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국감 임박> 벌벌 떠는 대기업들 백태

재벌 잡는 계절, 총수들 줄소환 임박

[일요시사 취재1팀] 이광호 기자 = 19대 마지막 국정감사가 머지않았다. 여야는 이번 국감에서 기업인들을 적극 소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현재 재계 톱뉴스인 롯데를 시작으로 그간 논란을 일으켜왔던 기업인 줄소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키워드는 ‘지배구조’ ‘일감 몰아주기’ ‘자사주 처분·매입’ 등이다. 국감을 앞둔 재계의 표정을 살펴본다.

 
올해도 어김없이 국정감사 시즌이 돌아왔다. 특히 롯데가 경영권 분쟁의 후폭풍을 일으키며 재벌개혁 목소리를 높여 재벌 총수 및 그 일가와 기업 경영진들의 증인·참고인 채택 요청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살아있는 이슈들
물의 기업 1순위
 
여야는 벌써부터 국감을 통해 일부 기업인을 손 볼 것이라며 벼르고 있는 분위기다. 최근 롯데그룹 사태를 계기로 불투명한 지배구조, 순환출자, 일감몰아주기 등 부당 거래 및 편법적인 상속, 자사주 처분·매입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 등을 주로 다룰 전망이다. 우선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과 관련, 직접 당사자인 신격호 총괄회장을 포함해 차남 신동빈 회장, 장남 신동주 전 일본롯데그룹 부회장 등 주요 관련자들의 국감 증인 및 참고인 채택이 핵심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룹 안팎에서는 고령인 신격호 총괄회장의 국정감사 출석은 어렵다 해도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의 증인 채택은 피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신씨 형제의 정무위 출석 여부는 여야 합의라는 관문이 남아 있지만 이들이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만큼 무난히 합의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는 국적 논란으로 인해 기업 이미지 타격이 커서 국회 출석에 불응할 경우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무위에서 롯데그룹 총수 일가를 증인으로 채택하더라도 실제 신씨 형제가 출석할지는 미지수다. 벌금을 내더라도 국회 증인 출석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롯데그룹 측은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상황이다. 경영권 분쟁이 현재 진행형이어서 국감까지 신경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정무위는 롯데 외에도 재벌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불법·탈법적인 내부거래, 불투명한 순환출자, 일감몰아주기 등을 다룰 것으로 예상돼 관련 재벌 총수 및 일가들이 증인·참고인 대상으로 국회를 드나들 것으로 보인다.
 
19대 마지막 국감…의원들 집중포화 예고
주요 총수 줄소환 예상 “재계 바짝 긴장”
 
보건복지위에서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와 관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해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들이 쟁점이다. 여야는 지난 11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 ‘메르스 사태 감사요구안’을 심의, 의결했다. 
 
감사 요구안은 정부 당국의 초동대응 부실 등 메르스 사태 전반에 대한 원인 규명과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환자 조치에 관련된 정부대책 등을 감사하도록 했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민간기관인 삼성서울병원 등이 감사원 감사 대상에 오르게 됐다.
 
  
메르스는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감염증으로 낙타나 박쥐가 주요 매개체로 추정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5월20일 첫 환자가 발생했다. 정부가 지난달 메르스 종식을 선언하기까지 발생한 감염자는 총 186명이다. 이 중 36명이 숨졌고 12명(중증 3명·경증 9명)은 여전히 치료 중이다. 메르스에 완치돼 병원 문을 나선 환자는 모두 138명이다. 치명률은 19.35%이다.
 

누적 격리자 수는 1만6693명이고 휴업한 유치원·학교는 2704곳이다. 무엇보다도 메르스는 국내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줬다. 지난 6월 한국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메르스 사태의 경제적 손실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메르스 사태 7월말 종결 시 국내총생산(GDP) 손실액은 9조3377억원이다.

조용히 칼 가는
국회 상임위들
 
메르스 사태 당시 삼성서울병원은 ‘슈퍼 전파자(환자번호 14번)’를 놓치면서 병원 응급실에서만 82명을 감염시켰다. 이후 감염자 수가 급증했다. 보건당국이 삼성서울병원에 대한 역학조사를 제대로 실시했는지 등이 쟁점이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가 사실상 종식됐고 이 부회장이 “메르스 사태에 머리 숙여 사죄한다”며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는 점에서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들만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메스르 사태와 별도로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문제로 증인 채택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강한 반발에도 합병을 성공시켰다. 오는 9월1일자로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통합 삼성물산’이 탄생하게 된다.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SDI→삼성물산→삼성전자로 이어지던 삼성그룹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가 통합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단순화된다. 하지만 이번 합병 과정에서는 여러 문제점이 노출됐다. 국제투기 자본에 맞선 경영권 방어 수단, 주주 가치와 권리, 지배구조의 투명성 등 국내 대기업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점이 주 쟁점이 될 전망이다.
 
국토교통위에서는 ‘땅콩회항’ 사건을 다룰 것으로 보인다. 땅콩회항 사건은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지난해 12월5일 뉴욕발 대한항공 1등석에서 마카다미아를 봉지째 가져다준 승무원의 서비스를 문제삼아 난동을 부린 데 이어,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이동 중이던 항공기를 되돌려 수석 승무원인 사무장을 강제로 내리게 해 국내외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출발이 20분가량 연착되면서 비행기에 탑승했던 250여명의 승객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잃었다.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같은 달 8일 언론을 통해 대한항공 항공기 연착 사유가 공개되면서 재벌가 갑질 논란이 촉발됐다. 특히 게이트를 떠난 항공기가 다시 게이트로 돌아오는 램프리턴에 대한 항공법 저촉 여부 등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한항공은 조 전 부사장을 옹호하면서 책임을 승무원에게 떠넘기는 사과문을 발표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여론의 뭇매에 조 전 부사장은 부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참여연대가 조 전 부사장을 항공법 및 항공보안법 위반 등으로 고발하면서국토교통부와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의 조사가 이뤄졌다. 진짜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국토부 조사 결과 봐주기 의혹이 일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 대한항공의 거짓 진술 강요 폭로 등이 밝혀지면서 결국 조 전 부사장은 새해를 앞두고 항공보안법상 항공기항로변경죄, 항공기안전운항저해폭행죄, 형법상 강요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이 중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만 무죄로 인정됐고 나머지 혐의는 모두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조 전 부사장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지만 지난 5월 항소심 법원에서는 조 전 부사장의 회항 장소가 계류장이기 때문에 변경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며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가을바람 불때
기업들 털린다
 

산업통상자원위에서는 납품단가 후려치기, 골목상권 침해, 독과점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하청·협력업체 특혜 의혹을 들여다 볼 것으로 보인다. 증인 및 참고인 채택 기업으로는 포스코가 꼽힌다. 지난 3월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부패와의 전쟁’ 선언 이후 본격화했던 검찰의 포스코 수사가 5개월째를 맞았지만 ‘몸통 없는 수사’가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수십여명에 달하는 전·현직 임원과 협력사 대표를 구속하며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그나마 최근 12일 포스코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배성로 전 동영종합건설 회장이 검찰에 출석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어 검찰의 수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에 따르면 배 전 회장은 동양종건과 운강건설, 영남일보 등을 운영하며 수십억원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배 전 회장은 TK(대구·경북) 지역의 유력 기업인이자 현재 동양종건 최대주주(지분율 35%)로 포스코 전직 임원들과 유착해 각종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포스코 인도 사업과 관련 동양종건 인도지사가 허위 영수증을 발급해 빼돌린 10억여원으로 현지에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부동산을 구매하는 등 횡령과 특혜를 받은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 메르스, 땅콩 등 도마 위
칼자루 쥔 정무위·산업위 선택은?
 
하지만 최고 결정권자였던 정준양 전 회장의 소환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100억원대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이번 수사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두 번이나 기각되는 등 사실 수사 동력이 약화된 상황이다. 이번 배 전 회장 관련 의혹이 사실로 규명될 경우 수사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감 증인 출석 여부는 아직 검찰 수사 중이란 점에서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산업위는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들도 소환할 것으로 보인다. 대우조선해양은 3조원대의 대규모 영업손실을 내면서 해양플랜트 사상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여파로 최근 부장급과 전문위원, 수석전문위 등 고위직급자 1300여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또는 권고사직을 단행할 방침을 세웠다. 대우조선해양 측은 9월 말까지 구조조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인력 감축과 더불어 부실 경영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는 고재호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과 김갑중 전 부사장에 대해서도 고문 자격을 박탈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은 그동안 2조원대의 누적 손실이 발생했지만 재무제표에 반영하지 않고 공개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갖은 의혹이 제기됐고 전 경영진과 정치권, 금융당국의 과도한 인사 개입 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부실과 관련해 금융감독원은 회사를 상대로 회계감리에 착수할 예정이다. 회계감리는 기업의 재무제표가 의심될 때 금융당국이 직접 분식회계 여부를 조사하는 절차다. 금감원의 조사에서 분식회계가 드러날 경우 대우조선해양은 대규모 과징금과 함께 고 전 사장과 산업은행을 대상으로 검찰이 고발할 수도 있다. 고 전 사장과 산은의 분식회계 공모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선거 앞두고
졸속 우려도
 
현대중공업도 산업위의 국감 참고인 대상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 6월 현대중공업은 ‘잠수함비리’로 사정당국의 수사를 받았다. 잠수함비리의 핵심은 성능이 떨어지는 잠수함을 해운에 인도하면서 평가담당자를 포섭했다는 것이다. 해당 담당자에게는 전역 후 일자리가 제공된 정황까지 포착됐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영관급 장교들이 잠수함을 도입하면서 함체 결함을 눈감아준 뒤 잠수함 건조를 맡은 현대중공업에 취업했다가 뇌물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환경노동위에서는 노동개혁과 관련 기업인들의 증인·참고인 채택 문제가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노사 간 갈등을 보이고 있는 현대자동차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현대자동차 노사는 그간 꾸준히 충돌해 왔다. 최근에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놓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11일 울산공장 본관에서 16차 교섭을 가졌지만 서로의 입장만 확인하고 끝냈다.
 
이밖에도 상임위에서는 아직 거론되지 않았지만 두산그룹은 박용성 전 회장이 국회 호출을 받을 수도 있다. 박범훈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중앙대에 각종 특혜를 주는 대신 뇌물을 건넨 혐의로 박 전 회장이 기소됐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청와대와 재벌 일가가 소유한 대학이 유착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만큼 정치권에서도 관심이 높다.
 
여야는 재벌 기업의 구조적인 병폐에 관해 충분히 다루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재벌개혁 이슈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을 벌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국회가 기업인들을 증인 또는 참고인으로 채택해 국감장에 불러놓고 호통만 치고 끝난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기업인 소환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재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사실상 국회뿐이기 때문에 일단 지켜봐야한다는 게 정·재계의 관측이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올해 국감 분위기는…선거가 우선?
 
19대 마지막 국정감사를 앞둔 가운데 이번 국감이 부실하게 끝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당초 국정감사의 내실 있는 운영을 위해 분리국감이 논의됐으나 현재 여야 원내지도부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에 이어 개정된 국가재정법 등에 따라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 제출 시기가 10일 앞당겨져(9월13일) 국감 일정에 따른 예산안 심사 차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현직 의원들의 마음이 지역구로 향해 있다. 국회 한 관계자는 “다수의 의원들이 국감과 예산안 심사를 빨리 끝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국감보다 중요한 게 선거운동이란 얘기다. 때문에 정책질의 위주였던 국감 질의서도 총선표를 의식해 지역 현안 위주로 바뀔 가능성도 적지 않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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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