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특집> '최초 공개' 두 얼굴의 살인범 관상

“사람 죽일 얼굴 딱 보면 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되면서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경우 피의자 얼굴을 공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범죄자 관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극단적인 수단으로 사회에 분노를 표출하는 살인범들. 전문가가 보는 그들의 관상은 어떨까?

관상학이란 시공간(절대공간과 절대시간)에 의해 형성된 DNA의 작용에너지가 인간으로서의 성장 시기를 거치며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계 분석한 것이다. 별들의 자연적인 기운(양자물리학)에 의해 생로병사가 이뤄지지만 유독 인간만이 자연을 역행하는 행동을 한다.

“사람 됨됨이
다 쓰여있다”

관상전문가는 “지구를 관장하는 북극성의 기운이 북두 구성의 큰 입자를 거치면서 특유의 스펙트럼을 형성해 사람의 생기를 조정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관상에는 살아온 인생에 따라 한없는 자비와 사랑이 존재할 수도 있고 잔악무도한 행동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정이 순수하거나 역상하는 것은 겉모습에 그대로 드러난다.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을 겪어본 어른들이 걸어오는 사람의 행동 모양만 봐도 그 사람의 성정을 완벽할 정도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좋을지라도 부정적인 시공간에 노출될 때 태어난 사람이라면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강호순]
연예인 될 수도

여성을 연쇄적으로 납치해 살해한 강호순은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이다. 그는 2009년 1월27일에 2008년 12월19일 경기도 군포시에서 실종된 여자 대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추가 수사에서 2006년 9월7일부터 2008년 12월19일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 7명이 연쇄적으로 실종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처음에는 연쇄살인을 부인했지만,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자 군포 여대생을 포함해 7명을 살해했다고 털어놨다. 강호순이 살해했다고 밝힌 부녀자는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주부 1명, 여대생 2명이었다. 2009년 2월17일에는 2006년 9월7일 강원도 정선군에서 당시 정선군청에서 근무하던 여성 공무원 윤모씨(당시 23세)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강호순은 2005년 10월30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장모 집에 불을 질러 자신의 장모와 처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강호순은 얼굴이 작고 몸이 크며 성품이 굼뜨고 꾸미고 단장하길 좋아하는 얼굴이다. 잘생긴 눈과 입모양으로 봤을 때 자존심이 강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미남형에 특히 여성이 잘 따르는 인상. 이런 형은 주로 연예인들에게 많이 볼 수 있다. 순기능으로 전환했으면 연예인 또는 엔지니어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으나 끊어진 눈썹과 우뚝 솟은 콧등 뼈, 쫑긋 솟은 귀와 툭 튀어나온 울대는 걷잡을 수 없는 성욕과 반복되는 흉포함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상이다.”

[김길태]
승려 됐더라면

김길태는 1977년 가을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의 모 교회 앞에 버려졌다가 현재의 부모를 만나 입양됐다. 길태라는 이름은 고아, 즉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당시의 루머가 돌긴 했으나, 실제로는 그가 당시 부모를 만난 동네에 길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크게 성공했다는 이유에서 길태라고 이름 지었다고 그의 부모들은 말하고 있다.
 

김길태의 양부모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리고 조용하고 어두운 성격이었으며, 고교 시절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엇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길태는 1994년부터 절도혐의로 소년원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그가 다니던 부산의 한 상업계 고등학교는 1년 다니다 중퇴했다. 이후에는 폭행, 절도, 구타 등 각종 범죄를 저질렀고, 1997년 성폭력 미수와 2001년 부녀자를 감금하고 성폭행해 교도소에서 8년 동안 복역하고 2009년 6월에 출소했다.

‘흉악한 5명’ 준수한 외모에 숨겨진 악마성
살아온 환경에 따라 인생후반 달라질 수도

이후 2010년 1월, 20대 여성을 성폭행하고 감금한 혐의로 수배를 받았다. 2010년 2월27일 경찰은 공개수사를 벌이기 시작했고, 3월2일 경찰이 김길태에 대한 공개 수배령을 내리고 검거에 나섰다. 3월7일 실종된 여중생은 실종된 집 부근의 가정집 물탱크 안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나체로 숨진 채 발견됐다. 김길태는 검거 전부터 검거 후까지 이례적으로 얼굴이 전부 공개됐다.

“김길태는 눈망울이 푸르고 처진 눈을 가지고 있다. 얼굴이 길고 이마가 거칠며 걸음걸이가 상황에 따라 확실히 달라지는 성욕이 강한 상이다. 그는 겁이 없고 성품은 부드러운 것 같으나 간사한 면이 있다. 좋은 턱과 눈썹을 가지고 있어 순작용을 이용해 산림처사(승려)로 진로를 택했더라면 평생 존경받는 고승이 됐을 상이다. 많은 사람을 위한 기도인이 됐을 수도 있다.”


[조성호]
화나면 도는 형상

조성호는 지난 4월13일 오전 1시께 인천광역시 연수구 자택에서 최모씨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뒤 시신을 10여 일간 화장실에 방치한 채 훼손해 같은 달 26일 오후 대부도 일대 2곳에 유기했다. 조성호는 2016년 1월부터 인천의 한 여관에서 카운터 업무를 맡았다. 이 여관에서 만난 최모씨와 친해진 조성호는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인천 연수구 한 원룸식 빌라에서 최씨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2016년 5월1일 오후 3시50분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도 내 불도방조제 입구 근처 한 배수로에서 마대에 담긴 최씨의 하반신 시신이 발견된 데 이어 3일 오후 2시께 대부도 북단 방아머리선착장 인근 시화호 쪽 물가에서 상반신이 발견돼 경찰이 수사를 벌여왔다.
 

경찰은 핸드폰 통화기록 추적을 통해 용의자 조성호를 긴급체포해 자백을 받아냈다. 시신을 유기하기 전날인 지난 4월25일에 '지금도 충분히 힘들지만 꿈을 꼭 이루어낸다', '일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었고, 5월 들어서는 '10년 안에 3억원을 모을 수 있을 거 같다' 는 돈을 벌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조성호의 지인 A씨는 “조용하고, 폭력성을 띄는 모습은 없었다. 주변 사람들과 소통도 잘했고, 주위에 그를 따르는 동생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지난 5월4일까지 카톡이나 전화로 지인과 대화를 계속했다.

2년 전 의정부에서 애견카페를 운영할 당시 알게 된 여성과 연휴 기간인 5월7일에 영화를 보기로 약속까지 잡았지만 5일 체포됐고 영화를 보기로 한 날 구속됐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을 근거로 경찰은 2016년 5월5일 열린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에서 조성호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했다.

“조성호는 미남형에 젊은 세대의 대표적인 관상이다. 눈이 길고 맑은 피부에 코와 이마도 높아 대인관계에 인기가 있을 것. 머리털이 거칠고 소리가 맑을 상이다. 어려서부터 무리에서 뛰어난 상이니 단연코 좋은 직장과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얕은 상근(콧대)으로 성격이 급하고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형상이다. 자신의 입과 눈썹 눈의 장점을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관상의 경우 조상의 묘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 보수가 필요하다.”

[박춘풍]
악독한 늑대상

2008년 위조한 여권으로 한국에 건너와 주로 수원에서 살았던 불법체류자 박춘풍은 2014년 11월26일 자신이 동거녀 김모(48·중국 국적)씨를 목 졸라 살해하고 그 다음 날 오전 5시부터 11월28일 오후 12시30분까지 흉기로 시신을 훼손한 뒤 수원 팔달산 등 5곳에 유기했다.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는 박씨의 주장과는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 결과 시신에서 목을 졸린 흔적이 발견됐고, 반지하 방을 계약할 당시 본인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는 등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행동했다는 정황이 발견됐다. 뒤늦게 박씨가 반지하 방과 별도로 여관에 방을 잡았다고 밝히면서, 반지하 방은 오로지 시신을 토막내기 위해 계약했다는 것이 확실시됐다.

성장 시기 거치며 인륜 DNA 형성
순작용했다면…큰 인물 됐을 수도

게다가 김씨를 살해하고 시신을 일부 훼손했던 장소의 혈흔에서 DNA 감식을 위해 국과수에 의뢰했으나, 훼손 상태가 심해 감식이 불가능했는데, 거의 프로 수준으로 혈흔을 닦아냈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범행 수법이 잔인한 그에 대해 신상을 공개할 수 있도록 규정한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의2 (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에 의해 경기지방경찰청은 2014년 12월13일 중국 국적의 유력한 피의자 박춘풍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했다.


“박춘풍은 두상이 각지며 이마가 높고 관골과 턱이 둥글다. 안청이 둥글며 입이 큰 악독한 늑대의 형상이다. 천성적으로 순진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밝지 못한 눈은 성장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런 사람은 늘 웃음 속에 칼을 품는다. 그가 순작용을 잘 이용했다면 선비로서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을 것. 하지만 과거 입 주위의 상처가 법령(팔자주름)에 불충한 작용을 해 법과 규율을 무시하는 경우가 늘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머리는 좋으나 늘 인내심의 한계를 나타낸다.”

[오원춘]
어진 장수 열굴이…

오원춘은 2012년 4월2일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서 수원 토막살인사건을 일으킨 살인범이다. 그는 2007년 9월 대한민국에 입국한 중국인으로, 경남 거제에서 노동일을 시작하며 한국에 정착했다. 2012년, 오원춘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던 28세 여성을 납치·살해한 후 온몸을 난도질하고, 시신을 280조각으로 포를 떠서 봉지 하나당 20개씩 담아 보관한 엽기 살인으로 체포됐다.
 

이는 인육 채취 및 장기 밀매 목적으로 의심되는 행위였으나, 그는 살인이 우발적이라고 진술했으며 경찰은 이를 그대로 믿고 우발적 범죄라고 결론내렸다. 검찰은 이 사건이 계획적이고 잔혹한 데다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판단해 사형을 구형했으나, 법원에서는 판결을 내린 1심의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오원춘이 초범인데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사회의 유지존립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 판결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우선시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대한민국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오원춘의 얼굴은 범의 형상이다. 그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으며 코가 풍만하다. 입에 각이 졌으며 안청에 검은 빛이 많아 밤이면 광채가 사람을 쏘고 말소리가 크고 행보에 위엄이 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성정을 잘 다스리면 어진 장수가 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충신으로 소임을 다하지만 어긋난 기운을 만나면 사나운 범이 난동을 부리는 것과 같이 흉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못생긴 게 특징?
지금은 달라졌다


연쇄 살인범과 흉악범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겉으로는 평범한 사회 일원처럼 보이는 것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신뢰를 쌓으려는 방편이다. 1978년 미국 사회에 충격을 던진 ‘광대 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는 광대 분장을 하고 어린이를 돌보는 봉사활동을 했으나 실상은 남자아이와 청소년 서른셋을 죽인 살인마였다. 우리는 ‘범죄형 얼굴’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실제로 과거엔 외모만으로 범죄형 인간을 판단하려는 연구도 있었다. 범죄학 창시자라고 부르는 이탈리아 법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는 범죄자의 얼굴 생김새, 즉 관상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큰 귀, 툭 튀어나온 이마와 광대뼈, 긴 팔이 범죄자 특징이라고 했다. 죄수들의 신체적 특징을 관찰한 결과다. 강력계 형사 중에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과학적 근거는 부족해 보인다. 전문가는 “사람은 누구나 길과 흉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순작용의 기운이 길하게 작용하는 시공간이라면 부와 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역작용하는 기운에 시공간의 주파수가 자신의 DNA와 결합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범죄와 흉포함이 가중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면서 “무릇 사람은 순작용의 스펙트럼에 순응하고 자신의 성정을 늘 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ktikt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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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