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바리 전쟁 터진 전주 조폭 대해부

'6개파 150명' 목숨 걸고 복수혈전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최근 전북 전주에서 발생한 폭력조직간 살인사건을 두고 지역적인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한옥마을의 붐 등으로 타지인의 유입이 활발해진 전주는 오랜 세월 '토호조폭'이 유흥가를 장악해왔다. 경찰은 "개인 간의 감정 문제"라며 선을 그었지만 그 이면에는 결혼식장을 둘러싼 오랜 영역다툼의 가능성도 있다. 전주 조폭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해봤다.

지난달 23일 전주의 양대 조직폭력 원로들이 비밀 회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전주시내 도심에서 일어난 조직폭력배 피살사건을 두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접선했다. 앞서 전주 월드컵파 실세인 최모씨는 오거리파 행동대원 또 다른 최모씨를 말다툼 끝에 흉기로 살해했다.

양대조직 원로
비밀리에 만나

용의자가 속해있는 월드컵파의 원로는 화해자리를 주선한 나이트파 원로와 같은 날 오후 5시께 전주 모처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단 이 자리에 오거리파 원로가 참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중 규모 면에서 가장 큰 조직은 월드컵파이며, 그 다음이 나이트파, 세 번째가 오거리파라고 경찰은 전했다.

나이트파가 비밀회동을 주선한 배경으로는 살인사건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꼽혔다. 지난 22일 낮 결혼식장에서 월드컵파 최씨는 일부 오거리파 조직원이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무랐다. 그러자 오거리파 최씨는 "왜 우리 애들에게 시비를 거냐"며 최씨에게 맞섰다.

양측의 말다툼은 주먹싸움으로 번질 태세였다. 이때 중재에 나선 인물이 나이트파 간부급 조직원으로 알려진 A씨다. 해당 조직원은 두 최씨의 화해자리를 주선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들은 다시 시비가 붙었다. 끝내는 칼부림이 일어났다.


이날 오후 9시께 중화산동 한 명품관 앞에서는 날카로운 흉기에 우측 가슴이 찔린 오거리파 행동대원 최씨가 발견됐다. 최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 등의 원인으로 숨졌다. 숨진 최씨를 찌른 월드컵파 최씨는 사건현장에서 바로 도주했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최씨를 포함한 건장한 체격의 남성 5명은 술집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 건물 옆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자주 오고가는 도심 한복판이었지만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큰 소리가 나더니 그곳에선 5분 만에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범행 직후 최씨는 상대조직원을 살해할 당시 흉기를 건넨 추종세력(43·살인방조 등)은 놔두고 동료조직원(41·범인도피 등)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피신했다. 강남 한 식당에서 최씨는 일행 및 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이로부터 이틀 뒤 최씨를 제외하고 범행에 가담한 모든 인물이 자수하거나 체포됐다. 이들 중 일부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구속을 면치 못했다. 그 사이 최씨는 경기도로 이동했다가 전주를 다녀가는 등 대담한 도피 행각으로 경찰을 괴롭혔다. 사건이 자칫 장기화될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경찰서로 걸려왔다.

지난달 29일 전주완산경찰서는 최씨로부터 자수 의사를 확인했다. 오후 4시30분께 경찰서로 연락한 최씨는 "자수를 할 테니 저녁 무렵 효자동에 있는 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실제로 최씨는 자택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강력계 형사들은 오후 8시20분께 최씨를 검거했다.

최씨는 경찰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 일행과 술을 많이 마셨다. 같은 동네 선후배이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내가 왜 흉기를 휘둘렀는지 모르겠다. 흉기로 최씨를 찔렀다"고 진술했다. 구치소에 수감된 최씨는 변호사를 선임해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붙잡은 최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사건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이번 살인사건에는 전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폭력조직이 모두 연루됐다. 사건 당일 두 최씨가 찾은 결혼식장에선 나이트파 조직원의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결혼식과 관련해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렸다. 사람이 죽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했다. 관련한 내막을 살피기에 앞서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폭력조직의 현황을 확인해보기로 하자.


시내 도심서 일어난 폭력배 피살사건
월드컵·나이트·오거리파 비밀 회동


전주에는 모두 6개 폭력조직(월드컵파, 나이트파, 오거리파, 타워파, 북대파, 중앙시장파)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1983년 이후 결성됐다. 규모는 150여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월드컵파는 작은 폭력서클로 시작해 전주 중앙동을 거점삼아 성장했다. 1980년대까진 중앙동에 있는 '월드컵 나이트클럽'이 주된 수익원이었다. 월드컵파의 대항마로 결성된 조직은 나이트파다. 나이트파는 전주관광호텔을 무대로 성장했다.

오거리파는 당시 상가와 주점 등이 밀집해 있던 '오거리'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타워파와 북대파는 각각 금암동을 거점으로 결성됐다. 중앙시장파는 비교적 최근 생겨났으며, 시장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30년 넘게 조직을 이끌고 있는 각 조직 보스와 부두목, 행동대원 등은 대부분 폭력전과가 있다. 이 가운데는 전과 10범이 넘는 보스도 있다. 두목들의 나이는 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로 전해진다. 큰 두목들은 외형상 자영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회장님'으로 불린다.

일부 보스들은 서울과 경기, 충남 등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간부는 수배 중이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에 따르면 타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보스들은 정기적으로 전주에 내려와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 보스가 수감 중인 경우에는 부두목 등이 대리로 조직을 움직인다.

행동대원은 조직원 가운데 활동이 가장 왕성한 중간급인 30∼40대 조직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뒤 보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고급 세단을 끌고 다녔던 이들은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과거만큼의 세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경찰은 밝혔다. 1980년대만 해도 조직 간의 '나와바리(구역) 싸움'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됐다.

지역경기 어렵자
잔혹범죄 증가해

자금을 만들기 위해 조직원들은 '업소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구역에 있는 업소에서 월정금을 뜯었다.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하는 타 조직원은 거침없이 응징했다. 특히 월드컵파와 나이트파의 세력다툼은 선혈이 낭자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유혈 난투극은 끊이지 않았다.

전주 한성여관 살인사건, 명동여관 살인사건 등 이들의 나와바리 싸움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1984년 무렵 전주백화점을 중심으로 유흥가를 양분했으나 이후에도 크고 작은 세력다툼을 벌였다. 6년 후에는 '서울 강남병원 응급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검·경의 수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각 조직원들은 하나둘 서울로 향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전주의 지역 경기가 어려워진 것도 상경의 한 이유였다. 경찰이 단속의 고삐를 죄자 자금줄이었던 업주 월정금이 자취를 감췄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이들은 전주를 넘나들며 불법을 일삼았다.

지난해 충남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수십억원대의 도박판을 벌인 혐의로 월드컵파 조직원 홍모씨 등 9명을 구속했다. 홍씨 등은 대전 유성구 송정동의 한 식당을 빌려 회당 수백만원씩 이른바 '아도사키' 도박판을 벌이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망을 보는 '문방'과 높은 이자로 돈을 대주는 '꽁지' 전문 도박꾼을 관리하는 '총책' 등 역할을 나눠 회당 70여명을 도박판에 끌어들였다. 월드컵파는 대전의 지역 조폭과 연계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해 전주 조폭 김모씨는 주류사업에 투자하면 거액의 이익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수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됐다. 김씨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지인 B씨 등 3명에게 4억4000만원의 투자금을 받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기간 김씨는 "빌려준 돈을 달라"고 말한 채무자를 폭행해 부상을 입힌 혐의도 함께 받았다.

보복폭행에 살인까지 '피 튀는 싸움'
심상찮은 동향…80년대부터 이권다툼

지난달 전주에서 만났던 한 지역사업가는 "영화제나 한옥마을로 외식·숙박·유흥업이 잘되면서 서울 자본이 대거 지역으로 유입됐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전주 조폭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돈이 달린 조폭 중 일부는 끔직한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지난 2012년 한 전직 조폭은 현직 조폭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사건 발생장소는 중화산동에 있는 번화가였다. 이번 살인사건 현장과 멀지 않은 곳으로 확인된다. 전직 조폭은 "돈이 없다고 날 무시해 친구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올해 초에는 자신과 동거한 10대 여중생을 살해한 조폭이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가 있었다. 30대 초반인 박모씨는 전과 40범으로 교도소 출소 후 노래방 도우미를 알선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박씨는 동거녀 C양(15)에게 도우미 일을 종용하다가 C양이 이를 거부하자 병원로비에서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박씨는 아파트 19층 아래로 투신했다.

조폭과 가까운 전직 경찰 관계자는 "여자가 낀 사업을 조폭이 포기할 수 없다"며 "특히 결혼과 관련한 사업에도 조폭이 진출해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일례로 결혼정보업체를 가장한 성매매 알선·공급세력을 꼽기도 했다.


전주의 경우 채무 갈등을 겪던 한 예식장 사장이 채권자 2명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있었다. 숨진 사장은 자신과 안면이 있는 조직을 움직여 채권자 D(55), E(44)씨를 살해했다.

조폭 출신으로 알려진 D씨 등은 앞서 사장을 두 차례 납치·폭행하는 등 "돈을 내놓으라"며 협박했다. 이에 사장은 조폭인 아들까지 동원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후 사장과 두 채권자는 모두 1t 냉동탑차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운전석에는 '채권자 두 명을 먼저 보내고 나도 뒤따라 생을 마감하겠다'는 내용의 유서가 있었다. 조직 간의 처절한 생존 암투였던 셈이다.

전주 조폭은 유독 결혼식장에서 사고를 일으켰다. 몇 년 전 서울 한 웨딩홀에서 서울 조폭과 시비가 붙었을 때는 전주 조폭의 웨딩사업 진출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이번 사건 역시 과거 예식장을 둘러싼 앙금이 쌓였다가 터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경찰은 "조직 간의 충돌이 아니라 개인 간의 감정 문제가 발단이 된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자수 앞두고
무슨 꿍꿍이

최근 조폭을 겨냥한 대대적인 단속이 부활한 가운데 양대 두목의 비밀회동은 중요한 포인트를 시사한다. 경찰의 칼을 빌려 군소조직을 정리하려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조폭을 추종하는 F씨는 "곧 나와바리 전쟁이 불붙을 수 있다"며 의견을 전했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전국구 접수' 전주 월드컵파 거물 두목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지난 8월 660억원 규모의 면세담배 유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의 중심에는 전주 월드컵파 조직원 김모(39)씨가 있었다. 김씨는 담배 구매업자, 무역업자 등과 공모해 면세담배 2933만여갑을 빼돌렸다. 김씨는 밀수한 담배를 국내로 유통한 총책이었다.

월드컵파는 전주 나이트파와 더불어 전북 지역 최대조직으로 꼽힌다. 시기상으로 월드컵파가 먼저 결성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나이트파가 생겨났다고 한다.

전성기 때 조직원은 100명 남짓해 그리 크지 않은 규모다. 하지만 월드컵파가 전국구에 준하는 명성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두목 주모씨의 화려한 이력이다.

주씨는 지난 범죄와의 전쟁으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검찰은 주씨에게 범죄단체 수괴죄를 적용했다. 당시 검찰의 기소 내용을 보면 주씨는 상당한 '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주씨는 1980년대 전북승마협회 부회장직을 맡아서 사회고위층과 어울렸다. 1987년 4월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인 일명 '용팔이사건'에 연루되는 등 정치권과 연을 맺었다.

지역에서는 골재채취회사 등을 운영하며 사업가 행세를 했지만 88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서울 강남·이태원 일대 유흥가에 진출했다. 주 수입원은 슬롯머신 사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월드컵파는 경쟁조직을 제거할 목적으로 강남 모 병원 응급실에서 나이트파 조직원을 무참히 살해했다.

월드컵파는 소규모 폭력서클로 출발했다. 전주 완산구에 있는 나이트클럽 '월드컵'을 접수하면서 월드컵파란 이름을 갖게 됐다. 월드컵파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부두목 김모씨의 역할이 컸다. 김씨는 일대 어느 조폭보다 폭력적이며 잔인했다고 한다. 김씨의 '주먹'에 힘입어 주씨는 일대 상권을 손쉽게 거머쥘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몸집을 불린 나이트파와는 수차례 칼부림을 벌여 수십명이 죽거나 다쳤다. 1983년과 1984년 연이어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1989년에는 보복살인이 오가며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월드컵파 조직원 4명은 나이트파 두목 김모씨의 친구에게 가스총을 쏘는 등 충격적인 범행으로 시민을 경악시켰다.

1990년 8월 주씨의 구속 후 월드컵파의 외형은 급격히 축소됐다. 그러나 일부는 서울과 경기로 거주지를 옮겨 아직도 폭력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로 자영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개별 조폭들이 정관계와 유착해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실제로 지난 2005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월드컵파가 모 정치인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대법관에 오른 변호사는 월드컵파 두목 주씨를 변호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또 월드컵파 조직원은 수감생활 중 알게 된 교도관을 꾀어 수억원을 투자받은 뒤 반환을 요구하는 교도관을 폭행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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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