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 터를 찾아서... ②충주시 미륵리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전설 품은 미륵대원지

폐사지는 초분(草墳)과 비슷하다. 살이 사라진 자리에 뼈만 남듯, 건물이 무너진 자리에는 주춧돌과 석탑만 남는다. 폐허에 덩그러니 남은 돌덩이가 눈부시게 빛난다. 삼국이 치열하게 싸운 중원 땅, 지금의 충주에는 걸출한 절터 두 곳이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인 하늘재 아래 자리 잡았다. 북쪽 월악산을 바라보는 석불은 마의태자와 얽힌 애잔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청룡사지에는 보각국사 혼수의 부도가 있는데, 돌에 새긴 섬세한 조각이 경이롭다.

왕래하던 길가에 위치한 계단식 미륵대원지
백두대간 하늘이 열리는 풍경 갖춘 하늘재

충주 미륵대원지는 도로 옆에 자리한다. 절이 산에 있지 않고 길가에 자리한 셈이다. 그 까닭은 길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길은 어디일까? 문헌에 처음 기록된 길은 신라 아달라왕이 156년에 연 계립령(525m), 지금의 하늘재다. 하늘재는 미륵대원지에서 곧바로 연결된다. 미륵대원지 바로 위에는 고려시대 원(院) 터가 자리한다. 따라서 미륵대원은 당시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가에 세운 것이다.

미륵대원지는 계단식 구조인데,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완만해서 평지처럼 느껴진다. 한 칸 오르면 당간지주가 누워 있고, 또 한 칸 오르면 거대한 돌 거북(귀부)이 버티고 있다. 돌 거북의 생김새가 순박하다. 

두어 칸 위에 5층석탑이 우뚝하며, 일직선으로 석등과 석불이 자리한다.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출입을 통제(2017년 1월 완공 예정)한다. 석불입상 뒤로 후광처럼 돌을 쌓은 곳이 석굴이다. 거대한 돌을 쌓아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모셨다. 불상 위로 목조건물이 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공사는 석실을 해체한 뒤 복원하는 작업이다.

덕주공주 얽힌
석불의 전설


석불은 절터의 주존불로 높이가 무려 10.6m에 이른다. 커다란 돌덩이 네 개로 몸을 만들고, 갓과 좌대는 다른 돌을 썼다. 웅장한 규모와 걸맞지 않게 석불의 표정이 그야말로 착해 빠진 얼굴이다. 이 친근함 덕분에 미륵대원지에 얽힌 전설이 힘을 얻는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는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떠났다. 도중에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지어 북쪽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석불은 남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덕주사를 품은 월악산을 바라본다.

미륵대원지를 구경했으면 마의태자의 발걸음을 따라 하늘재에 올라보자. 미륵대원지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드넓은 원 터가 있다. 원(院)은 관리나 상인이 숙식하던 공간이다. 원 터 뒤로 하늘재 입구가 보인다. 하늘재는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려 시대까지 남북 교통로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 새 길(문경새재)이 개통하면서 ‘옛길’이 되었지만, 최근까지 사람들이 이용했다.

여기에서 하늘재 정상까지 2km 거리로 40분쯤 걸린다. 길은 부드럽게 산의 품을 파고든다. 졸졸 흐르는 개울을 지나고, 소나무 숲길과 참나무 숲을 차례로 만난다. 연리지와 김연아 선수의 포즈를 닮은 ‘연아나무’를 지나 모퉁이를 휘휘 돌면 하늘재 정상이다. 여기까지 흙길이고, 고갯마루 반대편은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정상에서 오른쪽 나무 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면 탄성이 터지면서 하늘이 열린다. 건너편으로 암반이 드러난 포함산(962m)이 우뚝하고, 백두대간 봉우리가 꼬리를 잡고 흘러간다. 이 감동적인 풍경을 바라보면 하늘재란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늘재에서 내려오면 청룡사지로 이동하자. 소태면 오량리 뒷산인 청계산 남쪽에 자리 잡은 청룡사지에는 다양한 부도가 있다. 주차장 앞에 부도 위치가 표시된 안내판이 있다. 호젓한 참나무 숲길을 터벅터벅 걸으면 큰 비석이 반긴다. 1692년에 세운 청룡사 위전비다. 절의 중창과 경영 등에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는 데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이 담겼다. 다시 오솔길을 지나면 ‘적운당’이라 적힌 석종 모양 부도와 부도 조각이 모여 있다. 그 뒤쪽 시원한 솔숲 너머 청룡사지의 주인공인 석등과 보각국사의 부도, 부도비가 한 줄로 늘어섰다.

보각국사 유물
품은 청룡사지

보각국사 혼수는 고려 말에 활동한 승려로 공민왕에게 불법을 전했고, 계율을 굳게 지켰으며, 선종과 교종의 모든 경전에 통달했다고 전한다. 보각국사는 고려 왕실과 숨바꼭질한 일화가 유명하다. 공민왕이 내원에 머물게 하자 위봉산으로 도망쳤고, 회암사에 주석하길 청하자 오대산으로 숨었다. 우왕은 여러 번 국사로 모시려고 했으나 스님이 거절하자, 국사 책봉에 필요한 물건을 들고 스님이 계시던 청계산 연회암에 와서 국사로 봉했다고 한다.

국보 197호로 지정된 보각국사 부도(보각국사탑)는 불교 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 부도의 몸돌은 팔각이지만 배흘림기둥처럼 둥그스름하게 배가 부르다. 각 면에 무기를 든 신장상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하고, 지붕돌 합각마루 끝마다 봉황과 용머리가 차례로 조각되었다. 부도 앞 석등은 받침돌이 사자상이라 사자 석등이라고 부른다. 우락부락한 사자의 얼굴이 장난꾸러기 같아 재미있다.


청룡사지에서 가흥삼거리로 나오면 우리한글박물관이 지척이다. 2009년에 문을 연 박물관은 국립한글박물관보다 먼저 생겼다. 박물관에는 김상석 관장이 30년 넘게 모은 귀한 한글 자료가 그득하다. 현재 〈해주도자기, 한글을 노래하다〉 특별전이 열린다. 해주 도자기는 구한말 황해도 해주 일대에서 만들어진 백자로,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문양이 특징이다. 주로 한글이 적힌 도자기를 전시하는데, ‘이것시 참 조은 거시오’ ‘여러분 보십시오’ 등 투박하게 쓴 한글이 절묘하다.

우리한글박물관에서 남한강을 건너면 서유숙을 만난다. 달성 서씨 상주 문중의 종갓집 장녀 서성수 씨와 그 아들이 운영하는 한옥 펜션이다. 고택에 관심이 많던 서씨는 전국을 떠돌며 한옥을 연구하다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서유숙은 전통 한옥을 바탕으로 모던한 감각을 살려 세련된 느낌을 준다. 밤나무 언덕과 넓은 잔디 마당, 남한강이 코앞이라 경치도 좋다.

---------------------여행 정보---------------------

당일 코스: 충주 미륵대원지→하늘재→우리한글박물관→청룡사지

1박 2일 코스
첫째 날: 충주 미륵대원지→하늘재→서유숙(숙박)
둘째 날: 청룡사지→우리한글박물관

관련 웹사이트
·충주문화관광 www.cj100.net/tour
·우리한글박물관 www.hgnara.net
·서유숙 www.seo8831.com

문의 전화
·충주시청 관광과 043-850-6723
·우리한글박물관 043-851-4955
·서유숙 043-855-9909

대중교통(버스)
서울-충주: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38회 운행(06:00~21:40), 약 1시간 40분 소요.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하루 38회(06:00~23:00) 운행, 약 1시간 50분 소요.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센트럴시티터미널 02-6282-0114, 이지티켓 www.hticket.co.kr, 충주공용버스터미널 043-856-7000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IC→추점삼거리→수안보입구삼거리→지릅재 입구→미륵대원지→지릅재→수안보교차로→가흥교차로→청룡사지→가흥삼거리→우리한글박물관→서유숙

숙박
·서유숙: 소태면 덕은로, 043-855-9909, www.seo8831.com
·호텔 더베이스: 충주시 호암대로 8, 043-848-9900, www.hotelthebase.com
·계명산자연휴양림: 충주시 충주호수로 1170, 043-850-7313

식당
·삼거리기사식당: 청국장·김치찌개, 중앙탑면 가곡로, 043-855-4078
·투가리식당: 올갱이해장국, 수안보면 온천중앙길, 043-846-0575
·원조중앙탑막국수: 막국수·만두, 충주시 중원대로, 043-848-5508

주변 볼거리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목계나루, 월악산국립공원, 수안보온천 등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