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계 떠도는 ‘에이즈 괴담’ 추적

사라진 에이즈녀 “6년간 레지로 일했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그동안 풍문으로 떠돌던 ‘에이즈 괴담’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에이즈감염 사실을 알면서도 여성과 동거하며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의 충격적인 행태가 밝혀졌다. 사라진 에이즈녀의 미스터리한 6년간 행적도 도마에 올랐다.

 
지난 1일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면서도 12세 초등학생을 성폭행했던 20대 남성이 교도소 출소 후 또다시 장애여성을 성폭행해 구속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조사부는 지적장애 3급 여성 ㄱ씨를 유인해 성폭행한 혐의(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에이즈예방법 위반)로 이모(26)씨를 구속기소했다.

감염 사실
알고도 ‘쉿’
 
검찰에 따르면 에이즈에 감염된 이씨는 지난 2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알고 지내던 ㄱ씨와 만나 “집에 가지 말고 같이 놀자”며 ㄱ씨를 인천시 남동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씨의 동거녀 박모씨는 ㄱ씨에게 청소와 집안일을 시키며 욕하고 때렸다고 전해진다. 이씨는 박씨가 잠든 사이 ㄱ씨를 강간했고, 박씨의 동네 후배인 최모씨와 손모씨도 이씨의 집을 매일같이 드나들며 ㄱ씨를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감금돼 있던 ㄱ씨는 간신히 할머니와 연락이 닿아 경찰에 신고해 이들에게서 벗어났다. ㄱ씨는 현재 임신한 상태다. 보통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경우 중절수술을 받을 수 있지만 수술시기를 놓쳤다. ㄱ씨의 변호인은 ㄱ씨가 에이즈 검사 결과 음성판정을 받았지만 잠복기가 있어 아직 안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씨의 동거녀 박씨의 동네 후배 최씨와 손씨는 현재 각각 특수절도 등 다른 범죄로 붙잡혀 각각 교도소와 소년원에 수감 중이며 그곳에서 성폭행 혐의에 대한 수사를 받고 있다. 동거녀 박씨는 관할 검찰청으로 이송됐다. 검찰은 최씨 등과 동거녀 박씨의 에이즈 감염 여부에 대해서는 “개인 정보라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앞서 이씨는 군 입대 후 훈련 중 에이즈 감염 사실이 드러나 퇴소 조치된 바 있다. 이씨는 2010년 7월 경남 창원에서 초등학생(당시 12세)을 성폭행했다. 당시 그는 1심 창원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2심 부산고법은 징역 2년으로 감형해줬다. “성적 욕구를 억제하며 지내다가 피해자가 자신을 잘 따르며 좋아하자 성적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는 사유였다.
 
이씨 본인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면서도 범행을 저지른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후 인터넷커뮤니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는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그런데 이씨는 2012년 8월에 출소해 전자발찌를 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ㄱ씨를 성폭행했다. 에이즈 감염자로 성범죄 전과까지 있는 이씨의 재범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문제를 통합관리 할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국내 에이즈 감염자는 총 8362명(2013년 기준)이다. 지난해에만 1114명이 새로 감염돼 하루 3명씩 감염되고 있어 새로운 관리체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법상 에이즈 예방과 관리 대책은 부실한 형편이다. 에이즈 감염자에 대해 의료기관은 일정기간 간단한 진료만 하고, 관할 보건소는 주거 사실만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는 게 현실이다. 감염자들이 주소지에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더라도 관할 보건소가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다.
 
앞서 지난 4월에는 6년간 행방불명이었던 여성 에이즈 환자 A(37·여)씨가 보건 당국의 관리를 받지 못한 채 지내다가 경기도 가평군에서 에이즈 합병증인 폐렴으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A씨는 21세였던 1998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 사실이 확인돼 거주지인 관할 안동시보건소에서 관리 대상자로 선정됐다.
 
이에 A씨에 대해서는 3개월에 한 번 꼴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식으로 추적 관리가 이뤄졌다. 그러던 중, 2008년 A씨와 연락이 두절됐고, 행방불명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이후 A씨는 10년간 보건당국의 관리 밖에서 무방비 상태로 지내다 에이즈 합병증인 폐렴으로 숨졌다.
 
감염 사실 알면서도 동거생활

불특정 다수 여성들도 성폭행
 
과거 A씨를 추적 관리했던 안동보건소 관계자는 “본인(A씨)이 주민번호를 말소 시키고 번호를 바꿨기 때문에 찾을 방법이 없었다”며 “당시 직원들이 그녀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했다. 안동보건소 측은 과거 A씨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2008년 들어 통화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질병관리본부 에이즈결핵관리과 관계자는 “당시 에이즈 환자의 과도한 관리규제와 인권침해 요소가 지적되면서 2008년부터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 개정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전부터 에이즈 환자들의 불만이 컸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2008년 이전에는 감염인이 입·퇴원할 때와 거주지를 옮길 경우 보건소장에게 신고하도록 했다”며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이런 의무가 전면 삭제돼 감염인을 추적관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감염인 사체 검안 및 사망자에 대한 신고의무만 있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A씨가 숨지기 직전까지 가평군의 ‘아는 언니’가 있는 한 다방에서 지냈다는 점이다. 이 다방 업주는 A씨가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하지는 않았고, 다방에서 일하는 언니를 만나러 왔다가 머물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1998년 9월, HIV 감염 사실을 확인했다. 성관계에 의한 감염이었다. 그녀의 최종상담 기록은 2007년 10월19일이다. 가평보건소 관계자에 따르면 A씨는 분명 가족과 함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방에 머문 이유는 무엇일까.
 
A씨는 한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뒤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그녀는 거주지인 관할 안동보건소에서 꾸준히 관리를 받으면서 약물도 복용했다. 그녀는 나이 21세 때의 일이다. A씨는 2007년까지 안동에 머무른 것으로 파악됐다. 경제활동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방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20∼30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가평군 관계자에 따르면 A씨는 다방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 단지 아는 언니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있다고 알려진 그녀가 꾸준히 다방을 출입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녀는 과거 취업 준비 시 필요했던 건강검진진단표를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에이즈 감염 사실이 사측에 알려지면 취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가 자연스레 화류계로 빠졌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감염자들 동선
제대로 관리되나
 
A씨가 생전에 다방을 출입했다는 소식에 화류계 한 관계자는 “보통 다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거 화류계에 몸담았던 여성”이라며 “특히 ‘아는 언니’를 통해 출입을 했다는 건 누군가를 매개로 연결돼 함께 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다방은 왕년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화류계 여성들의 최종 목적지와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화류계에 유입되는 여성 중에는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미성년일 때 성폭행을 당했거나, 학창시절 때 심한 따돌림을 당했거나, 혹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다. A씨의 경우는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 37세에 다방을 들락날락 한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부 다방에서는 단순히 커피만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다방에서는 ‘2차 연애’ 가 이루어진다. 특히나 지방에 있는 다방은 2차가 필수옵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커피 값과 별도로 추가비용을 지불하면 다방 여성과 유사성행위가 가능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 때문에 다방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A씨는 30대 후반으로 다방 내에서는 나름대로 젊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그 인기가 상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A씨의 과거 행방을 찾기 위해 가평에 위치한 몇몇 다방을 취재했지만 다방 종업원들은 A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다방 관계자들에 따르면 가평에 있는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주 연령대는 40∼50대다. 30대는 흔히 ‘영계’에 속한다.
 

다방에서 20∼30대는 황금라인으로 매출 일등 공신으로 알려진다. 아무래도 A씨는 남들보다 2배 3배 더 뛰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골 다방에서는 숙식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A씨는 숙식을 제공받으며 ‘아는 언니’들과 함께 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시골 다방의 경우 커피만 팔아서는 절대 돈을 벌 수 없는 형태다. 화류계 한 관계자는 “다방 미시들은 100% 2차를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본인의 수입을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남자들을 유혹해 모텔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방을 흔히 ‘티켓다방’이라고 부른다. 출장성매매의 원조격이다. 보통 티켓을 끊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외출증이다. 외부에서 자유롭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장소도 다양하다. 식당이나 호프집, 노래방 등 아무데서나 아가씨를 부를 수 있다. 티켓 2차는 다방 수입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다방 일하다 숨진 여성 알고보니 보균자
남자들과 잠자리? 그동안 행적 미스터리
 
티켓다방은 특히 지방일수록 기승을 부린다. 일부 모텔 객실 전화기에는 티켓다방 전화번호가 단축키로 지정돼 있을 정도다. 이처럼 티켓다방이 모텔을 끼고 영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속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막상 단속되더라도 혐의 입증이 어렵다. 증거가 남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매매 업소 단속을 위해서는 업소의 카드 사용 기록, 종업원의 휴대폰에 남아 있는 남성들의 전화번호 혹은 인터넷 예약기록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티켓다방에서는 모텔 유선전화를 사용해 티켓을 끊거나 현장에서 종업원과 성매매를 하기 때문에 흔적이 남지 않는다.
 
현행법상 다방 커피 배달은 미성년자가 아니라면 불법이 아니다. 설사 성매매를 했더라도 “서로가 좋아서 한 일”이라고 하면 경찰도 별다른 도리가 없다. 티켓다방 업주 또한 “종업원이 나가서 뭘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할하면 그만이다. 모텔업주도 마찬가지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다른 술집 여성들과 달리 술을 마시지 않아 이 일을 선호한다고 전해진다. A씨가 일 하기에 수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A씨가 다방에서만 일 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개중에는 조금 더 돈을 모으고 싶은 마음에 남성 손님들을 유혹해 개인적인 만남을 이어가며 금품 등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화대를 받지 않고 남성과 관계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해진다. A씨로 인한 2차 피해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의 전자발찌 성폭행범 이씨와의 연관성도 주목할 만하다.
 
A씨가 다방을 전전하다 사망한 사실이 알려진 시점에 한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자신을 HIV 보균자라고 밝히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에서 B씨는 20대 중반으로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관계를 맺어 HIV 보균자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약의 사진까지 올리면서 추가 피해자들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HIV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 자포자기 상태였다고 했다.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 약을 먹고 있는 지금은 구토증상과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B씨는 자신이 HIV에 감염된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부모님도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B씨는 “내가 이 HIV에 걸렸을 때 2달 동안 30번 정도 자살을 생각했다”며 “부모님에게 절대 얘기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 사정은 무엇일까. 그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성매매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B씨는 자신의 감염사실과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 등을 이야기하면서 “성관계 할 때는 반드시 콘돔을 착용하라”고 강조했다. B씨에 따르면 콘돔은 HIV 뿐만 아니라 HVC(C형간염), B형간염, A형간염, 헤르페스 등을 예방해준다. 곤지름은 예외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HIV 보균 검사는 꼭 한 번 받아보길 바란다”며 “검사는 익명으로 무료로 진행된다”고 전했다.
 
가평군 인근 부대에서 근무했던 C씨도 입을 열었다. 그에 따르면 과거 부대원들이 휴가나 외박을 통해 다방 여성들과 접촉하는 일이 잦았다. 속칭 ‘여관바리’라 불리는 성매매를 했었다는 것이다. C씨는 “당시 여성들은 대부분 40대였다”면서 “30대는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했다. 당시 여관으로 들어오는 아가씨 중에는 투잡을 뛰는 다방 아가씨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설마, 혹시
그녀와?
 
2008년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 개정된 이후 현 법률체계는 감염자 보호라는 온정주의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다 보니 방역기관은 속수무책이다. 이것이 에이즈 감염자 증가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인권차원에서 에이즈 환자의 감시와 격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나친 행적 감시는 감염자 인권을 침해하고 정신적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에이즈 환자 관리 책임은 1차적으로 보건당국에 있다. 국민들의 생명유지권이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대책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내 연구진 개발
에이즈 잡는 신물질은?
 
최근 국내 연구진이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을 개발했다. 지난달 30일 유재훈 서울대 화학교육과 교수와 이연 서울대 화학부 교수 공동 연구진은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를 치료할 수 있는 신약 후보 물질을 찾았다고 밝혔다. 기존 치료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공격해, 내성 바이러스 치료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RNA에서 DNA가 만들어지는 역전사 과정과 이 DNA로부터 RNA를 만드는 전사 과정을 통해 복제된다. 기존 치료제는 RNA에서 DNA가 만들어지는 역전사 단계를 공격했다. 그런데 연구팀이 개발한 ‘펩타이드’는 DNA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다음 단계를 공략한다. 펩타이드의 가장 큰 장점은 천연물질과 비슷해 인체 독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연구진은 동물실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5년 이내에 상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번 연구결과는 국제 학술지 <앙케반테 케미> 최신호에 실렸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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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