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의 비밀

68년 만에 보물창고 열리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일본, 대만,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유물까지 약 38만여점의 소장품이 보관돼 있다. 지난 1945년 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나 수장고 속 유물의 전모가 완전히 파악된 것은 아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일제 수집 유물’을 광복 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조사하면서 역사적 중요성이 큰 유물이 여러 차례 발견돼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제 수집 유물은 유적보고서와 도면 등의 공문서, 유리 건판을 제외하고도 발굴품만 ‘16만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워낙에 양이 많고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해방 후 68년이 지나도록 학계에선 해당 발굴품이 어떤 성격의 유물들이고 어디서 어떻게 출토됐는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6만점 발굴
지금도 연구

그러던 중 지난 2013년 1월, 해방 후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은 일제 수집 유물을 조사해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국박은 2022년까지 향후 10년에 걸쳐 연 5억원씩 총 50억원을 투입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일제 수집 유물 조사 프로젝트가 올해로 4년째에 접어들면서 금관총 ‘이사지왕’ 명문 환두대도(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칼)를 비롯해 학계 안팎을 들썩이게 했던 ‘역사적 발견’이 몇 차례 있었다. 학계에선 국박 수장고에서 앞으로도 이러한 큰 발견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고고학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물들이 국박 수장고에 그대로 잠자고 있다”면서 “해방 후에 일본인들이 가져가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남았다. 국박에서 지난 몇 년간 수장고를 발굴한다는 개념으로 일제 수집 유물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박은 1945년 개관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을 고스란히 인수받았다. 이후 6·25전쟁 때 부산 피란 등 7차례나 이사를 다니다 지난 2005년 처음으로 박물관 만을 위한 공간을 건립해 서울 용산에 둥지를 틀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장 이데올로기’가 전 사회를 지배했고, 발굴조사는 개발공사를 앞두고 시행하는 ‘구제발굴’에만 머물렀다. 건축·토목공사를 위해 급하게 매장문화재를 발굴·수습하는 조사가 주를 이루다 보니 전국 각급 박물관이 땅 속에서 나온 발굴품을 보관할 수장고마저 부족한 실정이다.

일제 수집 유물 자체가 36년에 걸쳐 축적된 방대한 자료인데다 발굴조사와 수집과정에서 한국인이 철저히 배제된 점,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제대로 된 보고서를 거의 남기지 않은 점, 지하수장고에 맥락 없이 마구잡이로 방치돼 있었던 점 등이 일사정연하게 정리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정부의 인식 부족으로 인한 예산 및 인력이 부족한 것도 원인이다. 지난 수십년간 발굴·보존 예산 등이 꾸준히 증가해 왔으나 전국의 국·공립박물관에서 긴급한 보존처리를 기다리는 유물들만 수십만점에 이른다.

이 같은 이유들로 일제 수집 유물은 조사 및 복원처리에서 우선 순위에 밀렸으나 10여년 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학회와 각종 소모임을 열고 논문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연구가 진행되다 일제 수집 유물의 중요성이 공유된 끝에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조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국내뿐 아니라 여러나라 유물까지 소장
일제 수집품 프로젝트 4년째 큰 발견도

16만점에 이르는 해당 유물(주로 고분 부장품) 중 최초의 중요한 발견은 칼자루에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둥근 고리 검이다. 해당 유물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금관총 발굴 중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지난 70년간 국박 수장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잠자고 있었다.

2013년 7월, 이 환두대도가 발견된 후 학계에선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일 것이라는 의견이 유력하게 제시됐다. 현재까지 무덤 주인이 특정된 고대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환두대도의 발견은 금관총의 재발굴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재발굴을 실시하면서 이사지왕 명문이 새겨진 칼집이 또다시 출토되면서 화제가 됐다.        


백제 무왕부부(서동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익산 쌍릉도 새롭게 주목받았다. 국박 측은 먼저 유리 건판 사진 속에서 쌍릉의 나무널(木棺)을 꾸미는 밑동쇠(座金具)와 꾸미개를 발견하고 해당 유물이 실제로 국박 수장고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무덤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4점을 국립전주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하고 DNA 분석을 의뢰한 결과, 성인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무덤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조사를 진행한 경주 서봉총 출토 유물도 국박 수장고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조사과정에서 ‘X자형 무늬 금반지’ 2점과 ‘가는 고리 귀고리’ 5점 등 9점이 분실된 것이 밝혀졌다. 1931년에 촬영한 출토 유물 사진에서 확인된 유물을 현 수장고에선 찾을 수 없었다. 박물관 측은 여러 정황상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박은 서봉총 발굴보고서를 발간하고 마찬가지로 오는 10월까지 재발굴하기로 했다. 

속속 드러난
국보급 보물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졌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 사자상도 국박 수장고에 지난 60년간 보존돼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문화재 관리 주무당국인 문화재청과 국박 사이에 협업체계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일제히 일었으나 그만큼 국박 수장고에 알려지지 않은 발굴과 발견이 많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대동여지도 목판 원판(진품) 11장이 지난 1995년 국박 수장고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해당 목판은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부터 수장고 내에 있었다. 이외에도 명나라 비단지본 마패인 부험(符驗), 원주 출토 고려 철조 아미타불상 등이 최근 발견됐다. 말 그대로 박물관 수장고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일제 수집 유물에 대해 “시기 별로 다양하게 수백 건의 발굴조사와 유물이 있다. 경주국립박물관에도 일제가 수집한 유물이 많이 소장돼 있다. 최신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어떤 것을 발견해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때는 세기의 발견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박은 현재까지 일제강점기 발굴보고서와 도면 등 공문서와 유리 건판 사진을 절반 이상 공개했다. 내년까지 30만점 전체를 온라인에 공개할 방침이다. 깨진 유물은 보존처리하고, X선 성분분석과 실측 작업을 거쳐 종합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경주·부여·공주·대구·김해 등의 국립지역박물관도 함께 작업한다. 우선 순위에 따라 2022년까지 전체 46만점을 순차적으로 공개해 일제 수집 유물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다.

일제 수집 유물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수집된 것일까.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래 한반도 내 유적과 유물, 역사자료, 인종, 언어,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학술조사를 기획했다.

총독부가 자금을 제공하고 일본인 학자들이 주축이 된 학술조사사업은 식민통치를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식민통치논리’를 창출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문화의 타율성을 부각시켜 제국주의 사관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남긴 저작과 사진 등은 부족하나마 오늘날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총독부는 만주 소재 발해 도성 유적, 고구려·신라·백제·가야 고분, 소수의 석기시대 유적 등을 발굴했다. 민간에선 아마추어 고고학자 혹은 도굴꾼에 의해 일제강점기 내내 가치가 높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기도 했지만, 총독부에선 발굴을 통해 전국에서 모은 매장문화재를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박물관, 각 지역 부립박물관 등에 수장했다. 부립박물관은 오늘날 국립 지역 박물관의 모태가 됐고 해방 후 이들 수장품을 고스란히 인수받았다.

1945년 처음 문 열고 조사 
유물의 전모 지금도 파악중

앞서 정인성 교수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반출을 금지했다. 유명 수집가들이 부산까지 가져갔다가 못 가져가게 하니까 평소 알고 지낸 조선인에게 맡기거나 팔거나 몰래 어선에 실어 빼돌리려 했다”면서 “조선인에게 믿고 맡겼는데 며칠 만에 도깨비시장에 나오는 등 사사로이 처분해버린 것이 많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에 의하면 해방 후 대구국립박물관에서 일본인 소유 유물을 주도적으로 수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내부자가 목록을 없애고 사적으로 착복했다. 유물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흩어져버렸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고고학자는 일제 수집 유물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얻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일본을 위한 ‘일본역사 새로 쓰기’였고, 그들만을 위한 문화재 정책, 박물관 정책이었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 동안 한국인을 배제하고 일제 권력자들이 그들만의 잔치를 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처음엔 식민사학과 관련된 것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적조사 발굴이 체계적으로 궤도에 오른 후엔 (자기들 목적에 맞는 것만) 선별해서 박물관에 갖다놓은 것은 아닌 것 같다”며 “가능하면 모든 자료를 원칙에 맞춰서 박물관에 보관하고 순서에 따라 보고서를 쓴 것 같다”고 지적했다.  

행방 묘연했던
작품 나오기도

결국 일본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활동이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뒷받침하는 행위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 앞서 학자는 “고적조사와 같은 실증적인 활동들과 조선역사 새로 쓰기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난 다음에야 이 같은 다양한 주장들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비밀통로

현재 왕실 유물을 관리하는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수장고는 지난 2005년 서울 용산으로 자리를 옮긴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를 물려받은 것이다. 이 지하 수장고는 서쪽과 동쪽 공간으로 분리되는데, 각각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에 건설된 것들이다. 경복궁 근정전∼광화문 사이 지하에 위치해 있으면서 바로 옆 서쪽에 위치한 고궁박물관까지 약 300m 길이의 통로가 조성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서쪽 공간은 원래 방공호와 취조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쪽 건물 1층에 일제가 파놓은 지하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그 끝에 두꺼운 철문이 보인다. 철문 뒤에 100㎡(30여평) 남짓한 규모의 방이 있다. 모래를 채워 방음을 시도한 흔적으로 볼 때 조선인 사상범을 심문한 취조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하 11m 깊이에 위치한 동쪽 지하공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든 비밀 벙커였다. 국가 비상사태 발생에 대비해 원자탄 공격을 견디도록 철근 콘크리트로 2m 두께의 천장을 만들고 3중 철문 출입구와 제반시설을 잘 갖췄다. 정부요인의 비상대책회의와 기밀문서 보관 등 전시대비 업무를 준비한 곳이다.

벙커는 방수처리가 잘 돼 있고 널찍해서 수장고로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중앙홀이 위치한 좌우로 16개의 방으로 구성됐고 바닥은 너도밤나무로 마감하고 내부 진열장과 천정은 오동나무로 제작했다. 전체면적은 3734m²에 달한다. 총 소장유물은 4만4760점인데 지하 수장고에만 3만1000여점이 보관돼 있다.

고궁박물관은 지난 3월30일 수장고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비록 10명만 수장고를 둘러본 제한적 공개였지만, 유물의 보존과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박물관 특성상 파격적인 일이었다. 오는 8월, 9월, 12월에도 신청을 받아 수장고와 보존과학실을 70분간 공개한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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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