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05.21 01:01
[일요시사=사회팀] 부자와 가난한 자, 역동성과 서정성,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도시의 풍경. 신정무 화백은 이 도시에 매료돼 순간순간을 종이에 담았다. 멋스러웠던 그의 삶처럼 그림도 그의 삶을 닮았다. 신정무 화백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1970년대 동양방송(TBC)에 입사한 신 화백은 <일간스포츠>와 <스포츠서울>을 거쳐 <문화일보>에서 국장을 역임했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소프라노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던 그는 아내와 결혼에 골인, 슬하의 형제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냈다. 성공한 삶 한 평생을 언론사에 종사했지만 그의 전공은 '미술'이다. <문화일보>에서 상무이사로 정년을 마감한 신 화백은 화가로 전직해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경기 용인에 마련된 그의 작업실에는 색색의 화려한 그림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우아한 클래식이 흐르는 그곳. 마주 본 소파에 앉아 한동안 골몰히 생각하던 신 화백은 기자에게 지난 얘기를 풀어냈다. "2000년에 정년을 마치고 '내 남은 인생은 그림을 그려야 겠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제가 언론사 임원을 하면서 지면에 많은 작가들도 소
[일요시사=사회팀]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보이는 동안을 가진 노(老)화백. 서양화가 박병호 선생은 때론 천진한 아이처럼 때론 속 깊은 맏형처럼 인터뷰에 응했다. 일생을 자유롭게 살았을 것 같은 그지만 이면에는 남모를 고충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허물조차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 당당한 사내였다. 비좁은 작업실, 수북이 쌓인 그림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화가를 시작하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으세요?" 서양화가 박병호 선생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후회한 적 없어요.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면서 자유롭게 살면 된 거지." 열악한 현실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그는 50여년을 붓과 함께 살았다. 부부도 몇 십 년을 함께 살면 질린다는데 그림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박 선생은 아픈 아내를 간병하는 중에도 틈틈이 화실에 들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이 자신의 직업이자 삶이기 때문. 하지만 그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대가로 너무 많은 걸 포기하고 있다. "한평생 그림만 그렸는데 지금도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되는 작가가 너무 많습니다.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일요시사=사회팀] "사진이 잘 나올지 모르겠네요." 해당 김영순 화백은 사진 촬영 내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늘 사람들을 향한 배려를 잃지 않는 그의 성품은 인터뷰 중간마다 빛났다. 하지만 온화한 그의 눈빛도 그림을 얘기할 때면 달라졌다.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한 미술계의 중진으로서 그가 느끼는 책임감은 남달라보였다. 순수 예술의 위기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렵게 인터뷰를 승낙한 해당 김영순 화백은 "예술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며 입을 열었다. 지난 30여 년간 누구보다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며 한국화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한 김 화백. 그는 "어려워도 결국은 그림"이란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보통 한국화하면 관객이 그림을 통해 향수를 느낀다고들 하죠. 농촌을 그린 산수화에서 사람들이 풀내음을 느끼듯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객이 그림과 혼연일체의 기쁨을 맛보게 할 책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작가가 벚꽃을 푸른색으로 표현했다고 하면 그걸 보는 관객은 푸른 벚꽃을 마주하면서 '아, 벚꽃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혹은 '이런 색을 내는 데는 이유가 있겠구나
[일요시사=사회팀] 유천 오수철 선생은 오직 사군자만으로 미술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온 작가다. "남들이 하는 건 싫다"고 말한 그는 "다른 걸 할 수 있어야 예술"이라고 말했다. 유천의 거침없는 언변과 확고한 철학은 그가 평생을 곁에 둔 사군자처럼 올곧으면서도 당당했다. "잘하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잘하는 걸 뛰어넘는 게 바로 예술이죠." 유천 오수철 선생은 문인화가다. '회화'가 다수인 미술판에서 '문인화'만 그리는 화가는 흔치 않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선 '사군자 말고 다른 것도 그려보라'는 유혹이 있다. 하지만 오 선생은 30년 넘게 사군자만을 고집했다. 공부 또 공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죠. '퓨전'이나 '크로스오버'와 같은 지금 시대의 조류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유행을 따라하거나 남들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게 싫었어요. 시류에 편승한다는 얘기도 듣기 싫고. 물론 사군자가 미술의 전부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전 아직 그림에 대해 공부할 나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오 선생은 미술을 논할 때 '기교
[일요시사=사회팀] 컴퓨터가 없던 시절, 한석봉은 '글 잘 쓰는 재주'로 천하가 알아주는 명인이 됐다. 하지만 16세기의 한석봉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다면 한석봉은 아마 어머니와 함께 떡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천 이상명 선생은 21세기인 지금도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그에게 서예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자 후세에 남겨야 할 보물이다. 흔히 양반(兩班)이라 하면 책상 앞에 앉아 '공자왈 맹자왈'하는 문약한 선비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학천(鶴天) 이상명 선생은 문인(文人)보다는 무인(武人)에 가까운 풍모를 갖고 있었다. "소싯적엔 맨손으로 흉악범을 제압해 경찰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태권도와 관련한 일화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문무 겸비 "제가 지금은 체격이 좀 있지만 어릴 때는 몸도 약하고 체구도 작아서 친구들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그런데 우리 형님 중에서 태권도를 하신 분이 있었어요. 그 형님께 태권도를 처음 배운 게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 배우기 시작해서 3년 뒤에는 단증을 땄고요." "중학교 때부터는 시골에
[일요시사=사회팀] 미술품 시장이 불황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갤러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넘친다. 갤러리의 꽃인 '큐레이터'도 마찬가지. 유학파 일색인 큐레이터 업계에서 국내파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알리고 있는 신진 큐레이터가 있다. 바로 박혜림씨. 크림처럼 달달하면서도 때론 맥주처럼 시원한 구석이 있는 매력적인 큐레이터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759개 직업 중 큐레이터의 직업 만족도는 6위다. 이는 전체 7위를 기록한 대학교수보다 높은 순위며, 예술 계통 직업군 가운데서는 두 번째다. 지난 1999년 서울 인사동에 개관한 '갤러리룩스'는 10여년 동안 '사진전문갤러리'로서의 입지를 차곡차곡 다져왔다. 큐레이터 4년차를 맞고 있는 박혜림씨도 마찬가지. 갤러리룩스 큐레이터로서 박씨는 큰 자부심과 함께 자신의 목표를 하나 둘 이뤄가고 있었다. 남들이 모두 선망하는 직업 "성격이 그래서인지 힘든 걸 잘 모르겠더라고요. 관장님이 휴가도 많이 주시고(웃음). 누가 보면 내숭이라고 하지만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재밌어요. 아직 업계 선배에게 배워야 할 부분도 많고 다뤄보고 싶은 전시도 많은데 사실 직업의 어려움보다는 배움에 대한
[일요시사=사회팀]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사진을 배운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음직한 구절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이야기는 점차 유실되고 있다. 사진작가 허원은 "사진 하나로 레포트 3장은 쓸 수 있어야 한다. 사진 찍을 때 왜 찍는가를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사진에 대한 작가로서의 예의라면서. 수십 년 넘게 셔터를 눌러온 노장이 있다. 소담(笑談) 허원은 한국사진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등재된 인물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다. 일흔을 앞둔 그는 "아직 어린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며 자신을 낮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뒤에 '선생'이나 '회장'과 같은 명칭 붙이는 걸 좋아하지만 전 그런 게 싫더라고요. 나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서 저는 그냥 사진 찍고, 찾아오는 후배들 가르치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묵묵히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소박한 노장 2000년 무렵부터 유난히 증가한 사진 인구. 수많은 사진동호회가 생겨나고, 전문가를 자처한 이들도 우후죽순처럼 번졌다. 하
[일요시사=사회팀] 박영길 화백은 상대의 목소리만 듣고도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인물화의 대가'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물화는 그가 가진 재능의 일부일 뿐. 사군자부터 정물화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붓은 막힘없이 늘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산(芝山)이 붓을 들자 그곳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하얀 종이는 이내 푸른 대나무 숲으로 바뀌었고, 바위틈에는 어느 샌가 분홍빛 난이 봉우리를 틔우고 있었다. 서양화가로 이름 높은 지산 박영길 화백은 섬세한 붓놀림으로 마주 본 이를 매료시키는 묘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화려한 경력 "저는 그림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껴요. 자식을 바라볼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있잖아요. 어려움이 없었냐고요? (그림을 그리려고) 산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무릎이 깨지고, 무릎 맡에 있던 그림이 바람에 날아가고…. 이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건데 어려움이라 보긴 어렵죠." "어쩔 때는요. 내 그림을 보면 조금 창피해요. 제 벌거벗은 자태나 마찬가지거든요. 보통 분신이라고들 하죠. 내 분신인 아이를 잉태하면 몇 달 동안 애지중지하듯 그림에도 그렇게 정성을 들인답니다. 그게
[일요시사=사회팀] 규당 김인기 화백은 파란 산자락 밑에 작고 아담한 단층집을 마련했다. 밤이면 하얀 별이 하늘을 수놓고 낮이면 마당 앞의 초록 새싹이 말을 건네는 곳. "시골스러운 게 더 좋다"는 김 화백은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규당(閨堂)의 도록을 펼치자 그 안에 새로운 경관이 펼쳐졌다. 샛노란 꽃들이 전해오는 향내음과 푸른 나무 그늘의 서늘함, 굽이진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하얀 하늘과 맞닿아 보드라웠다. 추수를 앞둔 너른 들녘처럼 김인기 화백은 넓은 품으로 손님을 맞았다. 슬럼프 없는 활동 "전 그림에 관해서는 질투와 시기가 없어요. 꼭 유명해져야겠다는 욕심도 없고요. 라이벌은 더더군다나 없어요. 누구보다 잘 하려고 경쟁하듯이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니까…. 그림은 창작이잖아요.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작가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그걸로 된 거죠." 김 화백의 그림에는 먹과 멋이 있다. 먹의 올곧은 기운과 여유로운 멋의 조화가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김 화백은 "그림 안에는 반드시 작가의 생각이 들어간다"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림이
[일요시사=사회팀] "침묵이 금인 시대는 갔다." 목아(木芽) 박찬수 선생은 '부처가 입을 열다'라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늘 닫혀있던 부처의 입을 연 건 그만큼 우리 시대에 해야 할 말이 많아서다. 여기 금보다 더 값진 게 있다. 그건 바로 전통. 이 전통을 말하기 위해 박찬수 선생이 직접 입을 열었다. 경기도 여주에 자리 잡은 목아불교박물관은 평일임에도 견학 온 중학생들로 북적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인 박찬수 목조각장은 지난 1993년 사비를 털어 이 목아불교박물관을 개관했다. 민족혼 전수가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는 이 장인은 "박물관을 지키는 게 민족혼을 지키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족혼 지킴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박물관만큼 그 나라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곳은 없어요. 예를 들면 불란서의 루브르 박물관이 대표적이죠. 이렇게 다른 나라들은 박물관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들의 전통을 보존-계승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통에 관심이 없어요. 세계화에 이어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 현실에서 이대로 가다간 한민족의 전통과 고유의 주체성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물관은 그래서 중
[일요시사=사회팀] 하윤지는 미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뮤지컬에 도전했다. 그는 자신을 '국내 최초'라고 소개했다. 성악을 하다가 뮤지컬로 전향한 배우는 많지만 뮤지컬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오페라 가수라고 규정짓는 아티스트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윤지는 '국내 최초'란 말에 제법 근접했다. 하윤지는 정통 성악가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뮤지컬 배우 겸업이라는 이력을 쌓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모차르트 락'이라는 프랑스 원작 뮤지컬로 국내 무대에 섰다.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는 성악을 할 때는 성악가로, 뮤지컬을 할 때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며 남다른 의욕을 드러냈다. 도전, 또 도전 "많은 분들이 신기해하시는데 어릴 때는 꿈이 원래 가수였어요. 그런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계속 부모님을 설득했어요. 노래하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부모님께서 '정 그렇다면 정통 음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고…. 한국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뒤 유학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한국의 문화 시장이 많이 달라져있었죠. 뭔가 새롭게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뮤지컬
[일요시사=사회팀] 그림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라는 독특한 주제. '소통의 단절'이 곧바로 떠올랐다. 심봉민 작가는 "그 부분까지 생각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설명했다. 그의 그림은 사람의 기억을 자극하는 매개였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심봉민 작가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5명 중에 1명이다. 그의 말처럼 미술을 전공한 뒤 미술판에 남아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미술은 길게 봐야 "30명 중에 많아야 5명?"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 살기 힘들잖아요. 갤러리에 그림 한 번 걸고 유명해진다? 그런 지름길은 없어요. 저는 앞으로도 이 길이 힘들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또 조급하진 않아요. 화가는 70대가 돼서도 팔만 움직이면 일할 수 있거든요. 누가 제 작업을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조금씩 쌓아 가면 되는 거죠. 미술은 길게 봐야합니다." 심 작가는 다른 신진 작가들처럼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림들한테 미안했어요. 제 자신에게도 미안했고. '난 꿈과 멀어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