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방사능 공포' 소문과 진실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4.02.05 10: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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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산물 안전? 위험?…생선요리 먹을 때마다 '찜찜'

[일요시사=사회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방사능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됐다. 일본 발 방사능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흐르면서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위기로 인식하게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유통 수산물을 두고 말이 많았다. 여전히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다’ 도대체 뭐가 맞는 걸까. 방사능 오염 실태 및 정보를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음식물에 의한 ‘내부피폭’의 위험성에 대해 알아봤다.




이따금씩 구내식당에서 생선튀김과 동태찌개가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다. 노량진 수산시장도 마찬가지다. 한때 손님이 급감했지만 요즘엔 다시 되살아난 분위기다. 술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산 맥주는 여전히 뜨거운 인기다. 방사능 위험성이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근데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든다. 방사능 내부 피폭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방사능 위험성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방사능 피폭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방사능 피폭은 매우 치명적이다. 특히 외부 피폭과 달리 내부 피폭은 더 위험하다고 알려진다.


‘먹거나 말거나’
정부 미온적 태도


방사능 외부 피폭은 사람의 신체 외부에 있는 방사선원으로부터 방출된 방사선에 의한 피폭을 말한다. 이 경우 투과력이 강한 엑스선, 감마선 등은 신체조직 전체에 영향을 주지만, 베타선은 투과력이 약해 피부 및 안구에 영향을 준다.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 연간 피폭한도는 1000시버트다. 1000시버트는 1밀리시버트 정도 수준이다. 그리고 방사선 종사자의 연평균 허용선량은 직업의 특수성을 고려해 20밀리시버트다. 자연 상태에서 쬐는 방사능은 2.4밀리시버트 정도다. 유럽을 비행기로 여행한다고 해도 0.07밀리시버트의 방사능밖에 쬐지 않는다.


병원에서 흉부 엑스선을 촬영할 때의 피폭량은 0.1∼0.3밀리시버트고 CT 촬영을 할 때는 이 수치가 늘어나 8∼1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을 쬐게 된다. 방사능 피폭으로 인체에 올 수 있는 영향은 확률적 영향(지발성)과 결정적 영향(급성)이 있다.




확률적 영향은 저선량을 장시간 피폭당했을 때 있을 수 있는 영향으로 선량에 발생확률이 비례한다. 증상은 악성종양(암)과 더불어 백혈병, 수명단축, 겉늙음현상(가령현상), 유전적 결함으로 인한 돌연변이나 염색체 이상이 올 수 있다.

0부터 250밀리시버트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 하지만 250밀리시버트부터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500밀리시버트 정도가 되면 백혈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이때는 외적인 증상은 없다. 1000밀리시버트 부터는 위험수준이다. 특히 1500밀리시버트부터는 방사선숙취 현상이 일어난다.

이 수치가 4000밀리시버트를 넘어가면 생명이 지장이 있다. 4000밀리시버트는 반치사선량으로, 전신조사 시 30일 이내에 50%가 사망하는 선량이다. 조혈기장해를 일으키는 선량으로 볼 수 있다.

700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을 쬐게 되면 최소 2∼3주 내 100% 사망이라는 충격적 결과가 나타난다. 1만밀리시버트를 넘는 경우는 위장관사가, 10만밀리시버트부터는 중추신경사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알려진다. 방사선을 쬐는 도중 세포손상으로 사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피폭보다 위험한 게 내부피폭이다. 방사선피폭 가운데 체내에 흡수된, 혹은 체내에서 생성된 방사성물질에 의한 피폭을 말한다. 알파선, 베타선 등 입자선에 의한 선량이 감마선 등 전자파에 비해서 크게 되는 점이 외부피폭의 경우와 다르다. 한마디로 체내에 유입되는 방사성 핵종으로부터의 피폭이다.

일본 아이돌 토키오의 리더 야마구치 타츠야는 후쿠시마를 응원하는 캠페인으로 ‘후쿠시마 사랑해’라는 광고를 촬영하고 ‘동일본을 먹어서 응원하자’며 1년 동안 그 지역 농산물을 먹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방송 도중 받은 전신 스캔에서 ‘세슘 137에 내부 피폭 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내부피폭은 괴담이 아니었던 것.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불안감 고조
피폭 실태·정보 제대로 파악 못해 우왕좌왕


전문가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음식이 체내로 흡수되면, 갖가지 방사성 원소가 각기 다른 곳을 공격한다고 말한다. 세슘은 우리 몸의 혈액과 근육으로 이동해 DNA 구조를 변형시킨다. 요오드와 스트론튬은 각각 갑상선과 뼈에 모여 장애를 일으키고, 플루토늄은 폐를 집중적으로 손상시킨다. 음식물을 통한 내부 피폭이 직접 방사능을 쬐는 외부 피폭보다 위험한 건 자명한 사실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외부 피폭과 내부 피폭이 같은 양이라고 하면 내부 피폭의 노출이 장기적이다. 외부 피폭은 피난과 특수복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하지만 내부 피폭은 방법이 없다. 몸 속의 방사능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도 문제다. 요오드는 반감기가 1주일 정도지만 플루토늄은 수백년이 걸린다. 사실상 체외 배출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노약자는 매우 위험하다. 세포의 손상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전문가들은 엇갈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각각인 것. 대개 원자력 전문가들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키는 반면에 의학계에서는 내부 피폭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피폭이 위험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전사고 이후
계속되는 후폭풍


호흡기를 통한 외부 피폭보다 음식물을 통한 내부 피폭이 훨씬 심각하다. 우크라이나 보건 당국의 조사 결과 200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선 피폭 경로의 90% 정도가 우유, 육류, 버섯, 과일, 채소 등 식품으로 인한 내부 피폭이었다. 외부 피폭은 방사성 물질의 농도와 피폭자의 거리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지만, 내부 피폭은 다양한 경로로 고스란히 체내에 축적된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복구비용은 우리 돈으로 약 265조에 이른다. 문제는 이 상황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방사성 물질의 해양 누출과 수산물 오염에 대해 모른 체했다. 현재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오염수는 계속 유출되고 있다고 알려진다. 일본 당국은 방사능 오염수 유출에 대한 사고등급을 ‘일탈’에 해당하는 1등급에서 ‘중대한 이상 현상’에 해당하는 3등급으로 올렸다.

<주간 아사히>는 이바라키와 지바현 등 일본 간토 지방에 속한 15개 기초 지자체의 어린이 및 청소년 10명 가운데 7명꼴로 소변에서 세슘이 검출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후쿠시마 인근 지역 사람들의 체내 세슘 비율의 민낯이 드러났다.

당시 검출된 세슘은 134, 137이다. 세슘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로 알려진다. 따라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음식물 섭취 등을 거쳐 아이들의 체내로 들어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소변 검사를 진행한 이바라키현 모리야시에 있는 조소생활협동조합 관계자는 <주간 아사히> 인터뷰에서 “8살 된 아이의 소변에서 세슘 1베크럴이 검출됐다고 한다면, 이 아이는 하루 몇 시간씩 세슘을 흡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내부 피폭에는 허용 한계가 없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건강 체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방사선 직접 노출보다 
체내 흡수가 더 문제


내부 피폭이 외부 피폭보다 위험한 것은 방사선의 영향을 장기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야가시키 가쓰마 류큐대학 명예교수는 “후쿠시마와 간토 지방의 아이들에게서 코피나 하혈 등이 발견되고 갑상선암이 증가하는 원인도 내부 피폭”이라며 “파괴된 유전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유전자 조직이 잘못 연결되면 암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히로시마 원폭 현장에서 환자들을 진료한 의사 히다 순타로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내부 피폭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히다는 “원자폭탄에서 나온 방사능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미국은 군가 기밀로 숨겨왔고, 의사와 피폭자에게 침묵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히다는 “미국에서 내부 피폭을 연구한 이들도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양심을 지키며 연구하고 있었다”며 “그 뒤 미국과 독일에서 동료들과 방사능 피폭에 대해 공부했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그는 “지금도 후쿠시마 폭발 뒤 피폭은 계속되고 있다. 공기와 물 그리고 흙이 오염돼 여기에서 나온 각종 음식물은 몸 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다. 특히 아이들이 문제다. 점차 아무런 이유없이 설사가 계속되고, 코피가 멈추지 않고, 구강염이 계속 되는 일이 후쿠시마부터 시작해 일본 전체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말없이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


이러한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입을 닫고 있다. 마치 방사능 함구령이 떨어진 것처럼 조용하다. 일부 언론은 ‘방사능 괴담’이라며 감싸기에 나서기도 했다.

일본의 살아있는 지식인이자 저명한 핵물리학자로 유명한 고이데 히로아키 교수는 <JTBC>에서 “일본 아베총리는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가 완전 통제되고 있다고 말했지만 거짓말로 밝혀졌다. 일본산 어류는 잡히는 곳과 출하되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8개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수입금지 조치는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준치를 강조한다. 기준치를 넘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 탈핵전문가 김익중 동국대 교수는 강연장에서 “‘의학적인’ 안전 기준치란 없다.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능도 암 발생 확률을 증가시킨다. 제로(0)가 가장 안전한 것이다. 식품에 허용되는 방사능 기준치란 원전의 이해 당사자들, 정부나 기업 등의 ‘관리’ 수치일 뿐이다. 일본만 하더라도 후쿠시마 이후 피폭량 기준치를 20배 올렸으면서 식품 기준치는 1/4로 줄였다. 우리나라도 종전에는 기준치를 370베크렐로 잡았다가 최근에 100베크렐로 낮춘 것이다”고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기준치의 모호성


ICRP(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는 약 30개국, 250명 정도의 정부 관료 및 관계자들이 주축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로 이 단체는 각국의 원자력 산업계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관련 산업계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일까. 방사능 영향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리스크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알려진다. 반면 양심적인 과학자들이 만든 단체인 ECRR(유럽방사선위험위원회)는 ICRP에 대항하고 있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공포의 ‘AI’


우리나라와 중국, 베트남에서 AI(조류 인플루엔자)가 발생해 비상이 걸렸다. ‘AI’는 avian(새)과 influenza(유행병)의 합성어다. 주로 야생 조류 또는 가금류에 영향을 미치는 인플루엔자를 말하며, 드물게는 인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중국에서 발생한 AI의 종류는 신종 H7N9형으로 며칠 전 상하이에선 30대 의사와 70대 환자가 감염돼 숨졌다. 베트남 사망자는 H5N1형에 의한 것이고 우리나라는 H5N8형인데 집오리, 가창오리는 물론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큰기러기조차 고병원성 AI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이번 AI 사태의 발병원인으로 야생 철새를 지목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조류단체에서는 철새가 오히려 농장오리로부터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WTO(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중국,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에서 고병원성 AI에 648명이 감염돼 384명이 사망했다. 중국 신종 AI(H7N9형)에 걸린 환자는 177명으로 이 가운데 47명이 숨졌다.

전국 확산 가능성
감염돼 숨지기도

이처럼 AI의 사망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위험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예방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AI에 감염되면 감기처럼 고열과 콧물 등이 있지만 정도가 더 심하고 전염성이 강하다. 고병원성 AI A형 H5N1 바이러스의 경우, 환자는 감염된 수일 이후 폐렴이 나타났다가 호흡부전으로 진행돼 사망할 위험성이 높다고 알려졌다.

감염 환자에게는 타미플루나 리렌자와 같은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해 치료한다. 이번 국내에서 살처분에 동원된 관계자 등에게 예방적으로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AI의 avian(조류의)은 1870년대 생겨난 말로, 새를 의미하는 라틴어 어근 avi에 형용사어미 -an이 덧붙은 것이다. 인플루엔자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유럽에 유행성 감기가 창궐했던 1743년 ‘유행병’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influenza에서 차양된 말이다.

이 용어를 더 추적하면 influence(영향) 또는 influentia(영향을 미치는 것:중세라틴어)에 이른다. 19세기 중반 이래에는 종종 ‘독감’의 뜻으로 쓰였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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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