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시리즈>광역자치단체장 탐구①재선 성공 차기 발판 마련 김문수 경기도지사

“경기도민 사랑 받는 내 이름은 ‘김결식’”

김문수 경기지사는 6·2 지방선거에서 가장 많은 ‘실속’을 챙겼다. 그는 힘든 싸움이 예상되던 범야권 단일후보 유시민 후보를 19만 1600표(4.4%포인트)차로 여유있게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한나라당의 구겨진 자존심을 빳빳이 세웠다. 초접전 끝에 민주당 한명숙 후보를 힘겹게 이긴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와 나란히 비교되면서 김 당선자의 존재감은 더욱 빛났다. 그가 재선을 할 수 있던 것은 재임시절 경기도민에게 줬던 신뢰가 밑바탕 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시 한 번 경기도의 미래를 짊어진 김 지사. 그의 지나온 삶을 되짚어보고 앞으로의 행보에 주목해 봤다.

문중의 별에서 운동권 수배자로…25년 만에 졸업장 취득
대한민국 복지 패러다임 바꾼 ‘위기가정 무한돌봄 사업’


김문수 경기지사는 한국전쟁 이듬해인 1951년,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태어났다. 김 지사의 표현에 따르면 ‘빚 바랜 양반동네’로 유교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곳이다.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도 서당이었다. 그 역시 초등학교 내내 서당에 다니며 ‘사서삼경’ ‘명심보감’을 배웠다.

그의 유년시절은 썩 풍요롭지 않았다. 공무원이었던 부친이 친척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어린 4남 3녀를 판잣집으로 나앉게 하는 비운을 맞았기 때문이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에서 호롱불을 밝혀 놓고 공부할 정도로 그의 배움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고 한다.

부동의  1등
‘문중의 별’

영천군 부동의 1등이었던 재능을 아까워한 선생님의 격려로 경북중학교에 입학한 김 경기지사. 이때부터 경북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이어진 김 지사의 길고 가난한 ‘유학’생활이 시작된다.

경북고등학교 시절 김 지사가 활동한 주 무대는 수양동우회. 도산 안창호의 유지를 받들어 이광수가 만든 유서 깊은 조직이었다. 대구지역 연대 서클이었던 수양동우회에서 사회의식을 키웠던 그는 고 3때 소위 3선 개헌 반대를 주도했다. 경찰 조사를 받던 그는 지지 않고 3선 개헌 반대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결국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대학입시를 몇 개월 남겨놓고 정학이 풀려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분에게 역사적인 막중한 책임이 있다. 이 나라를 위해 함께 나서자!”는 한 선배의 동아리 모집 연설을 들은 그의 심장은 뛰었다. 그길로 사회과학동아리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했다. 운동권 인생의 시발점이었다. 이후 ‘행동하는 운동권’으로 변신한 그는 대학교 2학년 때인 71년 10·15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로 제적당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복학 조치가 내려졌지만 학교에 다닐 마음이 사라진 그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방학교를 조직화해 유신반대를 외쳤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구속,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고초를 겪은 끝에 입학 25년 만에 졸업장을 품에 안게 된다.

노동운동과의 인연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주선으로 구로공단에 취직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김 지사가 맹활약하면서 그가 몸담았던 한일공업노조는 한국의 대표적인 노조로 명성을 날렸다. 이 가운데 그는 출근길에 사복형사 두 명에게 붙잡혀 악명 높았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영장도 없고 구속만료도 없었다. 민주화 분위기 탓으로 다행히 다시 회사로 돌아온 그는 일주일간의 파업을 전개한 끝에 임금 30% 인상을 쟁취하며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노동운동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김 지사는 소위 정화대상자가 돼 삼청교육대로 가야하는 수배자가 된다. 갈 곳 없는 그가 몸을 숨긴 곳은 세진전자 노조지부장을 지냈던 지금의 부인 설난영 여사의 자취방이었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청춘남녀는 한결 가까워졌고 “만인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한 여자를 못 살리겠느냐”는 그의 적극적인 설득 끝에 설 여사에게 결혼승낙을 얻어냈다.

1981년 9월26일. 서울 봉천동 사거리 밑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에서 원피스를 입은 신부와 뿔테 안경을 쓴 깡마른 신랑이 팔짱을 끼고 동시 입장한다. 웨딩드레스도 청첩장도 없는 김 지사와 설 여사의 결혼식이었다.

이날 결혼식장 주변으로 전경버스 다섯 대가 출동했다. 하객보다 경찰이 더 많았던 결혼식. 경찰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시위를 열기 위한 ‘위장 결혼식’으로 의심했던 것이 그 이유다.

이후 김 지사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중당 전국구 후보 3번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 후 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천시 소사구에 출마한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박지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전국적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어진 10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은 김문수라는 이름 석자를 국민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깐깐한 성격, 빈틈없는 논리, 청빈한 생활은 한나라당 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 아니었고 ‘가난한 국회의원’은 어딜 내놔도 상대당의 공격에서 자유로웠다.

그는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폭로하는 등 야당 저격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같은 저력으로 16, 17대 총선에서도 부천소사에서 ‘탄핵역풍’까지 뚫고 내리 3선에 성공한 그는 지난 2006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6월1일 밤 그는 당당히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결식아동 항의에
‘김결식’ 별명 얻어

당선 이후 김 지사는 학교 급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어릴 적 죽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랐던 그에게 학교 급식 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건의하고 당시 신한국당 정책위원회에도 문제를 제기하여 학교 급식법을 세 번이나 고쳐가며 급식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결식아동 급식 예산비를 삭감하려하자 김 지사가 추경 예산안을 조율 중이던 3당 총무회담을 박차고 들어가 “밥 굶는 아이들에게 왜 밥을 주지 않는가.
아이들이 유권자가 아니라고 이래도 되는 거냐”며 거칠게 항의했던 일은 국회의 전설로 남았다. 그 사건 이후 김 지사는 <김결식 의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그는 ‘김문수 스타일’로 불리는 ‘현장 중심 활동’으로 유명하다. 하루에도 몇 곳씩 현장을 찾다보니 4년여 동안 관용차로 23만km를 달렸다. 지구 6바퀴를 돈 셈이다.

“정책은 교과서에 없다. 보고서에도 없다. ‘현장’은 살아있는 보고서이며 교과서다”라고 말하는 김 지사의 못 말리는 ‘현장사랑’은 마침내 그를 ‘김지사’에서 ‘김기사’로 변신하게 했다. “골프를 못 치면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는 충고에도 골프 치는 시간이 아까워 여전히 ‘골프 못 치는 정치인’으로 남은 그가 휴일에 골프채 대신 택시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쇼하지 마라,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는 수군거림을 뒤로 하고 1년 여의 기간 동안 보통 택시 기사와 똑같은 조건에서 택시 영업을 한 김 지사. 하루 12시간씩 핸들을 잡고 총 18번 운행하는 동안 26개 시군을 넘나들며 400여 명의 경기도민을 만났다. “이보다 깊이 도민들과 만나는 방법을 지금까지 나는 찾지 못했다”는 김 지사가 택시 운전석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정책 구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경기도 전체를 한 시간에…수도권 교통 혁명 GTX 추진
골프채 대신 택시 운전대 잡아…국민과 소통하는 정치


그의 대표적인 정책은 수도권 광역 급행 철도(GTX) 건설 사업이다. 최고 시속 200km 로 지하 40m 이하를 달려 일산에서 강남까지 22분, 강남에서 동탄까지 18분 만에 도착하는 GTX는 경기도 전체를 한 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수도권 교통 혁명으로 평가된다.

“세계는 이미 메가시티 패권 경쟁 시대에 돌입했다. 대한민국의 심장 수도권을 경쟁력 있는 메가시티로 키워야한다”고 말해 온 김 지사는 외국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위해 경기도가 선결해야 할 과제는 균형발전의 논리로 50여 년간 적용 돼온 ‘수도권 규제 완화’라고 주장해 왔다.

수도권 규제 완화를 위한 그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은 여의도 면적의 8배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 개발제한 구역 112㎢ 합리적 조정, 상수원 공장입지 제한거리 대폭 축소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김결식>이라는 별명답게 복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복지지원정책부문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한 ‘위기가정 무한돌봄사업’이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취약계층을 ‘무제한·무기한’으로 지원하는 복지 서비스로 법과 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한 가정들을 ‘선지원·후심사’를 원칙으로 지원해준다.

단순한 경제적 지원 뿐 아니라 민간의 풍부한 복지 인프라와 연계한 수혜자 중심의 지속적이고 통합적인 지원을 하는 ‘위기가정 무한돌봄 사업’은 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 17대 총선 공천심사위원장을 거치며 치열한 내부 경쟁을 극복하고 보수진영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 잡은 김 지사는 지금 다시 한 번 경기도의 앞날을 책임지게 됐다.

이에 따라 향후 GTX 사업, 서해안 골드코스트 무한비상, 무한돌봄 사업 등 3대 핵심사업의 추진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GTX사업의 경우 국토해양부에서도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타당성 조사용역에 착수했고 경제적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 현대산업개발 등 3개 컨소시엄에서 국토해양부에 민간투자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와 함께 무한돌봄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2014년까지 총 1977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위기가정은 물론 차상위층까지 자립을 지원할 계획이다.
김 지사는 이를 위해 이미 31개 시·군에 무한돌봄센터를 설치, 찾아가는 복지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경기도 사회복지공제회 확대 지원을 통한 사회복지 종사자의 복지 돌봄을 강화했다. 세부적으로는 가정보육교사 제도 확대 운영, 시간연장 보육시설 확대, 결식아동급식 확대, 중증장애인 연금제도 시행 등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선지원·후심사’ 원칙
‘무제한·무기한’ 지원

또 유니버설스튜디오 코리아 리조트 조성사업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골드코스트 무한비상 사업도 추진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됐다. 현재 송산그린시티 내 동측 부지 132만평에 테마파크, 씨티워크, 워터파크, 콘도미니엄을 건설해 2014년 개장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와 함께 항공산업 육성, 평택항 개발 및 국제물류기지 건설사업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제 김 지사는 경기도 발전을 위한 움직임에 두 번째 걸음을 뗐다. 앞으로 그의 행보에 경기도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프로필

<주요 경력>
·1951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 중·고등학교 졸업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 입학 후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제적과 투옥 후 25년 만에 졸업·도루코 노조위원장, 서노련 등 노동운동 ·1986년 5.3 인천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2년 5개월 복역 ·제15, 16, 17대 국회의원 (경기도 부천 소사) ·한나라당 제1 사무부총장, 기획위원장, 공천심사위원장(17대 총선) ·2006년 민선4기 경기도지사


<수상. 자격증>
·1996년~2005년 10년 중 9년 의정활동 국정 감사 최우수의원 선정 ·1999년 결식아동 돕기 의정활동 공로패 수상  ·2006년 국회 출입기자단 선정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 ‘일 잘하는 국회의원 1위’ ·2007, 2009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 민선4기 광역자치단체 공약 이행도 평가 1위 ·2007, 2009년 포브스 경영품질대상 공공혁신 부문, 리더십 부문 대상수상 ·환경관리기사, 열관리 기능사 등 국가 자격증 9개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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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황하나 ‘경찰 야당’ 의혹

[단독] 황하나 ‘경찰 야당’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김성민 기자 =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가 스스로 입국한 지 이틀 만에 구속됐다. 도주의 우려가 크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경찰은 약 2년간 황하나의 해외 이동 경로를 추적해 왔다. 지난해에는 은거하던 장소를 특정했다. 일부러 검거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던 이유다. 정보기관 안팎에서는 그간 황하나가 경찰에 마약 관련 정보를 제공해 왔다고 보고 있다. 황하나는 지난해 초 돌연 태국으로 출국했다가 육로를 통해 캄보디아로 밀입국했다. 경찰은 공식적인 입국 기록이 없었기에 국내로 데려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황하나가 어떤 범죄에 연루됐는지 행적만 추적할 수 있었다. 은신처 알고도… 경기 과천경찰서가 황하나를 추적하기 시작한 건 지난 2023년부터다. 같은 해 황하나가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지인 2명과 필로폰을 매수해 투약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과천경찰서는 그의 해외 이동 경로를 추적했다. 압박감을 느낀 황하나는 2023년 12월 갑작스레 태국으로 출국했다. 황하나는 당시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태국에 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왔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난해 5월 인터폴 청색수배 대상이 된 황하나는 육로를 통해 캄보디아로 밀입국했다. <일요시사> 취재와 정보기관이 파악한 내용을 종합하면, 황하나는 망고·태자 단지 배트남계 보이스피싱 조직 간부 또는 자금 세탁범들과 어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캄보디아 카르텔에 20~30대 한국인 여성들을 공급해 성접대를 강요한 원정 성매매 알선 의혹을 받는다. 지난 24일 오전 2시 황하나는 캄보디아 프놈펜 태초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대한항공 항공기에 탑승했다. 경찰은 캄보디아로 건너가 현지 영사와 협의를 거쳐 항공기 내에서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5시간 후 과천경찰서 수사관들은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한 황하나를 압송했다. 황하나는 “해외로 수차례 한국 여성들을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이냐?” “마약 유통과 투약 혐의를 인정하느냐?” “자진해서 입국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일요시사>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황하나의 성매매 알선 의혹을 들여다보지 않던 과천경찰서는 갑자기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본래 황하나의 성매매 알선 의혹은 다른 청에서 내사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과천경찰서는 황하나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관련 의혹을 캐물을 방침이다. 태국·캄보디아 전전…갑자기 자진 입국 밀입국 이후 1년 넘게 고급 호텔서 생활 황하나는 이달 초 경찰 측에 자진 입국 의사를 밝혔다. 2년 가까이 해외 도피 생활을 하다 갑자기 말이다. 캄보디아에서 출산한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입국했다는 게 황하나의 입장이다. 그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캄보디아에서 출산한 아이를 제대로 책임지고 싶어 스스로 귀국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마약 투약 혐의도 “필로폰을 투약한 사실이 없고 지인에게 투약해준 적도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수원지법 안양지원 서효진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황하나가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며 수사를 피해 온 점과 동종 범죄 전력이 있는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보기관은 황하나가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입국했다는 주장에 대해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캄보디아에 밀입국한 정황이 있고 1년 넘게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갈 정도로 자본적 여유가 충분했다는 게 근거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최소한 아이를 키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생활하진 않았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더 나은 환경일 순 있겠지만, 황하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현재 아이의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다거나 캄보디아에서 끼니를 굶을 정도로 생활력이 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황하나의 자진 입국이 과천경찰서와의 사전 조율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 황하나가 이달 초 과천경찰서 측에 변호사를 통해 자진 입국 의견을 전달하긴 했으나 이전부터 그가 수사기관의 ‘야당’ 역할을 해왔다는 게 골자다. 정보기관 “아이 때문에? 신빙성 부족” 마약 정보 제공 ‘플리바기닝’ 노리나 실제 황하나는 경찰 측과 직접 연락하거나 측근을 통해 특정 인물들에 대해 ‘마약을 투약했다’ ‘한국으로 유통하는 것 같다’는 등의 정보를 전달해 온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곧 황하나에 대한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플리바기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공범에 대해 증언하는 조건으로 검찰이 구형량을 낮춰주거나 불기소 처분하는 것을 일컫는다. 검찰뿐만 아니라 경찰도 수사 과정에서 협상의 일종인 ‘플리바기닝’을 피의자에게 제안하기도 한다. 이미 검거한 마약사범을 통해 상위 공급책을 잡으려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검찰은 지난 10년간 플리바기닝 제도화를 추진했지만, 오·남용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막혀 추진하지 못했다. 추적이 어렵고, 증거 확보가 어려운 범죄가 늘고 있어 플리바기닝 공식 제도화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한 마약 전문 변호사는 “플리바기닝은 수사기관의 오랜 관행이다. 마약범을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허위 진술이 내재돼있을 가능성이 있어 간혹 마약범에게 억울한 혐의가 추가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황하나를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는 입장이다. 지난해부터 캄보디아 당국에 황하나의 위치를 파악했으니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이유 경찰 관계자는 “황하나가 밀입국했기 때문에 캄보디아 입국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캄보디아에 있으니 잡아달라고 할 수 없었고 거주지를 특정한 이후 협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며 “캄보디아 당국이 한국 경찰에 비협조하는 일이 빈번한 건 사실이지 않나”고 반문했다. 다른 경찰 관계자는 “황하나 측과 연락했던 건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설득의 과정이었다”며 “일부 마약 관련 정보를 들은 경찰도 있겠지만 황하나를 비호해 온 것처럼 보인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