 있었던 횡령 사건도 볼만하다. 유통판매과에 과장으로 근무하던 안모(46)씨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100억여원을 횡령한 사건이다.

안씨는 경남 사천, 전남, 여수 등지의 중간도매상들에게 마른멸치를 구매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구매대금을 송금한 뒤, 일정액을 다시 송금 받는 수법을 사용했다. 그의 범행은 사량수협이 미수금 현황을 파악하면서 드러났다. 안씨는 타 지역으로 출장을 나갈 때 외제차를 타고 다니다 사량도에 들어오면 국산 중고차로 바꿔 타는 등의 이중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 저지른 범행도 존재한다. 포스코건설의 현장채용 사무보조원 김모(34)씨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100억여원을 횡령한 사건이다. 포스코건설은 김씨가 현장 직원 숙소를 임차했다고 허위 전표를 청구하면 본사는 확인 없이 전도금 통장으로 임차보증금을 보냈다. 현장 사무보조원은 전표를 작성하고 현장소장과 관리팀장의 내부 결재를 받은 후 청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현장소장과 관리팀장은 김씨에게 결재를 할 수 있도록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말단도 가능하다
직위 가리지 않아

내부 결재가 넘어가면 본사의 재무, 자금 부서에서 결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표가 오는 대로 돈을 입금한 것이다. 김씨는 그런 허술함을 이용해 허위 전표를 작성해 범행을 시작했다. 사회가 발전하고 기업이 발전할수록 부정, 비리 역시 함께 발달했고 제도의 허점 속에 자리를 잡아 왔다. 매번 ‘투명성’을 강조하는 국가기관 역시 횡령 건으로 얼룩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2년도에는 여수의 8급 공무원이 80억여원을 횡령하는 일도 있었다. 여수시청의 8급 기능직 공무원 김모(47)씨의 사건은 수사를 진행할수록 횡령액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검찰은 “횡령액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향후 수사과정에서 100억원에 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의 횡령은 감사원이 세무서와 시청 회계정산 과정에서 잔고가 다르다는 점을 발견해 감사에 나서면서 발견됐다. 김씨는 2007년부터 여수시청 회계과에서만 근무하면서 전체 직원의 근로소득세 일부를 빼돌리거나 직원 급여를 가로채는 수법 등으로 주머니를 불렸다. 당시 언론은 여수시의 허술한 재정관리를 지적했다. 여수시는 김씨가 퇴직했거나 전출된 동료의 명단을 파악해 가짜 급여계좌를 만든 뒤 제출한 직원들의 계좌번호만 보고 월급을 계속 송금했다.

동아건설 부장 1900억 역대 최고
대우조선 차장 180억 들고 튀어
보험왕 120억…수협 과장 100억

2015년 국세청 산하 직원이 환급금을 통해서 무려 107억원에 이르는 자금을 횡령한 사건도 있다. 서인천세무서 재산범인납세과에 재직 중인 8급 국세공무원 최모 (33)조사관이 저지른 비리다. 최 조사관은 2014년 7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인천 오류동 일대에 유령 무역업체 10여개를 세워 바지사장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이후 가짜 물품 거래 자료를 통해서 한 무역업체에 매입 실적을 몰아줬고, 국세청 홈페이지 홈택스를 통해 허위 전자세금계산서를 발급받았다. 그는 발급받은 허위 전자세금계산서를 매입자료로 활용하여 총 9차례에 걸쳐 100억7000만원여의 부가세를 횡령했다. 최 조사관과 일당은 물건이나 2차 사업자의 경우 매출세액보다 매입세액이 많으면 그 차액인 부가세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위 사건들은 재정관리의 허술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실무자이기에 소속처의 빈틈을 쉽게 찾아 틈새 도둑질이 가능했다.

금융계도 마찬가지다. 2013년에 있던 국민은행의 '국민주택기금 약 100억원 횡령 건'은 국민은행의 신용도를 크게 떨어렸다. 이 사건은 국민은행 본점 신탁기금본부 직원들이 공모해 소멸시효 완성이 임박한 국민주택채권을 위조 후 판매하는 수법을 통해 돈을 빼돌린 사건이다.

수사 초기에는 신탁기금본부와 영업점 직원 3명의 범행으로 알려졌으나, 수사가 진행되며 범행에 관여한 이들이 10명 이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연루된 직원 중에는 과거 감찰반에 근무했던 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국민은행은 경영쇄신위원회를 만들어 불거진 문제점의 원인을 진단하고 쇄신책을 내 놓기로 했다.
 

2000년 울산종금 서울지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이모(38)씨는 회사가 현대증권 MMF(머니마켓펀드)계좌에 맡겨놓은 100억여원의 자금을 2차례에 걸쳐 인출한 일도 있다. 이씨는 이 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현대증권이 울산종금에 제출하는 잔액 증명서를 중간에서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회사는 멍∼
금융업도 구멍


자금이 사라지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는 것은 기업뿐만이 아니다. 소위 ‘사기행위’에 애꿎은 돈을 투자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있다. 금융권의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해 현혹하는 수법은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2012년 국내의 외국계 자산운용사의 펀드매니저 배모(37)씨의 행적을 보자. 그는 어느 정도 투자를 해 본 이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10년 전 배씨는 회사의 이름과 펀드매니저라는 신분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자신이 만든 가짜 펀드 상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8% 확정금리라는 미끼를 통해 배씨는 투자를 유치했다. 허황되게 많지도 않고 아까울 정도로 적지 않은 안정적인 금리에 자산가들은 주머니를 열었다. 한 투자자에게는 최대 23억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10년간 이루어지던 그의 횡령은 어떤 투자자가 은행에서 자신이 가입한 펀드를 자랑하면서 막을 내렸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품이라고 판단한 은행 창구 직원은 배씨의 회사에 문의 전화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배씨의 회사의 자체 조사로 인해 그가 판매하던 펀드가 가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배씨는 투자자 27명으로부터 200여차례 100억원 이상을 받아 횡령했다.

2011년에는 ‘보험왕 사건'이 있다. 사람간의 신뢰를 악용한 사례로 A생명보험사의 보험왕 출신 보험설계사 이모(47)씨가 벌인 행각이다. 동대문과 명동 일대 상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환치기 비용 횡령건은 상인들의 이씨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됐다.

환치기는 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의 계좌를 만든 뒤, 국내에서 의뢰인이 한화를 중개업자의 계좌에 입금하면 외국에 있는 자신의 계좌에서 그 나라의 화폐로 금액을 지불받는 불법 외환거래 수법이다. 이씨는 상인들이 일하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10년간 매일 시장에서 고객관리를 하며 신뢰를 쌓았다.


상인들은 점차 이씨에게 마음을 열었고, 친인척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범행은 그렇게 신뢰를 쌓은 뒤 2009년 일어났다. 이씨가 상인들에게 환치기에 투자하면 원금을 보장하고 월 6%의 이자를 지급하겠다며 속임수를 펼친 것이다. 이씨는 그렇게 100여명의 사람들에게 받은 약 117억5000만원을 횡령했다.

한국은행 총재와의 친분이 있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접근한 40대 여성이 지난 9일 검거됐다. C(49)씨는 2009년 통영의 유명 학원 강사로 시작해 학원의 부원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동료 강사와 학부모 등 주변 지인들에게 고가의 가방과 화장품 등을 선물하며 환심을 사며 친분을 쌓으며 사심을 드러냈다.

C씨는 지인들에게 “은행권 상위 1%의 VIP 고객 극소수만이 아는 투자방법이 있는데 원금 보장에 월 5%의 고수익 보장된다”며 투자를 권했다. C씨는 그렇게 지난 4월까지 7년간 지인 11명에게 269회에 걸쳐서 100억8200만원을 받아냈다. 투자금액을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C씨의 사기행각이 밝혀지게 되었다. 경찰 조사결과 C씨는 피해자들에게 “서울 유명사립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은행 총재와도 친분이 있어 같이 밥을 먹는 사이다”라고 자신을 과시했지만, 이는 모두 거짓말로 드러났다.

가상화폐를 통한 사기건도 눈길을 끈다. 문모(43)씨는 지난 2013년부터 올해 4월까지 경기도 안양에 무등록 다단계 업체를 차렸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본사에서 만든 가상화폐를 사면 짧은 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속였다. 가상화폐는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일반 화폐와 달리 컴퓨터 등에 정보 형태로 남아 사이버상으로만 거래되는 화폐를 뜻한다.

‘믿었는데…’
신뢰의 함정

가상화폐가 실질적인 금액으로 써의 가치를 지니려면 시중에서 현금 교환이 가능해야 하거나 발행업체가 가상화폐의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 실질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하지만 문씨가 판매한 가상화폐는 현금으로 환전 할 수도 없고 시중에서 유통도 불가능한 가짜였다. 문씨는 가짜 가상화폐 판매를 통해 수백명으로부터 900차례에 걸쳐 모두 100억원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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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