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떠나는 세상 여행

교통카드 달랑 한 장만 들고 떠나요!

용산역 ‘이벤트광장’·서울역 ‘열린콘서트홀’ 등 공연
경복궁·한옥마을 등 역사기행·맛집 찾는 재미도 쏠쏠
시민들 호응 커 지역 문화공간으로 거듭나
청계천·습지공원 등 휴식공간으로 다양화


지하철은 정확한 이동 수단인 동시에 저렴한 여행 수단이기도 하다. 런던, 파리, 도쿄, 홍콩 등 지하철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매년 수 만명에서 수십 만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어 지하철을 이용해 자유 여행을 즐기고 있다. 이들 유명 도시 못지 않게 서울 지하철도 일찌감치 유용한 여행 수단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교통 체증 걱정도, 기름 값 걱정도 없이 지하철 노선도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는 ‘지하철로 떠나는 여행’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문화·예술이 흐르는 지하철

1호선 용산역 ‘이벤트광장’과 서울역 ‘열린콘서트홀’에서는 1년 내내 클래식이나 오케스트라 공연, 뮤지컬 등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공간이 상대적으로 협소한 을지로입구역, 사당역, 서울대역, 선릉역 등 지하철 역사 7곳에도 상설 문화예술 공간이 자리잡아 시민이 참여하는 쌍방향 문화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있다. 재즈연주자, 국악연주자, 포크송 가수, 오카리나 연주자, 마술 공연, 어린이 밸리댄스단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지하철 예술 무대에 올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5호선 광화문과 공덕역 등에 자리한 상설 공연장에서도 포크송 라이브 공연과 연극, 노래,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이 선보인다.

3호선 남부터미널역은 과거 화물 터미널로 사용됐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예술의전당과 가까운 역’이라는 점을 강조해 벽화에 ‘문화와 예술’을 담았다. 우리 민족 춤과 국악 연주를 표현한 ‘국악 연주도’와 ‘민속춤’을 타일로 표현했다.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을지로3가역은 과거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역 이름을 지었다. 2호선과 3호선을 갈아타는 길목에는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도’를 커다랗게 그려 넣어 웅장한 기운을 느끼게 해 준다.

4호선 미아삼거리역은 원래 장위동과 종암동, 돈암동 세 방면으로 갈라지는 지형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밤나무가 많아 ‘밤나무골’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승강장 벽면에는 색유리로 화려하고 추상적인 ‘밤나무골’을 그린 벽화가 있다.

3호선 교대역은 인근에 서울교육대학교가 있어 ‘교대역’으로 불린다. ‘교육의 중심지’라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이 역에는 ‘훈민정음’과 ‘서당풍경’이 벽화로 표현돼 있다. 

5호선 김포공항역 에스컬레이터 옆 노란 벽면의 ‘직녀가 꿈에서 본 그림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전승 놀이인 칠교판 놀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6호선 동묘역은 천장에 수 십개 연이 매달려 있다. ‘연’이라는 주제의 작품으로 대보름 연 놀이를 통한 무한한 꿈과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5호선 왕십리역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과 희망을 엇갈린 명암으로 표현한 ‘노래하는 색’을 벽면에 전시했다.

역사기행

1호선과 3호선, 5호선이 연결되는 종로 3가역에는 종묘와 창경궁이 자리한다. 그리스 아테네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대한민국 서울에는 종묘가 있다. 이 두 건축물은 모두 신(神)을 기리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3년(1394년) 12월에 착공, 이듬해 9월 완공됐다. 완공 직후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창경궁은 15세기 성종 때 3명의 대비(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모시기 위해 세운 궁궐로 종묘와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충무로역(3호선과 4호선 교차)에 내리면 남산골한옥마을과 남산을 구경할 수 있다. 남산골한옥마을은 조선시대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한양 5경’으로 불렸던 곳으로 정자와 연못, 나무로 꾸며진 전통 정원에 한국의 전통가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서울의 랜드마크인 남산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면서도 각종 동식물이 살고 있는 생태 공원으로 충무로역에서 내려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3호선 안국역에서는 운현궁, 북촌한옥마을, 창덕궁을 모두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운현궁은 조선 고종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인 동시에 흥선대원군의 정치 활동 근거지였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북촌은 조선시대에 왕족이나 고관대작이 거주했으며 860채의 한옥이 밀집된 고급 주거지였다. 지금의 북촌은 도심 주거에 맞게 개량된 한옥들과 박물관, 공방 등이 모여 있다. 부적과 민화를 볼 수 있는 ‘가회박물관’, 북촌에서 수집한 근대의 생활물건을 전시한 ‘북촌생활사박물관’ 외에도 ‘세계장신구박물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3호선 경복궁역은 역 이름처럼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 유적지를 볼 수 있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 북쪽으로는 북악산이 둘러싸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져 있다.

1호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동구릉은 1408년 조선 태조의 건원릉터로 쓰인 이후 9기(基) 17위(位)의 왕과 왕비를 안장한 곳이다. 건원릉, 현릉(문종과 비 현덕왕후), 목릉(선조와 비 의인왕후), 휘릉(인조의 계비 장령왕후), 원릉(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유릉(익종과 신정황후) 등 9개의 능이 있다.

지하철역 인근 도심 휴식 공간

5호선 광화문역에서 만날 수 있는 청계천은 서울 강북의 중심가를 흐르는 10.92㎞의 하천이다. 지난 2005년 복원 공사를 마친 후 물길이 다시 열려 지금까지 7600만명의 관광객과 시민이 찾았다. 시작점인 청계 광장에서 4m 높이의 2단 폭포를 따라 내려가면 저마다 사연을 가진 다양한 다리와 조형물이 가득하다.

2호선 당산역의 ‘선유도 공원’은 정수장 건축물을 재활용해 국내 최초로 조성된 환경재생 생태공원이자 ‘물 공원’이다. 선유도 일대 11만407㎡의 부지에 수생식물원, 환경놀이터 등을 조성해 다양한 수생식물과 생태 숲을 감상할 수 있다. 양화지구와 연결된 선유교, 안개분수, 월드컵 분수 등 아름다운 한강의 모습이 보인다.

2호선 뚝섬역의 서울 숲은 서울의 센트럴파크 같은 곳이다. 동물이 서식하는 생태 숲, 잔디밭, 곤충식물원 등이 있으며 연중 무휴 24시간 개방돼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

5호선 방화역의 ‘강서습지 생태공원’은 한강변 생물들의 서식처를 보존해 동식물의 모습을 관찰, 학습하도록 조성된 공원이다.
한때 쓰레기더미의 대명사였던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난지도는 10여 년의 복원 작업을 통해 지난 2002년 생태공원으로 거듭나 현재 ‘하늘공원’과 ‘하늘다리’ 등 다양한 휴식 공간을 갖추고 있다.

지하철에도 아름다운 휴식 공간이 있다. 6호선 녹사평역은 돔 형태의 유리 지붕으로부터 지하 공간까지 눈부신 자연 채광이 쏟아져내려 마치 유리 궁전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건축물이 아름다워서 역사 내에 자리잡은 넓은 홀은 결혼식장으로도 사용된 전례가 있을 정도다. 영화 <말아톤>이나 드라마 <천국의 계단> 촬영장으로도 활용됐던 이 곳은 독서 마당, 수족관 등 다양한 문화 인프라도 갖추고 있다.

3호선 옥수역도 내부 구조가 아름다워 드라마나 한강의 촬영지로 자주 소개된 곳이다.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도 옥수역의 매력 포인트. 특히 밤에 찾으면 한강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끽할 수 있어 사진 작가들의 촬영 포인트로도 인기가 높다.

지하철 이용한 골목 구경

3호선 안국역 근처의 가회동 31번지 북촌한옥마을. 한옥들이 지붕 처마를 맞대고 있는 풍경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 준다. 좁아졌다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기를 반복하는 골목의 연결을 따라 떠나는 여행은 서울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 2호선 시청역에서 가까운 정동 돌담길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던 곳이다. 번화한 도심이 생겨나고 대로가 만들어져도 이곳 돌담길이 주는 추억은 더 없이 소중하다. 인근에 정동 극장과 정동 교회, 구 러시아 공관 터, 시립미술관 등 문화와 역사가 깃든 곳들이 많다.

4호선 회현역에서 내리면 온갖 물건들로 가득찬 남대문 시장에 다다른다. 이 곳에는 상품 말고도 남대문 갈치조림 골목이 있다. 10여 군데 갈치조림 식당이 성업 중이며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희락’과 후발 주자로 단골들을 두고 있는 ‘내고향 식당’이 특히 유명하다. 골목은 좁고 지저분하지만 서민의 애환이 묻어나는 대표적인 맛 골목이다.


지하철 타고 만나는 자연

1호선 오산대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물향기 수목원’은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연 면적 33만㎡ 규모의 대단지에 수생 식물 1600여 종류를 조성한 곳이다. 도심지에서 보기 드물게 자연 생태계가 숨 쉬는 습지 생태원 등이 자리해 수도권 시민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있다.

중앙선 양수역에서 도보 5분인 세미원은 물과 꽃의 동산이다. 장자의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 물을 보면서 마음을 깨끗이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에서 이름을 따온 세미원은 연못마다 아름다운 연과 부들, 창포가 가득하며 실내 온실 ‘석창원’에서는 연중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중앙선 끝 자락에 위치한 국수역에서 택시로 5분 거리에 있는 들꽃 수목원은 남한 강변에 자리한 국내 유일의 강변 수목원이다. 야생화 단지, 허브 정원, 자연 생태 박물관, 식물원 등 다양한 자연 체험 공간이 조성돼 있다.

4호선 오이도역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가면 시화호에 도착한다. 시화호는 한때 ‘죽음의 호수’로 기피 대상이었지만 갯벌 생태계가 살아 숨쉬는 ‘생명의 호수’로 재탄생했다. 경기도 시흥시, 안산시, 화성군 2개 시와 1개 군에 걸친 넓은 갯벌 지대의 탁 트인 전경은 일품이다.

1호선 인천역에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월미도는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후 문화예술의 장, 공연놀이 마당 등으로 탈바꿈했다. 카페, 회 센터 등이 바닷가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찾는 이들이 많다. 월미도 관광용 모노레일(일명 ‘월미 운하레일’)이 예정대로 오는 7월 개통하면 지하철을 이용한 인천 여행은 보다 즐거워질 전망이다. 모노레일은 인천역 주변에서 출발해 월미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인천역으로 돌아오는 6.3㎞의 순환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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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