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천정배’ 신당로드맵 해부

“새정치연합을 진보 모리배로 몰아야”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무소속 천정배 의원 측의 신당 창당 계획안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유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천 의원 측은 즉각 자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서라며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은 후폭풍에 휩싸였다. 해당 문서에는 신당이 대안정당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을 ‘진보 모리배’로 몰아붙여야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무소속 천정배 의원 측의 신당 창당 계획안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유출돼 공개됐다. 천정배 의원이 오는 9월까지 현역의원 최소 5명가량을 영입해 신당 창당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내용의 문건이다.

의도적 유출?

문건에는 구체적인 시간표까지 담겨 있었다. 이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신당 전략팀은 총 5단계에 걸쳐 창당계획을 세웠다. 오는 8월까지는 창당 명분을 축적한 후 9월에는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1월까지는 전국정당화 조직체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12월까지는 비전과 정책을 완비하고 2016년 1월에는 4월 총선을 겨냥해 창당 및 공천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이들은 오는 9월까지 현역의원 5명을 영입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신당이 5석을 확보하게 되면 다가오는 총선에서 신당 후보들은 동일한 번호를 기호로 부여받을 수 있다. 공통기호를 부여받게 되면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특정번호를 부각시키면 되기 때문에 훨씬 유리하다. 또 신당이 5석을 확보하면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보조금의 액수가 크게 늘어난다.

국고보조금은 구간별로 20석 이상 교섭단체와 비교섭단체 중 5~19석, 5석 미만으로 금액이 크게 갈린다. 4석과 5석은 불과 1석 차이지만 국고보조금은 2배 넘게 차이 난다. 정치권에선 5석을 가진 정당이 가장 실속 있는 정당이라는 말도 있다. 신당이 당장 20석을 확보하기는 무리다. 따라서 5석이 목표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천 의원 측이 자신을 포함해 5명의 현역의원을 모으는데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 중 한 명이었던 안철수 의원조차 신당 창당 과정에서 영입한 현역의원은 송호창 의원이 유일했다. 이외에도 신당전략팀은 언론계와 학계, 재계, 전·현직 정치인 등의 신당 참여 인사를 순차적으로 발표하고 창당 이후엔 새누리당의 지지율을 추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고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신당전략팀이 창당명분의 축적을 위해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을 ‘진보 모리배’(※온갖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사람)로 몰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새정치연합과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이들은 신당 창당을 야권 분열 프레임이 아닌 대안정당의 출범으로 국민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신당의 노선과 이념에 대해 중도개혁노선을 추구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천 의원은 지난 2007년 한미FTA 비준 반대를 위해 무려 25일간이나 단식투쟁을 하는 등 급진적인 진보 인사로 분류된다. 신당전략팀은 천 의원이 과거 급진적 정치활동에 대해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도 했다. 이들은 신당이 합리적 보수까지 포용할 수 있는 열린 진보, 합리적 개혁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 5단계로 구성된 신당 창당계획
천정배신당, 9월에는 윤곽 나온다

신당전략팀은 중도노선을 취하면서 새정치연합의 주류인 친노진영에 대해서는 ‘운동권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아병 세력’ ‘균형 감각을 상실한 세력’이라고 비판할 것을 주문했다. 이들은 중도개혁노선을 추구함으로써 이념적 중간지대의 지지를 얻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건 말미에는 야권 신당 추진세력은 염동연·이철 전 의원 등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당산동팀’과 비공개로 활동하는 기획위원회로 나뉘어 있다고 밝히고, 기획팀에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건은 신당에 참여할 인사 명단에 대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므로 문서로 남기지 말고 당분간 철저히 구두로만 진행할 것”이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천 의원은 이 같은 문서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자신은 이와 관련한 보고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문건의 진위에 대한 진실공방까지 벌어지고 있다. 천 의원 측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문건의 작성자는 천 의원의 선거를 도왔던 사람은 맞지만 핵심인물도 아니고 그런 문건을 작성할 권한도 없는 인물”이라고 깎아내렸다. 신당 추진세력 중심에서 밀려난 인사가 신당 추진세력을 음해하기 위해 이 같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례로 천 의원과의 회동했던 문학진 전 의원은 “중도색채를 강화해 신당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천 의원은 기존 새정치연합보다 개혁적인 야당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 보였다”고 말한 바 있다. 여전히 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신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천 의원이 과거 자신의 급진적 정치활동에 대해 자성하고 중도노선을 취하기로 했다는 문서의 내용은 믿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실제 천 의원의 신당전략팀에서 만든 문건이라고 하더라도 천 의원의 동의는 얻지 못한 단순한 향후 전략 제안 성격의 문서가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있다. 물론 이 문서가 실제 천 의원 측의 신당 창당계획안일 가능성도 남아 있다. 지난 재·보선에서 천 의원의 상임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염동연 전 의원 등은 이미 여의도 부근에 사무실을 연 상태다. 염 전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신당의 설계는 끝났다. 총선에 나설 장수도 확보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문건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천 의원이 중도노선을 취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최근 천 의원이 달라진 정치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한 제안서?

천 의원은 이른바 유승민 사태로 새누리당이 내홍을 겪고 있을 때 “(신당을 창당하면)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도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단순히 천 의원 측을 모함하기 위해 만든 문서치고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타당성이 있다. 문서의 신빙성이 있다”며 “천 의원 측도 동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부문건일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고 평가했다.

어찌됐든 이번 문건의 유출로 천 의원 측의 창당과정은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장 새정치연합과 사소한 의견 대립만 보여도 새정치연합을 진보 모리배로 몰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건의 내용이 앞으로 얼마나 일치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mi737@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심상정 “4자연대, 천정배는 제외”
매력적인 정당 만들기 집중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지난 23일, 총선 대비 진보 결집에서 무소속 천정배 의원과는 함께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심 대표는 “야권이 제대로 혁신이 돼야 정권교체도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새정치민주연합도 혁신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며 “천 의원 같은 분도 혁신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선 우리 당 스스로가 강하고 매력적인 정당으로 거듭 나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토대 위에 혁신의 방향과 의지가 일치되는 세력들과는 과감하게 연대와 협력을 해나갈 생각”이라며 노동당,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와 이른바 4자협의체를 구성할 계획을 밝혔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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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