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실화'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 전말

7인의 10대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1988년 일본 열도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여고생 콘크리트’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 한국에서도 발생했다. 가출한 여고생이 청소년들에게 납치돼 갖은 괴롭힘을 당하다 끝내 숨진 것이다. 가해자들은 숨진 여고생 시신 위에 시멘트를 반죽해 붓는 잔혹함을 보였다. 7명의 무리들이 이처럼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20대 남성들과 일부 여중생들이 가출한 여고생을 납치해 성매매를 강요하고 몸에 끓는 물을 붓는 것은 물론 휘발유와 시멘트를 이용해 시신을 훼손하고 암매장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창원지검은 올해 5월 초 김해지역 고교 1학년 윤모(15)양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까지 훼손해 살인·사체유기 혐의로 A(15·중3)양, B(15·중3)양, C(14·중학 중퇴)양과 윤양을 유인해 성매매를 시키고 시신 유기를 방조한 김모(24)씨를 구속 기소했다. 이들과 함께 범행한 이모(25)씨와 또 다른 이모(24)씨, 허모(24)씨, 또 다른 D(15·중학 중퇴)양 등은 다른 범죄로 대전지검에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극악무도 만행
시신훼손 수법
 
검찰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3월15일께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윤양이 김씨를 따라 가출해 부산의 한 여관에서 함께 지냈다. 김씨는 ‘조건 만남’ 대상을 물색해 윤양에게 성매매를 강요했고, 성매매를 강요해서 챙긴 화대로 숙식을 해결했다. 그러던 중 그달 29일 윤양의 아버지가 가출신고를 한 사실을 알게 돼 집으로 돌려보냈다. 피고인들은 윤양을 순순히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고민에 빠졌다. 윤양이 강제로 성매매 한 사실을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에 빠진 피고인들은 이튿날 윤양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윤양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끝에 윤양을 발견했다. 이들은 윤양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울산의 한 모텔로 끌고 갔고 또 다시 성매매를 강요했다. 또한 윤양이 모텔 내 컴퓨터로 페이스북에 접속하자 ‘위치를 노출했다’는 이유로 윤양을 마구 구타하기도 했다. 피고인 7명은 이때부터 윤양을 감금하고 조를 짜서 감시와 학대를 이어갔다. 
 

여중생들이 모텔로 납치한 뒤 성매매 강요
화대로 생활…‘집에 간다’하자 고문 시작
 
이씨 등 남성들은 윤양과 여학생들을 돌아가며 싸움을 시키고는 이를 관람했다. 7명 모두 폭행에 가담했다. 이들은 윤양에게 선풍기와 에프킬라 등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수법은 매우 잔인했다. 냉면 그릇에 소주 2병을 부어 윤양에게 마시게 하도록 한 후 윤양이 토해내면 그것을 다시 핥아먹도록 시켰다.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윤양이 “너무 맞아 답답하니 물을 좀 뿌려달라”고 부탁하자 한 명은 윤양의 팔에 팔팔 끓는 물을 붓는 엽기적인 짓을 했다. 윤양의 몸은 화상으로 인해 온 몸 곳곳에 물집이 생겨 피부의 껍질이 벗겨졌다. 윤양의 몸은 날이 갈수록 만신창이가 됐고, 물도 삼키기 힘들었던 윤양이 힘을 내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학대의 크기는 배가 됐다. ‘앉았다 일어서기’ 100회를 시키거나 ‘구구단 외우기’ 등을 시키며 학대를 즐겼다. 괴롭히다가 지치면 돌아가면서 폭력을 퍼부었다.
 
이들 중 한 남성이 윤양에게 “죽으면 누구를 데려갈 것이냐”고 물어보고 윤양이 답을 하면 지목된 여학생들이 보폭폭행을 했다. 이 중 한 여학생은 보도블록으로 윤양을 내려치기도 했다.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윤양은 결국 4월10일 오전 0시30분, 대구의 한 모텔 인근에 주차된 승용차 뒷좌석 바닥에서 탈수와 쇼크로 인한 급성 심장정지로 숨을 거뒀다. 쓰러져 있는 윤양을 발견한 피고인들은 범죄를 숨기기 위해 윤양의 시신을 산에 묻기로 결심했다.
 
끓는 물 붓고 무차별 폭행
얼굴에 기름 붓고 불 붙여
 

다음 날 11일, 경남 창녕군의 한 과수원으로 향했다. 이들 중 남성 일행 3명은 완전범죄를 강조하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죽은 윤양의 얼굴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3일 후, 범행 발각을 걱정하는 남성 3명과 여학생 2명이 경남 창녕의 한 야산에 모여 시멘트를 반죽해 윤양의 시신 위에 붓고 돌멩이와 흙으로 암매장했다.
 
또한 20대 피고인 중 일부는 윤양을 매장한 후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들은 조건만남을 빙자해 40대 남성을 모텔로 유인한 후 조건만남을 미끼로 돈을 뜯으려다 이 남성이 자신들을 ‘꽃뱀’이라 의심하며 반항하자 둔기로 내려쳐 살해했다. 현재 가해 여중생에 대한 1심 재판은 창원지법에서 진행 중이다. 검찰 관계자는 “범행수법이 잔혹해 이들에 대해 법정최고형을 구형하는 등 엄벌에 처할 방침”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반면 가해 여학생 변호인 측은 “여학생 가운데 일부도 지난해 11∼12월 가해 남성 중 2명에 붙들려 조건만남을 강요받았다”면서 “가해 여학생 2명이 당한 범죄수법은 숨진 윤양이 당한 수법과 유사하다”고 주장해 재판결과가 주목을 받고 있다.

조 짜서 감금하고
감시 학대 이어가
 
지난 5일 피해자 윤양의 아버지 윤모(49)씨는 SBS 라디오 <한수진의 SBS전망대>에 익명으로 출연해 경찰의 부실수사를 지적했다. 윤씨에 따르면 3월15일 가출한 윤양은 3월29일 집에 잠시 돌아왔다. 가해자들이 윤양에게 집에 돌아가 안심시키고 다시 나오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이날 윤씨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딸은 이미 가해자들에게 끌려간 뒤였다. 3월30일 오전 11시10분쯤 본 딸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윤씨는 “딸이 집에 왔다 가고 나서 마음이 더 불안했다. 경찰에 찾아 달라고 많이 매달렸지만 경찰도 수사 패턴이 있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제가 들은 바로는 단순 가출로 수사한다고 들었다. 우리나라 실정으로 그런 상황은 단순 가출로밖에 수사를 안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수사만 제대로 됐으면 우리 딸을 좀 일찍 찾지 않았을까 한다. 경찰을 많이 원망했다”고 전했다. 윤씨는 피고인 20대 3명에 대해 “전과가 25범으로 화려하고 악랄한 놈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현재 윤씨는 잔혹하게 살해돼 생을 마감한 딸을 그리워하며 피고인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호소하고 있다.
 
같은 날 범죄과학연구소 표창원 소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인간은 특정 권위를 가진 사람이 지속해서 가혹행위에 대한 지시를 내리고 ‘옳은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면 행위가 사망에 이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따라 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표 소장은 이를 뒷받침하고자 1960년대 심리학자 밀그램의 일반인을 상대로 진행한 권위와 복종에 관한 실험을 언급했다.
 
이 실험은 참가자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하면서 “모든 책임은 내가 지며 업무가 끝나면 4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최고 450볼트까지 고압 전기충격을 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무도 몰라보게 매장전
얼굴에 시멘트까지 뿌려 
 
표 소장은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의 가해 여학생들에 관해 “훨씬 나이가 많고 사회경험이 많은 20대 남성들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집단생활을 했다”며 “이번 가해자 중 20대 중반의 남성 3명을 제외한 15살 여중생 4명의 경우 피해자이면서, 또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중단도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폭행에 가담한 가해자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표 소장은 “살인죄 적용 자체는 성년, 미성년 구분이 없다”면서 “소년법에서 미성년자는 정상을 참작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 중 20대 남성과 10대 여학생들의 형량은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편, 이번 사건은 1988년 일본에서 발생한 ‘콘크리트 여고생 살인사건’과 수법 및 잔혹성이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더 충격을 준다. 당시 미야노 히로시(당시·18), 오구라 유즈루(당시·17), 미나토 노부하루(당시·16), 와타나베 야스시(당시·17) 등을 위시한 여러 명의 청소년들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여고생 후루타 준코(당시·16)를 감금하고 납치해 미나토 노부하루의 자택 2층 거실서 40여일간 감금했다.

2014 한국판
콘크리트 살인
 
이들은 이 기간 동안 강간과 가혹한 폭행을 반복했고 결국 후루타 준코는 사망했다. 이후 89년 1월5일 사망을 눈치 채고 시체 처리를 고민하던 끝에 가해자들은 사체를 드럼통에 넣고 콘크리트로 채워 도쿄의 한 매립지에 유기했다. 시신을 은폐한 뒤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 매립지 주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접수됐고, 같은해 3월29일,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다른 사건으로 인한 강간·절도 등의 혐의로 소년감호소에 보내진 가해자의 진술로 피해자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의 실체가 공개돼 열도를 충격에 빠트렸다. 
 

가해자 중 주범 네 명은 형사 처분의 근거가 상당해 가정재판소에서 검찰청으로 송치돼 형사 재판에 회부됐다. 도쿄 고등재판소는 이 중 리더 격인 미야노 히로시에게 징역 20년, 오구라 유즈루, 미나토 노부하루, 와타나베 야스시에게 각각 징역 5년이상 10년 이하, 징역 5년 이상 9년 이하, 징역 5년 이상 7년 이하에 처했다. 이후 2003년,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 소설 <17세, 악의 이력서>가 출판됐고, 다음 해인 2004년 영화 <콘크리트>가 개봉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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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