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세태> ‘제4의 성’ 무성애자 세계

“남녀 모두 사랑해도 섹스는 싫다”

[일요시사=사회팀]이성애·동성애·양성애 외에도 제4의 성이 존재한다. 바로 ‘무성애’다. 무성애자들은 타인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성관계를 하고 싶은 욕구도 없다. 이들은 남녀의 몸이 뒤섞이는 섹스보다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원한다고 외친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무성애자의 정체성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도대체 무성애는 무엇일까.

동성애, 양성애 등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위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고 있다. 세상이 변하면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지만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그러나 과거와 비해 이들의 목소리가 뚜렷해진 것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건 동성애, 양성애 외에도 또 다른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 동성 어떤 상대에게도 성적 이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가 그것이다. 보통 이들을 ‘에이섹슈얼’이라고 부른다. 의아하지만 성관계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섹스가 싫어요”
플라토닉 러브?

우리 사회에는 이성애자가 주류다. 그리고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를 성소수자로 분류한다. 무성애자는 성적인 욕구가 삶에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소수자 중에서도 극소수인 경우다. 하지만 이들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성애자도 사랑을 한다.

단지 그 감정이 성관계로 연결되지 않을 뿐이다. 이들은 성욕을 억지로 누르지 않는다. 애초부터 성적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걸 성관계보다 더 좋아할 뿐이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성관계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무성애자의 상징은 케이크 위에 깃발을 꽂은 모양이다.

무성애자의 구체적인 유형은 일곱 가지로 분류된다. 무성애자(Asexual)는 성적 끌림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일반적인 무성애자다. 반무성애자(Demisexual)는 정서적인 교감을 나눈 사람과는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성욕을 느낀다.

회색무성애자(Grey Asexual)는 성욕을 느끼지만 필요성을 못 느낀다. 페티쉬 무성애자(Asexual Fetishist)는 무생물에 대한 페티시즘을 가진 무성애자다. 낭만적 무성애자(Romantic Asexual)는 사랑을 느끼지만 성적인 것은 거부한다. 무낭만적 무성애자(Aromantic Asexual)는 사랑도 성욕도 없다. 자기성애자(Selfsexual)은 자기 자신에게서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넓게 보면 ‘초식남’과 ‘건어물녀’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이성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연애보다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성애자들은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독신주의자들이 늘어나면서 무성애자들이 살기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솔솔 들린다. 

그러나 무성애자들은 양지로 나오지 못하고 음지에서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성소수자의 위치에 있고 아직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무성애자들의 대표적인 안식처로 알려진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회원 수는 1000명이 넘는다. 수치상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무성애자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곳 여성회원인 A씨는 성적인 끌림을 경험하지 않은 무성애자다. 어려서부터 이성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동성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자연히 짝사랑, 첫사랑과 같은 감정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특별히 문제 삼지도 않았다. ‘언젠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단지 이 마음뿐이었다.

사춘기도 평범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낭만의 캠퍼스에 입성했지만, 자신의 낭만과 타인의 낭만은 달랐다. 쏟아지는 미팅과 CC(캠퍼스커플) 소식에 주변은 들썩였지만 A씨는 시큰둥했다. 남들 연애사에 쉽게 공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독서가 더 즐거웠다. 자신을 위한 여유 속에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던 찰나에 제4의 성으로 알려진 ‘무성애’에 대해 알게 됐다.

‘딱 나다’ 싶었다. 그래서 무성애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고 이것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성애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자신을 위해 투자하며 살아가는 삶을 걷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평화로운 무성애
남성보다 여성 많아

남성회원인 B씨는 조금 다른 경우다. 무성애자라는 공통점은 갖고 있지만 이성과 동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남성과 여성 모두 사랑할 수 있다. 연애감정을 느끼는 양성애적 무성애자였다. 그러나 설렘을 느낄 수 있지만 성적충동은 없다. B씨는 지금까지 남성도 만나보고 여성도 만나봤다. 성관계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성적욕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만나던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성관계를 요구하는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키스나 성관계가 더럽게 느껴지기까지도 했다. 물론 자위행위도 그랬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평범한 이성과 동성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무성애자를 만나기 위해 무성애자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위안이 됐다.

선천적으로 성적욕구 없는 사람들
육체접촉 거부…일반 감정만 느껴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도서 <무성애를 말하다>의 저자 앤서니 보개트의 설문조사(2004)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를 보면 영국인의 1.05%는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성적인 이끌림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국제 성의학계에서도 하나의 섹슈얼리티로 자리 잡는 중이다.
 

앤서니 보개트는 책을 통해 “남성이나 여성, 혹은 양성 모두에 대해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무성애다. 모호하지만 무성애라고 해서 로맨스가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험 자체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없다.

무성애를 결정하는 것은 성행위의 결핍이 아니라 욕망의 결핍이다”고 설명한다. 과학전문지 <뉴 사이언티스트> 조사에서도 ‘성인의 1%가 성적 욕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무성애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성애와 동성애와 달리 무성애의 원인은 아직 밝혀진 바 없지만 뇌세포의 형성 과정과 성적 취향이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회적 원인이 있을 거라 보고 있다. 독신주의자가 늘어나는 이유도 사람들이 무성애자로 변모해 가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환경에 따라 자발적 독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성애자들은 후천적 요인에 따라 성적 욕망을 잃은 경우는 무성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라거나 성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무성애를 말하는 것이 못 마땅하는 것이다.
아직 무성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반발의 목소리가 약한 편이지만 일각에서는 무성애를 맹비난하기도 한다. 이들이 무성애를 비난하는 이유는 동성애와 비슷하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무성애자들이 양성적으로 증가하면 그만큼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결혼과 출산률의 감소가 자칫 국가의 경제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그 이유다.

박경태 성공회대 사회학과(소수자연구) 교수는 “무성애자를 두고 사회재생산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국가주의적인 발상이다”며 “기본적으로 무성애자도 개인의 ‘성’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들 사이에도 개인 간 차이가 있으며, ‘저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하는 잣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행동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무성애자도 연애를 하고 로맨틱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상대방과 성관계 속에서 성적 쾌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관계하고 싶은 욕망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이들은 정신적인 흥분과 신체적인 변화가 일치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들의 경우 커밍아웃이나 집단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무성애자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커밍아웃을 하는 사례도 적다. 동성애의 경우 사회적 관념과 충돌해 마찰이 생기기도 하지만 무성애는 그렇지 않다.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존의 관습에 충돌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AVEN’(The Asexual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은 전 세계적으로 6만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무성애자 커뮤니티다. 2001년 설립된 이 단체의 창립자이자 가장 유명한 무성애자인 미국인 데이비드 제이는 “우리가 고장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성관계를 하지 않고도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많이 토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에이븐을 통해 “자신을 발견했다”는 무성애자도 늘고 있다. 데이비드 제이는 성적 소수자로서 무성애자의 권리에 대한 요구와 투쟁이 이제 막 시작된 것 같다고 말한다. 무성애가 <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편람>에서 ‘과소 성욕 장애’로 규정됐을 때 AVEN 일부 회원들은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무성애는 ‘LGBTAI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sexual, Intersexual, Queer) 표기 가운데 끼어든 알파벳 하나일 뿐이다. 현재 위치가 그렇다. 무성애에 대한 논란은 이곳저곳에서 미미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생산적인 논쟁으로 마무리 짓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의 고충을 해소하는 일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기능 문제없지만…성관계 ‘NO’
전 세계 인구 1% 못 느끼는 인류

이들은 사회 속에서 지옥을 겪고 있기도 하다. ‘너 혹시 고자?’에서부터 ‘애인 언제 사귀냐’ 등 집안 어른들의 재촉과 친구들의 음담패설이 이들을 둘러싸고 있어서다. 점점 성적으로 개방되어가는 사회가 야속할 뿐이다. 그래서 간혹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연애를 하거나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건 무성애자 중 대략 70%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여성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낮아서 자위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타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빈도도 낮다. 또 성애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하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남성의 발기는 명확한 반면, 여성의 질의 반응은 미묘하다. 이 차이에서 할 수 있듯이 남성이 성애에서 목표 지향적인 데 비해 여성의 욕망은 모호한 것도 관계가 있다.

무성애는 곤란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무성애 남성은 이성애 남성보다 덜 남성적인가, 혹은 무성애 여성은 이성애 여성보다 덜 여성적인가 따위의 질문이다. 대다수 무성애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규정하지만, 대략 13%는 남성이나 여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예 성애가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전해지지만, 자신들의 정당한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무성애 운동이 점차 확산될 조짐이라고 한다.

무성애자 목소리
이제 걸음마 단계

무성애에 대한 과학적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무성애가 선천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과학적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 양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숫양들의 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2년 동안 실험한 결과 양들의 무성애가 확인됐다.

양연구소 연구자들은 숫양과 발정기의 암양 두 마리, 숫양 두 마리를 일정 시간 함께 있도록 한 뒤 숫양 584마리의 ‘성적 취향을 확인했다. 56% 숫양만이 암양과 교미했다. 놀라운 결과였다. 실험 양들 가운데 9%는 숫양에게 반응을 보였고 12%는 어떤 성적인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이성을 대상으로 한 성욕이 자연계의 절대 법칙은 아님을 확인한 것이기에 유의미한 실험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무성애의 원인을 따지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남녀 신체적 특징 가진
‘인터섹슈얼’의 세계

‘inter(사이·중간·교차)’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터섹슈얼(intersexual)’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흔히 ‘IS’라고 불리는 인터섹슈얼은 여러 형태로 분류된다. 성기를 가지고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 형태가 있거나 안쪽에 숨어 있지만 제 기능을 하는 경우 등 생식기의 ‘형태’와 ‘기능’에 따라 분류한다.

쉽게 말해, IS는 남성의 페니스와 여성의 난소와 질을 모두 갖고 있다. IS는 태아 단계에서 중절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고, 어릴 때 수술을 해서 자신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 수술을 하면 성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 성정체성이 확립되는 성인이 된 이후에 수술을 하는 것이 좋다고 알려진다.

독일에서는 매년 2000명 정도의 신생아가 IS로 태어나고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출생신고서에 남성, 여성 그리고 제3의 성을 기록할 수 있다.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내에도 IS가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 여자 육상선수 ‘캐스터 세메냐’를 두고 성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조사 결과 IS로 밝혀졌다. 그녀는 여전히 여자 육상선수로 활동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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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 업체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에 직격탄을 맞았다. 해당 업체는 보도자료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보도자료를 쓴 의원실 보좌관은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일요시사>가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봤다. 국회의원은 최고 헌법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법률을 만들고 개정하는 입법 기능 외에도 인사청문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투표로 선출된 ‘국민의 종’으로서 국회의원은 기자회견, 보도자료 등을 통해 국민에게 활동 상황을 보고한다. 국회의원 민원 창구? 국회의원 이름으로 하루에도 수건씩 보도자료가 쏟아진다.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역구 예산을 수주했다는 내용,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부 기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 등이다. 언론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로 작성한다. 언론 보도는 사정기관의 감사나 수사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한 국회의원실에서 나온 보도자료가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자료에 언급된 정부 기관, 그 기관과 일하는 업체 등이 후폭풍에 휘말렸다. 보도자료를 받아 쓴 일부 매체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됐다. 언론사 기자들의 이메일로 배포된 보도자료는 국회의원실 보좌관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5월14일 더불어민주당 신정훈 의원실 오모 보좌관은 ‘경찰청, 순찰차 납품 지연 및 특정 업체 유착 의혹에도 자료 제출 거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사 기자들에게 보냈다. 신정훈 의원은 전남 나주·화순을 지역구로 하는 3선 의원으로,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찰청은 행정안전위원회의 피감기관이다. 순찰차는 일반 차량에 특장 작업을 거쳐 경찰청에 납품된다. 멀리서도 순찰차임을 확인할 수 있는 리프트 경광등을 달고 겉면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데칼’ 작업을 거쳐 수배·체납·도난 차량을 확인할 수 있는 멀티캠을 내부에 다는 등의 작업을 거친다. 순찰차 한 대를 특장하는 데 약 1700만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년 1000여대의 노후 순찰차가 교체된다. 신정훈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노후 순찰차 959대를 교체하기 위해 총 491억원의 예산이 집행됐다. 하지만 이 중 약 225억원 상당인 343대가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완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또 납품업체의 문제로 순찰차 납품이 늦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발주 기관인 경찰청은 지체상금 부과, 계약 해지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정훈 의원실의 자료 요구에 경찰청이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신정훈 의원실은 ‘공공계약에 정통한 한 법조계 관계자’의 “경찰청이 계약성 권리조차 행사하지 않고 이를 묵인한 데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도 거부한 것은 행정 편의주의를 넘어 법적 의무의 명백한 방기”라며 “이 정도 사안이면 감사원 감사는 물론 직권남용과 배임 혐의까지 적용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코멘트를 인용했다. 순찰차 납품 과정 지적 해당업체 “사실과 달라” 납품업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정훈 의원실은 “동일한 지배 구조를 가진 Y사(보도자료에는 A사)와 N사(B사)가 10여년간 경찰청의 대형 계약을 반복적으로 수주해 왔다”며 “수의계약이나 경쟁입찰의 형식을 빌린 사실상의 내정 또는 담합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공정거래법상 ‘부당 공동행위’ 및 ‘입찰 방해’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N사는 Y사의 임직원이 만든 회사로 두 업체는 모회사-자회사 관계다. 신 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되는 치안 장비 도입 사업이 법적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채 일부 업체에 특혜로 왜곡되고 있다”며 “기존 계약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발주가 진행돼서는 안 된다.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몇몇 언론이 기사를 냈다. 보도 이후 납품업체인 Y사가 보도자료 내용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 법무부 등에 차량을 개조해 납품하는 특장업체다. Y사 관계자는 “보도자료가 배포되기 전, 기사가 나가기 전에 신정훈 의원실이나 언론으로부터 단 한 차례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보도가 나간 이후 오 보좌관을 만나 사실과 다른 부분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달에 관련 보도가 한 차례 더 나갔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청과 직접 계약을 맺거나 현대자동차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형태로 이번 납품에 참여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현대자동차로부터 616대(소나타), Y사로부터 73대(스타리아 37대, 넥쏘 36대), N사로부터 270대(아이오닉 181대, 그랜저 89대) 등 총 959대를 납품받았다. Y사 관계자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지적한 납품 지연과 검사 불합격에 대해 “제작은 이미 완료됐고 출고를 기다리던 중에 검사 하나가 마무리되면 또 다른 검사를 요청하는 식으로 5개월 동안 시간을 끌었다”며 “2015년부터 경찰청에 순찰차를 납품해 왔지만 이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납기에 늦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N사의 계약 차량은 납품까지 5개월 넘게 걸렸고 H사의 계약 차량은 검사 하루 만에 출고 처리됐다”며 “그동안 경찰청 검사가 미진했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든 H사든 같은 잣대로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확인 안 했다? H사는 순찰차에 설치하는 리프트 경광등을 제작하는 업체로 현대자동차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Y사와 N사가 담합해 경찰청 계약을 10년 동안 수주해 왔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찰청은 조달사업법에 따른 나라장터 종합쇼핑몰 우선 구매 제도를 통해 (업체들과) 계약했다. 나라장터에 물건을 올리면 경찰청에서 선택하는 방식”이라면서 “우리와 N사는 같은 차종으로 경쟁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반박했다. 반면 오 보좌관은 순찰차 사업과 관련해 드러난 문제를 고치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시정되지 않자 보도자료를 통해 지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비서실에서 <일요시사>와 만나 “공무원이 어떤 업무를 하다가 다소간 실수가 발생할 수 있고 관행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걸 인정하고 시정하면 끝까지는 안 간다”고 말했다. 이어 “순찰차 관련 문제를 (경찰청에) 수도 없이 얘기했는데 고쳐지지 않았다. 1차 차량 검사에서 불합격이 나왔는데 2차 검사를 할 때 보니 1차에서 나온 문제가 하나도 시정되지 않았다. 3차 검사는 나도 모르게 진행됐다. 시험성적서를 달라는 말에도 개인 정보를 이유로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납품한 순찰차에 설치된 경광등이 사양서에 맞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오 보좌관은 “리프트 경광등의 핵심 기능은 주야간 150m 구간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납품된 것은 그게 안 된다. 30m만 떨어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순찰차에 치명적인 장애”라고 비판했다. Y사 관계자는 “사양서가 존재하는데 30m 밖에서 안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경찰청에서 3회가량 시연회를 진행했고 현장에서도 더 밝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광등이 사양서와 일부 맞지 않는 건 애초에 사양서 자체가 H사의 제품에 맞춰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오히려 H사의 경광등이 경찰청 순찰차 사양서에 적용돼 2015년부터 2024년, 우리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10여년간 독점적으로 사용됐다”고 반박했다.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고장이 잦아 수리 비용이 많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는 이 관계자는 “이번 일이 일어난 것도 H사가 자사의 경광등을 납품하기 위해 오 보좌관에게 문제 제기를 한 게 시발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정 안 해” “문제 없다” 순찰차를 납품하는 업체들이 자사의 경광등이 아닌 다른 업체의 것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H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Y사 관계자는 “2022~2023년 H사 경광등에 문제가 발생해 현대자동차가 납기를 놓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지난해 5~6월 경광등 납품업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던 걸로 안다”고 주장했다. Y사 역시 H사와 경광등 발주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Y사 관계자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H사에 경광등 발주 견적서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납기가 (지난해) 12월12일까지라 우리한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11월15일 경찰청과 경광등 업체를 바꾸는 문제로 협의를 진행했고, 11월26일에 바뀐 업체의 경광등으로 우리 공장에서 시연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H사는 순찰차 납품업체들과의 갈등을 ‘민원’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H사 대표가 신정훈 의원실 오 보좌관을 만나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내용이 지난 5월 나온 보도자료의 배경이 됐다는 의혹이다. 실제로 오 보좌관은 처음에는 민원을 받아 보도자료를 작성한 게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H사 대표를 만났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8월경 지역의 향우회장과 함께 H사의 대표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 보좌관이 경찰청의 순찰차 사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오 보좌관은 지난 5월14일에 나온 보도자료에 대해 묻자 “지난해 8월부터 이 문제를 파고 있었다”며 “내부에서 나온 정보도 있고 경찰청에서도 (순찰차 사업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문제로 경찰청 관계자를 30~40번 만났다”고 밝혔다. 눈여겨볼 대목은 H사 대표가 같은 시기 신 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냈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나주시·화순군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신 의원의 ‘연간 300만원 초과 기부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H사 대표는 지난해 8월22일 500만원을 기부했다. 신 의원은 2014년 7월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고 20대(2020년), 21대(2024년)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다. 2014~2016년, 2020~2024년 등 신 의원이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동안 H사 대표가 후원금을 낸 건 지난해 8월이 유일하다. 경광등 업체 변경 문제 때문? “사기업 갈등에 보좌관이 왜?” 오 보좌관은 H사 대표가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몰랐다”면서 “회계를 관리하는 직원은 나주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H사 대표에 대해 “이전까지 전혀 몰랐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체 정치후원금 모금 한도) 3억원 중에 500만원을 후원했다고 해서 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에 매달리겠느냐”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업체의 문제 제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자료를 받아보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좌관은 “경찰차 특장 시장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 뛰어드는 업체도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맨날 같이 했던 업체를 빼버리면 가만히 있겠나. 나는 Y사가 욕심을 부리면서 이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해왔던 곳과 똑같이 하면 되지, 더 이익을 취하려 하느냐”고 되물었다. 업체 간 중재의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민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신 의원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후원금을 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일을 잘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후원금을 냈다. 지금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며 “사업을 접을까 생각할 정도로 머리 아픈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오 보좌관을 만나 민원을 넣었는지는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Y사는 신정훈 의원실발 보도자료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Y사 관계자는 “정부 기관에 납품하는 제품을 만드는 건 맞지만, 엄연히 사기업 간 일어난 일에 국회 보좌진이 개입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기사가 나간 이후 우리 회사는 경제, 이미지 부분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경찰청과 지체상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업체 문제로 인한 지연이 결정되면 지체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차량 출고가 늦어지면서 보관을 위한 토지 대여료가 1억2000만원 정도 나갔다. 무엇보다 자회사인 N사의 신용등급 하락, 기사로 인한 이미지 훼손 등 무형적인 피해도 만만찮다”고 하소연했다. 받아쓴 언론 “취하해 달라” 한편 Y사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나간 보도자료로 기사를 작성한 매체 3곳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Y사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국민에게 경찰 장비 도입 과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며 “신청인(Y사)의 업무 수행 능력과 투명성에 대한 의구심을 야기해 치안 활동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어 정정보도를 구한다”고 조정을 신청했다. Y사 관계자는 “2곳의 매체에서 ‘기사를 내릴 테니 소를 취하해 달라’는 내용의 답변을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