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불복 난방비' 옥수동 아파트의 비밀

벤츠 타는 동대표 난방비 ‘0원’

[일요시사=사회팀] 서울 옥수동의 A아파트가 난방비 논란에 휩싸였다. 비정상적인 난방비 부과 때문이다. 한 겨울, 아껴 쓴 집은 80만원, 적당히 쓴 집은 0원이 나왔다. 이런 사례는 한둘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아파트 난방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었다. 난방 시스템의 맹점을 악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서울 옥수동에 위치한 A아파트 9개 동에는 총 536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겨울 536세대 중 410세대는 난방비가 0원에서 9만원에 불과했다. 42평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방비였던 것. 벌벌 떨며 아껴 쓴 집은 80만원, 따뜻하게 난방한 집은 0원이 나왔다. 아파트 주민들은 분개했고 주민들의 난방비를 수소문하고 관리소 측에 항의했다.

난방비 미스터리

특히 주민 김씨는 A아파트 난방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사실 이 문제는 2년 넘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 등 주민들은 지난해 서울시에 진정을 접수했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해 11월 감사에 나서 A아파트의 2007년 1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의 동절기 27개월분 난방비를 조사했다. 서울시 감사 결과 세대 난방비가 ‘0원’으로 측정된 건수가 무려 300건으로 드러났다. 세대 난방비가 9만원 이하인 건수도 2398건으로 나타났다.

A아파트 관리소 관계자에 따르면 A아파트는 중앙난방 특성상 난방불균형이 불가피하다. 관리소 관계자는 “중앙난방식이기 때문에 난방비 부과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로 지난 2012년에는 계량기를 전부 교체했었다. 과거부터 문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계량기 자체의 문제라 쉽게 개선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 등 주민들은 단순히 ‘0원’이라는 수치에 분개한 게 아니었다. 난방비가 적게 나온 세대의 특성에 주목했다. 53페이지 분량의 서울시 감사결과를 보니 특정 세대의 난방비가 눈에 띄게 적었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사회지도층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몇몇 아파트 임원은 서울시 감사에 따른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고급술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난방비 '0원'이 나온 한 가구는 “난방비 ‘0원’이 나온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0원’이 나올 경우 아파트 관리소에서 직접 점검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 김씨 등 주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집단소송을 위해 20명 가량이 힘을 합쳐 소송비용을 마련한 상태다.


김씨는 관리소 측이 국토부에 제출한 민원 내용 중 ‘다른 세대의 난방 사용량 자료를 취득한 일부 주민이 다른 세대에게 왜 하나도 사용 안했느냐는 등을 따져 물을 때의 정당성 여부는?’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자료를 줄 생각이 없었다고 판단한 것.

관리소 측은 주택법 시행령에 따라 세대별 내역을 마음대로 공개할 수 없다고 답했다.또 김씨는 관리소 측에 다른 세대의 난방 사용량 자료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관리소 측은 국토부로부터 수신한 공문 한 장만 내밀었다.

논란이 끊이지 않자 관리소 측은 서울시 난방비 관련 실태조사에 따른 사유 규명을 요청했다. 세대난방비가 0원 및 9만원 이하 부과세대에 대해 그 사유를 규명하여 제출하라는 성동구청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0원’이 나온 가구의 난방비 실태조사 사유서 제출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요금 덤터기 논란…주민 간 대립
[80만원 vs 1만원] 시스템, 구조적 문제 원인

이후 관리소 측은 개별난방을 추진했다. 관리소 측은 “중앙난방식 계량기 부과가 문제가 있으니 평형별 부과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개별난방으로 바꾸기 위해 주민투표를 진행했지만 61.2%만이 개별난방을 찬성했다. 80%가 넘어야 아파트 관리 규약이 개정된다.

관계자에 따르면 개별난방으로 전환할 경우 최소 2~3억원이 절약된다. A아파트는 개별난방을 두고 3월 중 재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개별난방 찬성률이 80%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파트 기득권세력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난방비가 적게 나왔던 세대에게 개별난방은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는 것.

성동구청 주택과 관계자는 “다른 아파트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다. 계량기를 안 쓰는 아파트가 더 많다”며 “아파트 관리 규약을 따라 평형별 부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고 설명했다.


한국지역난방공사 관계자는 “배터리 수명이 다 되거나 열량계를 조작하면 검침이 안 되기 때문에 ‘난방비 0원 세대’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계량기는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강제로 교체할 수도 없다. 관리 책임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있다”고 덧붙였다.

계량기 방식으로 난방비를 부과하는 것은 아파트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지적된다. 이미 난방비 부과 기준에 구멍이 뚫린 상태다. 공동주택관리주체는 매월 난방계량기 검침과정에서 난방계량기(배터리 포함)의 봉인 훼손 또는 고장 여부를 점검하여 장기간 난방비가 부적정하게 부과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각 세대 주방 밑에 있는 계량기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계량기는 누구나 손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맹점이 있다. 심지어 인터넷엔 ‘난방비를 0원으로 만드는 법’이라는 글도 올라온다.

지식경제부는 2012년 7월 ‘중앙집중 난방방식의 공동주택에 대한 난방계량기 등의 설치 기준’을 개정해 공시했다. 이에 따르면 주택건설사업자는 난방계량기의 설치완료 후 입주자의 임의조작 등을 방지하기 위해 유량부, 감온부, 연산부함 및 신호전송선 연결부에는 봉인하고 배터리 교환부위에는 봉인 또는 봉인스티커를 붙인다.

그러나 말만 봉인이다. 입주자가 봉인을 고의적으로 뜯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작한 것이 적발된다 해도 별 수 없다. 그저 가이드라인에 불과해 법적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개정된 준칙이 실제 각 아파트 관리규약에 반영돼 계량기가 공용재산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온적인 태도

난방비 문제는 A아파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앙난방식이라면 계량기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계량기가 고장 난 가구가 덜 낸 난방비는 공용으로 처리돼 단지 전체 가구가 균일하게 나눠 부담하게 되는데, 정상적 계량기가 작동하는 가구는 내야 할 난방비보다 더 부담하게 된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지난해 말 중앙난방식 아파트의 외부 계량기를 표본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의 20%가 고장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의 중앙난방식 아파트는 총 300만 가구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강화되는 ‘아파트 비리’ 처벌 보니…

최근 아파트 단지의 동대표 선출 및 자치 관리 사업 등에서 비리가 불거지는 사례가 많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법령이 강화될 예정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5월23일 ‘아파트 관리제도 개선대책’을 마련하고 지난해 12월 주택법을 개정했다. 오는 6월부터 순차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6월25일부터는 입주자대표회의의 공사·용역을 둘러싼 뒷돈 수수 등의 비리에 대한 입주민의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공사·용역 계약서의 아파트 누리집·게시판 공개가 의무화 ▲아파트 동대표 선출을 둘러싼 분쟁과 갈등 예방을 위해 전자투표제가 시행 ▲아파트 관리와 관련한 부정한 재물 취득자 등에 대한 처벌은 1년 이하 징역, 1000만원 이하 벌금에서 2년 이하 징역, 2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강화 ▲아파트 관리 비리가 의심되는 경우에는 입주민 10분의 3 이상의 요청 또는 지자체 필요에 의해 감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내년부터는 3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는 매년 외부 전문가의 회계감사를 받도록 의무화돼 관리비 내역 등의 상시 감시체계가 마련된다. 또 아파트 관리업체, 공사·용역업체 선정을 둘러싼 비리 차단을 위해 전자입찰제 의무화가 시행 관리비 공개 누리집인 K-APT(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 또는 조달청 입찰시스템으로 전자입찰을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입주민 누구나 아파트 관리 분쟁이나 비리 등에 관해 쉽게 문의하고 상담할 수 있는 콜센터인 ‘아파트관리 지원센터’가 4월 주택관리공단 내에 설치될 예정이다. 공사·용역의 적정성에 대한 자문도 가능하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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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