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은퇴 앞둔 박태환

마린보이 국민들에 ‘마지막 선물’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마린보이’박태환이 아쉽게도 자신의 이름이 걸린 인천 문학박태환경기장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금메달을 기대했기에 실망이 컸던 게 사실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박태환의 400m 기록은 시즌 세계 1위에 해당되는 기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은퇴설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2년 후 브라질 리우올림픽까지 도전을 계속 이어갈 각오다.

 
“아시안게임을 세 번 뛰다 보니 메달도 많이 나왔나 보네요.” 
 
지난 25일 마린보이 박태환(25·인천시청)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100m에서 48초75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선수 최초로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 타이기록을 세운 것이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4개를 포함해 아시안게임 통산 총 19개(금6·은4·동9)의 메달을 획득했다.

금 놓쳤지만…
최선 다했다
 
박태환은 인천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열린 대회 남자 자유형 100m 결승에서 48초75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쳐 8명이 겨룬 결승에서 3등 밖으로 밀렸으나, 막판 스퍼트를 올려 은메달을 따냈다. 주종목인 200m와 400m에서 뒷심 부족으로 동메달을 따낼 때와는 달랐다. 박태환은 되살아났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은메달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금메달은 아시아 신기록인 47초70을 기록한 닝쩌타오(중국)가 차지했다. 동메달은 48초85를 기록한 시오우라 신리(일본)에게 돌아갔다. 박태환은 예선에서 49초76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치며 전체 1위로 결승에 올랐다.
 

경기 후 박태환은 “정말 잘해도 후회는 남으니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며 “그래도 이번 대회 처음으로 경기하면서 몸이 괜찮았고, 시즌 최고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예선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동메달리스트 시오우라(일본)는 “박태환과 함께 뛸 수 있어 영광이었다”며 “훈련장에서도 박태환과 가까이서 훈련하다 보니 친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박태환이 다시금 성적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400m 계영 예선을 치른 뒤 아버지 박인호씨가 경영하는 팀 GMP의 매형 김대근 실장이 박태환의 3일간의 레이스를 모두 지켜본 뒤 “태환아, 내려놓자. 편안하게 하자”고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200m를 마치고는 부담이 될까 봐 말을 하지 못했지만 400m 후에는 충격이 클까 봐 어쩔 수 없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박태환 수영’을 못하고 있다고 돌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가족들의 돌직구가 통했는지 이후 100m 결선에서는 힘찬 움직임으로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자유형 100m는 박태환이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당시 3관왕을 달성할 때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종목이다. 박태환이 하기노 교스케(일본), 쑨양(중국)에 밀려 이번 대회 자유형 200m, 400m 금메달을 놓쳤을 때에도 초반 페이스는 좋았던 만큼 100m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기대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실종된 막판 스퍼트를 이날도 발휘하지 못하면서 아쉽게도 금메달을 놓쳤다.
 
박태환은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당시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걸었을 때 첫 50m를 24초02에 통과하며 당시 자신과 우승경쟁을 벌였던 중국의 루지우에 뒤졌다. 그러나 박태환은 막판 스퍼트로 50m를 24초68 기록으로 통과하며 25초27에 그친 루지우를 따돌리고 가장 먼저 터치 패드를 찍었다.

총 메달 19개
‘최다 타이’
 
반면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은 첫 50m를 23초76에 통과하며 광저우아시안게임보다 빠른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50m에서 24초99를 기록한 박태환은 첫 50m와 마지막 50m 기록 차이가 크지 않았던 광저우대회와는 달리 1초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역전에 실패했다. 이날 금메달을 목에 건 닝쩌타오(중국)은 첫 50m와 마지막 50m를 각각 23초02, 24초68에 통과했다.
 

닝쩌타오 역시 막판 스퍼트가 뛰어나지 않았던 만큼 박태환이 전성기 시절의 막판스퍼트를 보여줬다면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박태환은 “닝쩌타오가 몸이 말라서 노력하면 옆에서 붙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기와는 달리 힘이 넘쳤다”며 “막판 스퍼트를 할 때 몇십m만 더 있었으면 역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박태환은 이날 통산 19번째 아시안게임 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안게임 개인 메달 타이기록을 세웠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부터 아시안게임 무대를 밟은 박태환은 3개 대회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9개를 차지하며,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부터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아시안게임만 여섯 차례 출전한 박병택은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6개를 차지한 한국 사격의 산증인 박병택의 19개를 따라잡았다. 박태환은 한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이 됐다.
 
경기 후, 한 외신기자가 박태환을 향해 연맹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안현수의 귀화에 대한 생각을 묻기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외신기자는 박태환에게 “수영연맹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를 예로 들며 귀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에 대해 박태환은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선발전도 한국에서 뛰었다. 연맹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선발전에서도 좋은 기록이 나왔다”며 연맹과의 불화설을 일축했다.
 
금만큼 값진 은메달과 동메달 획득
통산메달 19개 목에…‘전설의 기록’
 
그런데 이 외신기자는 갑자기 왜 뜬금없이 대한수영연맹을 거론했을까. 사실 박태환과 수영연맹과의 갈등은 지난해까지도 계속돼 왔다. 감독 선임, 훈련 방식, 관리와 지원 문제 등을 놓고 선수 측과 소속 단체와의 주도권 다툼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괘씸죄 적용’이라는 의혹과 함께 런던 올림픽 포상금 5000만원도 뒤늦게 지급됐다. 이런 사실은 당시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이 외신기자는 “박태환은 아직까지도 스폰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이 대회를 마친 뒤에도 호주에서 또 개인 비용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냐”고 물은 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 한 선수를 향해 스폰서는 물론, 팬들과 정부가 온힘을 다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쑨양 같은 선수가 대표적”이라며 박태환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 수영의 침몰이다. 박태환 의존증의 여파가 심각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메달을 땄다. 최윤희, 정다래 등 금메달리스트도 있었다.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만 해도 최유웅, 장규철, 서연정, 최혜리가 개인 메달을 획득했고, 4개의 단체전에서 은 1개, 동 3개를 따냈다. 그런데 인천에서는 박태환과 관련이 없는 메달은 50m 접영에서 동메달을 딴 양정두가 유일하다. 제2의 박태환이 나오지 않고 있다.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싸운 영웅
 
박태환은 5살 때 천식을 치료하던 중 의사의 추천으로 수영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대청중학교 3학년 때인 2004년, 수영신동으로 불리며 한국 선수단 중 최연소 국가대표로 주목을 받으며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다. 하지만 자유형 400m에서 준비 신호를 출발 신호로 착각하고 입수해 실격 처리됐다. 그러나 2005년 한 해 동안 무려 여섯 개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2005년 11월, 마카오 동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자유형 400m에서 3분48초71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생에 첫 출전한 자유형 1500m에서 15분00초32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에는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시안게임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이후 그는 태릉선수촌을 나와 개인 훈련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코치 교체 등 잡음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7년 1월부터는 괌과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맬버른에서 2개월여 동안 전지훈련을 실시했고 같은 해 3월25일에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자유형 400m 경기에서는 예선 2위의 성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그는 튀니지의 오우사마 멜로리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랜드 해켓을 제치고 3분44초30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기록과 아시아 기록을 동시에 1초42 앞당긴 것이다. 같은 해 8월21일에는 일본 국제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3분44초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2008년에는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입학해 석사과정까지 진학했다. 대학입학 시 단국대뿐만 아니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한체대 등 대학들로부터 입학제의를 받았으나 박태환과 가족의 결정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었다.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뒤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의 수영지도자로 활동하길 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박태환은 경기를 펼칠 때마다 한국 수영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수영 영웅으로 발돋움 했다. 23번의 한국 신기록과 12번의 아시아 신기록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박태환 인생의 정점은 올림픽 첫 금메달을 거머쥔 2008년이다.  아시아선수 최초로 자유형 400m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후 각종 광고모델 요청을 20건 넘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한 육체미와 친숙한 외모가 인기 상승 비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정이 달랐다.
 
최선 다한 한국수영 영웅에 박수를
수영 특성상 은퇴 시기 훌쩍 넘겨
 
로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최악의 성적을 남긴 것이다. 자유형 200m, 400m, 1500m 전종목에서 예선탈락하면서 부진에 빠졌다. 전신수영복에 적응을 하지 못하던 그는 2010년 1월1일부터 전신수영복 금지 규정이 생기면서 다시 한 번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큰 충격을 받고 다시 맹훈련에 돌입해 지구력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8월19일, 2010팬퍼시픽 수영선수권대회에서 200m 은메달을 거머쥐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올렸다. 하지만 하루에 두 경기를 소화한 박태환은 주종목인 1500m에서는 8위의 성적을 보이면서 다시 주춤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21일에 열린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중국의 장린을 따돌리고 전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절치부심 끝에 제16회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수영 영웅의 자존심을 다시금 입증했다. 하지만 수영 영웅도 세월을 역으로 헤엄치진 못했다. 2010년 아시안게임에서의 자유형 400m 아시아 신기록을 끝으로 박태환의 기록 깨기는 막을 내렸다. 중국의 신예 쑨양의 등장으로 최고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박태환은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실격 후 번복이라는 해프닝을 겪고서도 은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였다. 200m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이미 세계 수영계의 조명은 쑨양에게 향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5년간 박태환을 후원해오던 기업과의 재계약이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인용 보도한 <뉴시스>에 따르면 “박태환이 최근 홈쇼핑TV에 나와 건강보조식품 광고에 출연한 이후 네티즌들이 대한수영연맹 홈페이지 게시판에 수영스타에 대한 홀대를 비난하는 글”이 폭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SK그룹이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박태환과의 후원 계약을 포기한 것이다. 대한수영연맹도 박태환에 대한 지원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제2의 박태환
어디에 있나
 
이후 박태환은 훈련에 드는 수억원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급기야 홈쇼핑에까지 출연해 세계 수영계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서까지 해외 전지훈련에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일부 팬들과 유명학원 강사 등이 힘을 모아 박태환을 도왔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박태환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특히 레이스가 치러진 경기장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태환수영장이다. 세계 스포츠사를 뒤져봐도 은퇴하지 않은 현역선수에게 경기장 이름을 헌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가 느꼈을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중압감이 경기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
 
아시아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경쟁자들의 선전은 박태환에게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신성 하기노 고스케(일본)는 자유형 200m와 개인혼영 200m, 계영 800m, 개인혼영 4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4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하기노는 개인혼영에서 1분55초34의 아시아신기록을 달성했다. 마린보이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본다. 
 
<khlee@ilyosisa.co.kr>

 
[박태환 수상경력]
 
[2005년]
-제4회 마카오 동아시아경기대회 수영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은메달
 
[2006년]
-제10회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금메달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400m 혼계영 동메달, 800m 계영 동메달, 400m 계영 동메달, 100m 자유형 은메달, 200m 자유형 금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삼성 MVP 어워드 최우수선수상
 
[2007년]
-일본국제수영대회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동메달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동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2010년]
-제11회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400m 혼계영 은메달, 800m 계영 동메달, 400m 계영 동메달, 100m 자유형 금메달, 200m 자유형 금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은메달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삼성 MVP 어워드 우수선수상
 
[2011년]
-제14회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2012년]
-제30회 런던 올림픽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은메달
 
[2014년]
-제17회 인천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동메달, 4x200 계영 동메달, 400m 자유형 동메달, 4x100m 계영 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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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박희영 기자 =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고 경고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끝으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김 전 비대위원장을 만나 그가 제시하는 정국 진단 결과와 향후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들었다. 다음은 김 전 비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출범 100일을 넘긴 이재명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100일 동안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했다고 본다.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추석을 앞두고 지급된 2차 민생회복 소비쿠폰에 대한 의견은? ▲민생 경제가 굉장히 어렵고, 우리나라의 총수요가 낮아졌다. 한국은행이 진단한 올해 성장률도 0.9%밖에 안 된다. 쿠폰을 풀면, 약간의 소비 촉진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겉보기엔 훈훈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3500억달러 투자 펀드 조성 요구와 노동자 317명 추방 등 사태와 맞물려 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거졌다. ▲우리 경제 부처 장관들이 미국 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의 요구는 보증·대출을 거쳐 이행하면 될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근본적인 시각 차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되지 못했다. 그런데 국민에겐 마치 타결된 것 같은 인상을 줬다. 한 달도 안 돼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하는 미국의 MAGA 진영은 우리나라 일각의 부정선거론을 지지하면서 “한국이 공산주의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미국이 어떻게 위대한 나라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의 MAGA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와도 관계가 없다. “MAGA 진영이 우리 정치에 개입할 것”이란 믿음은 국내 보수 진영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검찰 해체를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한다. 민주당이 새로 구상하는 검찰 체계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